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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락의 도사들 벼랑에 서다

등록 2003-07-17 00:00 수정 2020-05-02 04:23

스크린에서 치정극에 얽힌 바람난 언니들의 최후는 어떻게 되었나

2001년 봄 홍콩에서 개봉된 우리 영화 의 중국식 제목은 ‘쾌락도사’였다. 커닝도사, 연애도사에서 보듯 쾌락이라는 전문분야에서 도(道)를 얻은 쾌락도사냐고 천만에. 외도의 쾌락 끝에 죽음에 이른 쾌락도사(快樂到死)였다. 실업자 남편 대신 영어학원을 운영해 실질적 가장 역할을 하는 최보라(전도연)의 정신적·육체적 해방구는 빈 우유갑을 손질해 분리수거하는 주부 남편 서민기(최민식)의 품이 아니라 격렬한 정사로 설레게 하는 애인 김일범(주진모)의 아파트였다. 그러나 애인과 놀러갔던 곳의 주유소 영수증을 차 안에 남기는 부주의함에 더해 한밤중에 애인을 만나러 가기 위해 아이에게 수면제를 먹여 관객의 심기를 긁었던 최보라(극장에서 이 대목에 이르자 어린이를 사랑하는 마음 착한 남녀 관객들이 야유를 보냈던 기억이 난다). 그는 끝내 남편의 손에 죽어야 했다. 잘나가는 커리어우먼으로서 연애와 가정을 분리해 그 절충점에서 살고자 했건만, 그만을 유일한 여인으로 바라보고 사는 애인의 격정과 기 한번 펴지 못하고 살던 남편의 한맺힌 분노 속에서 최보라는 치정극의 주인공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 뒤, 결혼과 사랑은 웬만해선 겹쳐지지 않게 마련이며 어차피 결혼은 ‘욕망이 거래되는 경제활동’이라는 걸 진작부터 간파한 영악한 여자가 등장했다. 의 연희(엄정화)는 남편과 애인 사이에서 번민하지 않는다. 대신 남편에게 케이크를 구워주랴, 애인에게 콩나물비빔밥을 만들어주랴 두집 살림을 하는 것이 좀 “바쁠 뿐”이다. “가난하지 않은 남자의 아내”가 되고 싶었던 연희는 섹시한 미모와 똑 부러지는 살림솜씨를 무기로 성적 매력은 별로 없지만 돈 잘 버는 남자와 결혼한다. 그러나 사랑과 섹스의 욕망도 저버릴 순 없다. 그렇기에 결혼보다는 다만 ‘섹시한 여자친구’를 원하고 부모로부터 독립하길 바라는 대학강사 준영은 또 다른 ‘배필’이 된다. 연희가 1500만원을 투자해 마련한 준영의 옥탑방은, 최보라처럼 따분한 결혼생활에서 잠시 벗어나는 들뜬 열정의 분출구가 아니라 “내가 꾸민 공간”이라며 지분을 요구할 수 있는 집 밖의 집이다. 결혼을 코앞에 두고도 (바람 피우지 않을) 자신이 아니라 들키지 않을 자신이 있다는 연희야말로 진정한 ‘쾌락의 도사’가 될 자격이 충분하지 않은가.

하지만 대부분의 여성들은 연희처럼 깜찍한 ‘기획 외도’를 할 조건이나 강심장을 타고나지 못했다. 의 미흔(김윤진)에게 남편 아닌 남자와의 사랑은 말 그대로 바람처럼 찾아왔다 바람처럼 사라진다. 마치 어느 날 갑자기 남편의 외도 사실이 예고 없는 재난처럼 뒤통수를 후려쳤던 것처럼 새로운 연인 역시 어이없는 사고로 죽음을 맞는다. 남편도 애인도 다 잃고 비정규직 노동자로 스스로를 먹여살려야 하는 미흔. 그런데 미흔의 강함은 여기서 진가를 발휘한다. “과거 어느 때보다 살아 있다고 느낀다. 활력은 불행으로부터 시작한다.” 식충이처럼 남편한테 빌붙어 산다고 자조했던 것에 비하자면 ‘바람’은 그녀에게 삶의 의욕과 이유를 발견하게 해준 힘이었다.

의 호정(문소리)도 미흔처럼 콩가루 집안이 되기는 마찬가지다. 아들도 잃고 남편과도 헤어진다. 하지만 미흔의 우울기와 무기력함을 걷어낸 호정은 백배 씩씩하고 경쾌하다. 배를 앓아 낳은 친자식처럼 사랑하지만 아들 수인에게 입양 사실을 숨기지 않는다. 입양했다는 걸 왜 알려줬냐며 괴로워하는 아들에게 호정은 이런 현답을 내놓는다. “모두들 다 사실을 알고 있는데 너 혼자 모르면 불공평하잖아.” 호정은 환갑 나이에 애인한테서 처음으로 오르가슴을 느꼈다는 황당한 시어머니를 꼭 안아주며, 슬금슬금 바람 피우는 남편에 속태우기는커녕 차라리 이웃집 고삐리와 맞바람을 피운다. 이런 까닭에 영화 마지막에 다시 시작하자고 손 내미는 남편한테 “당신 애가 아니다”라고 돌아서는 모습은 쿨한 캐릭터 속에서 일관성을 얻는다. ‘미성년자와 바람난 유부녀’라고 뭇매 맞기 딱 좋지만 호정의 솔직함과 인격적 투명함은, 밖에선 진보적인 변호사지만 거짓말로 얼룩진 남편 영작에 비하면 박수를 받아도 좋다. 그래서 남편한테 맞아 다친 손을 깁스한 채 어린 연인과 섹스를 하는 장면에서 방안을 물들이던 아침햇살은 그녀의 홀로서기에 대한 따뜻한 축복과도 같다. 마치 에서 일도 연애도 안 풀려 이리저리 꼬이기만 했던 연(진희경)이 관계에 대한 부담을 버리고 오르가슴을 느끼고 나서 유리창에 달라붙어 한강을 내다보던 아름다운 풍경처럼.

스크린 속 바람난 여자들은 모종의 대가를 치르는 게 보통이다. 여자들이 욕망을 추구하는 데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은 세상과 부딪혀 마찰을 빚는다. 본인 또는 애인이 어처구니없는 죽음을 맞거나, 하다못해 의 호정(강수연)처럼 간통죄로 고소당하는 해프닝을 겪는다. 그러나 바람은 또한 그녀들을 강하게 단련시켜 자신의 삶을 정면으로 들여다보게 하는 계기이기도 하다. ‘쾌락의 도사’일 뿐 아니라 ‘인생의 도사’가 되도록. 단,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말이다.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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