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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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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의 ‘금고’, 막차여 안녕?

등록 2003-12-26 00:00 수정 2020-05-03 04:23
집권 열달만에 핵심측근 대몰락에 이른 속사정… 권력문화 정상화 속 ‘386 앵벌이’ 쑥대밭

노무현 대통령이 집권한 지 불과 열달 만에 몇명 되지 않는 측근들이 줄줄이 구속되거나 검찰 수사를 받고 있다. 염동연·안희정·양길승·최도술·선봉술·강금원·이광재씨 등 이루 세기도 어렵다. 측근들의 대몰락이라고 할 만한 상황이다.

그 중에서도 이광재 전 청와대 국정상황실장과 여택수 청와대 부속실 행정관(대통령 수행비서)이 수사선상에 오르고 안희정씨가 구속된 사건의 파장은 좀더 크다. 이광재·안희정씨가 노 대통령의 왼팔, 오른팔로 꼽혔으며 노무현 정권의 주축을 형성한 386 그룹의 대표주자라는 상징성도 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몇 가지 궁금증이 일어나는 것도 사실이다. 노무현 정권이 사상 유례없이 부패한 정권이기 때문에 집권 열달도 안 되어 측근들이 줄줄이 구속되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까닭이 있는 것인지. 그리고 노 대통령에게 386은 과연 무엇이었는지. 또한 386 이후의 노 대통령은 어디에 설 것인지 따위의 문제들이다.

386 대표주자 줄줄이 심판대에 올라

이와 관련해선 안희정씨의 경우가 열쇠를 제공하는 것 같다. 그의 고려대 운동권 2년 후배(85학번)는 이렇게 말했다. “희정이 형은 충남 논산으로 국회의원 출마를 준비하면서도 내심으로는 내내 불안해했다. 언젠가 자기가 짊어질 짐이 돌아올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던 끝에 검찰 출두에 앞서 결국 모든 것을 짊어지겠다는 결심을 주변에 털어놓았다.” 과거 노무현 캠프의 살림살이 담당으로서 이런저런 ‘진흙탕 문화’에 발을 담그게 되었으며 그에 따라 일정한 대가를 치르게 된 현실 속에서의 고민에서 내내 벗어날 수 없었다는 이야기다.

사실 노 대통령과 안희정씨의 고민은 지난 2월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시절부터 비롯되었다고 한다. 한나라당이 대선 당시 제기했던 안희정·염동연씨의 나라종금 자금 수수설 때문이었다. 나라종금 문제는 한나라당이 대선 투표일 며칠 전에 주장했으나, 노무현 선대위쪽이 ‘사실무근’이라며 부인해 큰 선거 쟁점이 되진 않고 넘어갔다. 그러나 돈을 받은 게 사실인 당사자들로서는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노무현 당선자는 이 무렵 안희정씨로부터 사건의 전말을 보고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고민 끝에 “자네가 스스로 국민 앞에 나서서 사실을 고백하는 게 좋겠다. 그래서 살아남으면 살아남는 것이고…”라는 취지로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통령의 측근이라고 해서 비리 의혹을 감쌀 수 없다는 뜻과, 아끼는 측근이지만 사자가 새끼를 벼랑에서 굴려 살아돌아오길 기대하는 심정이 함께 담긴 이야기였다. 이런 고민이 오가던 지난 1월 검찰은 나라종금 문제에 대해 본격적인 수사에 착수하기 전이었다.

당연시되던 안희정씨의 청와대 입성은 이런 문제 때문에 유보됐다. 그리고 안씨는 주변 친구들과 의논한 끝에 기자회견을 통해 먼저 사실을 고백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의논을 더 해본 결과 검찰이 수사를 진행하다 필요에 의해 소환하기 전에 미리 기자회견을 자청해 쟁점을 만들어낸다는 것도 모양이 이상하다는 의견이 나와 기자회견을 보류한 것으로 알려졌다.

어쨌든 검찰은 몇달 뒤 이 사건 수사에 착수해 안씨가 고려대 선배인 김효근씨한테서 생수회사인 장수천 투자금 명목으로 2억원을 받은 사실을 밝혀내고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그러나 법원은 법률 적용에 하자가 있다는 판단으로 그에 대해 두번씩이나 청구된 구속영장을 기각했으며, 이에 따라 안씨는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아오던 터였다.

눈처럼 깨끗한 세상으로 가는 대가

대선후보 정무특보를 지낸 염동연씨도 사정은 비슷했다. 그는 나라종금 대주주인 김호준씨한테서 2억8800만원을 받은 혐의로 지난 4월 노 대통령의 측근 가운데 ‘구속 1호’가 되었다. 그러자 염씨의 주변에선 “대통령을 만들어놓고 훈장을 받기는커녕 이게 웬 꼴”이냐는 서운함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이 무렵 청와대의 한 고위관계자가 구속 중인 염씨를 면회해 “우리는 눈처럼 깨끗한 세상을 만들려고 한다. 이해해주시라”고 부탁한 것으로 알려졌다. 염씨 처지에서 볼 때 구명을 기대하다가 가슴에 못 박는 이야기가 될 수 있었던 셈이다.

