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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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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수록 괴로운 ‘붉은 딱지’

등록 2001-05-02 00:00 수정 2020-05-02 04:21

동산 경매에까지 몰린 개인파산자 급증…채권금액 따지지 않고 압류부터 서두르는 채권자들

익숙하지만 낯선 것. 경기도 성남에 사는 박아무개(36)씨에게 요즘 집안에 있는 텔레비전 등속의 살림살이는 그런 것이다. 왜 그럴까. 박씨는 사실상 개인 파산자다. 집안의 텔레비전, 전화기, 냉장고, 세탁기는 이제 더이상 그의 것이 아니다. 채권자에게 압류된 살림살이 중 압류딱지가 붙은 네 가지를 다 합쳐도 감정가는 31만5천원에 불과하다. 일자리를 잃은 뒤 창업을 위해 아둥바둥하다 쌓인 카드빚 150만원을 파출부 나가는 아내의 소득으로는 도저히 갚을 수 없었다. 결국 카드회사는 박씨의 살림살이에 대한 강제집행에 들어갔고 세간살이마다 붉은색 압류딱지가 붙여졌다. 끝내 경매에 부쳐지자 그는 한국동산경매정보주식회사(www.insight24.co.kr)에 ‘도움’(?)을 요청했다. 동산경매는 대개 집안에 앉아서 포커 치듯이 경매참여자들이 돈다발을 던지며 흥정하는 식으로 이뤄진다. 한국동산경매정보주식회사 양원준(27) 대표는 “박씨가 경매를 받아서 자기들한테 임대로 놓아달라고 우리한테 ‘구조요청’을 해왔다”며 “경락가 31만원에 박씨의 텔레비전 등을 사들인 우리가 한달 6천원의 임대료를 받고 다시 박씨에게 빌려주고 있다”고 말했다.

경매된 자기 물건을 임대해 쓰다

전국적으로 한햇동안 이뤄지는 동산경매는 7만여건. 세대 구성원을 4명으로 치면 30여만명이 빚을 갚지 못해 동산경매에 내몰리는 셈이다. 양 대표는 “가계빚에 몰려 최근 동산경매로 가재도구를 차압당하는 개인이 두배 정도 늘어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물론 빚은 빚일뿐 채무자의 성실성 같은 건 따지지 않는다. 동산경매까지 왔다면 ‘마지막 벼랑’까지 다 몰린 것이다. 서울지법 집행관사무소 손성기 소장은 “부동산 처분 정도로 안 되니까 결국 동산압류까지 오는 것”이라며 “가정집 살림압류는 간접적으로 빚을 ‘해결’하려고 채권자들이 흔히 쓰는 방법”이라고 말했다. 막상 붉은 압류딱지가 붙으면 채무자들이 또다른 빚을 내는 등 급전을 마련해 일부씩이라도 변제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집행관들이 나가보면 중고 살림살이는 가격도 제대로 안 나오기 때문에 집행비용미달로 ‘불능’처리되기 일쑤다. 손 소장은 “채무자의 지하 단칸방에 가보면 낡은 냉장고 하나만 달랑 있는 경우가 수두룩하다”며 “그러면 감정하고 경매를 진행시키는 데 드는 비용도 안 나오기 때문에 불능으로 처리하고 만다”고 말했다.

경매신청비용도 안 떨어지는 살림을 채권자가 굳이 압류하는 이유는 뭘까. 물론 경매에 넘어가기 전까지는 압류딱지가 붙어 있더라도 채무자가 사용할 수는 있다. 양 대표는 “박씨처럼 살림 감정가가 31만원밖에 안 되더라도 채권자는 ‘절대 10원 한장 떼일 수 없다’는 식으로 채무자를 심리적으로 압박한다”며 “제도금융권에서 신용리스크 관리가 엄격해지자 채무자들이 사채쪽으로 손을 벌린 탓인지 최근 동산경매로 나온 물건의 20% 정도는 채권자가 사채업자”라고 덧붙였다.

법원 집행관이 채무자의 동산을 압류할 때 처음에는 대개 사람이 없으면 돌아서지만 두 번째 찾아갈 때는 자물쇠 따는 전문가를 대동하거나 아예 문을 부수고 들어가기도 한다. 집안에 들어가면 정해진 ‘압류금지물’만 빼고 죄다 압류딱지를 붙인다. 동산 강제집행 때 압류가 금지되는 물건은 △생활에 필요한 두달치 식료품과 연료 △없어서는 안 될 이부자리나 부엌기구 등 기타 생필품 △생활에 필요한 한달치 생계비 △족보, 일기장, 안경, 지팡이 등이다. 압류딱지 중 파란색은 가압류이고 붉은색은 확정판결이 난 본압류다. 채권자를 피해 도망다니다 집에 돌아와보면 이미 경매절차까지 끝나고 휑하니 비어 있는 경우도 있다.

“딴 놈 오기전에 챙기자”

특히 박씨의 경우처럼 요즘에는 채권금액을 따지지 않고 무조건 압류부터 하고보자는 채권자들이 늘고 있다. 대상 채권이 소액화되는 것이다. 서울지법 집행관사무소쪽은 “100만원이나 150만원 등 압류대상 채권액이 적은 채권자들도 마구 압류를 걸고 나선다”며 “채무자가 이 카드 저 카드로 돌려막다 한 카드에서 막히면 잇따라 빚이 터지는 구조를 너무 잘 아는 카드사들이 다른 채권자에 앞서 채무자의 살림살이를 챙기려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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