노 대통령은 이 무렵 공·사석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 “과거 정권들은 측근과 아들들의 비리로 도덕적 타격을 받고 무너졌다. 그런 일이 더 이상 되풀이되면 안 된다. 내 경우 아들이 나이가 어려 비리를 저지르지 못할지라도 측근들은 비리를 저지르지 못할 바 없다. 근본적인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검찰·국정원·경찰 등 권력기관의 ‘정상화’는 이에 따른 처방 1호였다. 권력 또는 수사기관을 청와대의 통제에서 해방시킴으로써 측근들을 권력기관의 감시 아래 가두자는 구상이었던 셈이다. 김영삼·김대중 정권 시절 권력기관의 핵심 요직에 대통령의 아들 또는 측근들의 입김이 미치고 그 결과 실세들의 비리 정보에 대한 동맥경화증이 발생한 예를 반면교사하겠다는 뜻으로도 읽혔다. 그는 1월18일 텔레비전토론에서 “(과거 정권에서) 정확한 정보가 과연 대통령에게까지 전달되었느냐에 의문이 있다”며 “경찰·국정원 등에서 수집한 보도되지 않은 정보, 꼭 필요한 권력 핵심 내부의 비리라든지 정보들이 차단돼버린 경우가 있었다고 본다”고 말했다.

이런 가운데 노 대통령은 지난 여름 계룡대 여름휴가에 안희정씨를 불러 함께 골프를 치면서 내년 총선에 출마하지 말고 청와대에 들어와 자신과 임기를 함께하자는 뜻을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안씨는 이 대목을 “거친 정치판에 자네마저 휩쓸리는 게 안쓰럽다”는 ‘애정어린’ 의미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나라종금 의혹 따위를 안고 있어 자신의 청와대 입성이 대통령에게 부담이 될 수 있는데도 그런 제안을 했기 때문이다.

대선 이전의 돈 문제… 자력갱생의 대가?

염동연씨가 병보석으로 서울대병원에 입원 중이던 무렵, 노 대통령이 한때 “면회를 가겠다”는 뜻을 전해왔다고 한다. 이런 까닭인지 염씨는 누군가를 원망하기보다는 “노무현 대통령 시대를 위해 숙명으로 받아들일 생각”이라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노 대통령 측근 비리가, 최도술씨가 받은 당선 축하금을 제외하면 대부분 대선 이전의 돈 문제였다는 점도 흥미롭다. 최소한 집권 이후 현직 대통령의 측근이란 위세를 이용해 부정한 돈을 끌어모은 사건은 아니라는 점에서, “권력기관을 독립시켜 측근들을 권력기관의 감시 아래 두겠다”는 노 대통령의 ‘원려’가 나름대로 먹힌 결과가 아니냐는 것이다. 김영삼·김대중 정권 시절의 측근·아들 비리는 집권 이후의 권력형 비리였기 때문에 파장이 걷잡기 어려웠다.

안희정씨는 검찰 출두 직전인 12월12일 지인들에게 보낸 이메일을 통해 불법자금 수수 행위를 인정하면서 나름의 ‘진흙탕 문화론’을 폈다. 그는 “현실 정치와 선거라는 진흙탕 싸움 속을 헤치고 나왔으니 어찌 내 바짓가랑이에도 진흙이 묻어 있지 않겠느냐. …그러나 까마귀 노는 곳에 백로야 가지 마라 하며 그냥 자신만 지키면 끝나는 일이냐. …그러나 내 바짓가랑이에 묻어 있는 진흙의 많고 적음을 가지고 자위하거나 합리화하지는 않겠다. 오히려 국민이 우리에게 기대했을 엄격한 도덕 기준을 생각하면 마음이 더욱 무겁고 가슴 아프다. …”

노 대통령 측근들의 바짓가랑이에 진흙이 적잖이 묻게 된 데는 과거 노무현 캠프의 독특한 ‘자력갱생 문화’도 한몫한 것으로 보인다.

노 대통령은 1988년 13대 국회 입문으로 정치를 시작한 이래 돈 문제에 관한 한 무능력자에 가까웠다. 다른 정치인들이 명문고·명문대학 출신의 이력을 토대로 후원 인맥을 구축한 반면에 독학으로 자수성가한 그는 기본적으로 훑어낼 ‘어장’이 좁았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노 대통령은 진작부터 “국회의원 못해먹겠다” “정치 그만두겠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는데, 가장 큰 이유는 “돈을 구하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측근들은 “돈을 우리가 구해서 댈 터이니 제발 정치를 계속 하시라”고 노 대통령을 ‘독려’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과정을 거쳐 살림살이 담당인 안희정씨는 1997년 무렵에 ‘노무현과 함께하는 사람들의 우리들 그룹’을 창설()했다. 생수 사업부문으로 장수천과 오아시스워터, 자동차보험 판매 부문, 법률 사업부문, 컴퓨터프로그램 사업부문 등 4개 분야에서 수익사업을 벌여 ‘미래의 꿈나무 노무현을 키우는 종자돈’을 만들자는 취지였다고 한다.

청와대 행정관을 거쳐 경기도 시흥시에서 국회의원 출마를 준비 중인 백원우씨는 이렇게 말했다. “제정구 의원실 비서관을 거쳐 노무현 캠프에 합류했는데 분위기가 달랐다. 보스가 돈을 만들어 나눠주는 게 아니라 캠프의 자금과 자기가 쓸 돈을 각자 알아서 조달하는 독특한 풍토 탓이었다. 운동권 단체에서 수익사업을 벌여 운동자금을 조달하는 문화를 연상케했다.”

대통령이 측근을 ‘동업자’라 부르는 까닭

노 대통령이 자신의 측근들을 가리켜 ‘동업자’라고 부르는 데는 이런 까닭이 있었다. 정치권의 전통적인 주군과 가신 관계는 보스가 돈을 구해 계보원 또는 가신들을 풀어먹이며 부리는 상하관계이다. 반면에 노무현 캠프의 그것은 측근 또는 참모들이 알아서 뛰어 돈을 만들어 대는 형태였기 때문에, 참모와 보스의 관계가 수평적일 수밖에 없었던 셈이다.

노 캠프의 측근들은 이런 풍토에서 자연스럽게 각자의 지인들을 상대로 후원 네트워크를 만들어갔으며, 그런 과정을 거쳐 일부 인사들은 손이 커지기도 한 것으로 보인다. 한 측근은 “2002년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 앞서 전국 지방 조직원 50여명을 규합해 단합대회를 하면서도 활동비를 1인당 50만원씩밖에 지급하지 못했다. 상대 진영들이 중앙 캠프에서 막강한 자금을 공급하는 것으로 알려지던 무렵이었다. 그러니 도리가 없지 않겠나. 경선캠프 조직특보 명함을 팔든지 어떻게 하든지 각자 ‘보급 투쟁’을 하는 것은 말리지 않겠다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다”고 밝혔다.

최근 검찰에 구속된 문병욱 썬앤문 그룹 회장은 당시 386 측근들의 갈증을 달래줄 후원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한 측근은 “우리 캠프도 때로는 기자들에게 술 접대를 해야 했다. 그런 때 문 회장이 운영하는 빅토리아호텔 나이트클럽으로 몰고 가 공짜술을 먹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든든한 밑천이었겠나”라고 말했다. 노 대통령의 후원 인맥에서는 강금원 창신섬유 회장과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이 양대 큰손으로 꼽혔으며, 문 회장은 그보다 등급이 떨어지는 ‘중간급’이었다고 한다.

어쨌든 이런 측면 때문에 노 대통령의 386 인사들은 최근의 측근 비리를 두고 “불법 정치자금의 고리를 끊기 위해 제물로 나선 격”이라며 기성 정치권의 불법 대선자금과는 ‘질’이 다르다고 주장한다. 대구 북을구 출마를 준비 중인 배기찬(전 청와대 정책수석실 행정관)씨는 안희정씨 등이 불법 대선자금에 연루된 배경을 두고 “지난해 2월 경선때 2억5천만원의 경선 기탁금 마련과 후보 지지율이 급락한 뒤 선거자금 마련을 위해 386들이 앵벌이식으로 뛰었는데 당시 노 후보 주변에는 386밖에 없었다”며 “그러다 보니 썬앤문에 걸려들었던 것”이라고 주장했다. 배씨는 “그러나 386이 걷은 자금은 과거 수천억·수백억 규모의 불법 대선자금에 비해 형편없이 적은 액수”라며 “이런 양적인 차이는 혁명적 변화”라고 주장했다. 다른 386 측근은 “20대 운동권 시절의 좌절을 딛고 노무현을 통해 참여와 개혁의 꿈을 실현하려다가 빚어진 일”이라며 “지금 문제가 되는 돈은 개인의 치부나 사리사욕과는 거리가 멀다”고 주장했다.

개인의 치부나 사리사욕이 아닐지라도…

안희정씨도 12월12일 검찰 출두에 앞서 주변 인사에게 “구시대의 마지막 기차의 마지막 칸이 되겠다”며 자신이 모든 걸 떠안고 가겠다는 뜻을 비친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의 주장처럼 노무현 측근들의 돈 문제는 기성 정치권의 그것에 비해 ‘질’과 ‘규모’에 차이가 있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전두환·노태우 대통령이 현직에서 직접 돈을 거둬들이던 시절 이래 불법 정치자금의 규모가 점차 줄어드는 시대적 흐름이 있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불법자금을 재단하는 국민들의 잣대가 갈수록 가혹해지는 측면도 생각해야 할 것 같다. 따라서 안희정씨를 비롯한 노무현 측근들의 희망처럼 자신들이 ‘시대의 막차’가 되어 모든 것을 떠안을 수 있을지 여부는 아직 불투명한 상태다.

박창식 기자 cspcsp@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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