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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대위가 유죄면 어떤 군인이 무죄죠?”

등록 2008-04-18 00:00 수정 2020-05-03 04:25

‘군악대장 스토킹 사건’ 보도 뒤 군 내부 파장… 1심의 ‘항명죄’ 판결은 뒤집힐 수 있을까

▣ 이순혁 기자 hyuk@hani.co.kr

“정말로 이런 정도 가지고 집행유예까지 내려진 거예요? 이런 기준이라면 대한민국 군인들 가운데 유죄 판결 안 받을 사람은 하나도 없겠는데….”

어렵사리 기자와 통화가 된 한 여군은 기가 막히다는 말부터 꺼냈다. 직속상관에게 항명했다는 이유로 강제 전역될 처지에 놓인 여군 군악대장에 대한 얘기였다. “나도 여군이지만 이런 일이 있는지도 몰랐어요. 기사를 보고서야 알게 됐는데, 주변에서 말들이 많더라고요. 나야 사안 자체를 구체적으로 모르니까 뭐라고 말하기 조심스러운데, 이런 정도를 가지고 항명이라며 강제 전역시킨다는 것은 너무 황당하네요.”

“당시엔 수긍했던 일도 ‘명령 불이행’으로”

부하 장교를 성적으로 스토킹한 남성 상관은 경고로 마무리한 반면 스토킹을 당해온 여군 대위에게는 항명죄를 물어 유죄 판결을 내린 사건(705호 줌인 여군 군악대장 스토킹 사건의 진실)이 군 내부에서 적지 않은 파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상당수 군 관계자들은 “소문으로만 돌던 일이 결국 터져나왔다”면서도 “2심 재판부에서 다시 다툴 사안인 만큼 좀더 지켜봐야 하지 않겠냐”는 조심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여군 군악대장의 혐의가 기소될 만한 사안이었는지 △1심 재판부의 양형이 합리적이었는지 등을 두고서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 나오고 있다. 항명했다는 내용들이 비교적 사소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지난 4월1일 박아무개(27·여) 대위에게 실형 6개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한 1심 재판부에서는 군검찰이 기소한 7개 혐의(죄명은 항명·상관 면전모욕·직권남용 3가지) 가운데 2개만을 유죄로 인정했다. 직속상관인 사단 본부근무대장 송아무개(37) 소령이 “군악대장실에서 업무를 보라”(지난해 9월27일), “사단 일일업무인 군악대 행진 예비사열에 참석하라”(〃 9월28일)고 명령한 것을 이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선, 두 명령 모두 군악대장에게는 ‘당연한’ 업무지시인데 항명 논란이 일어난 이유는 무엇일까? 박 대위를 도와온 친구 ㅂ씨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지난해 9월 중순께 박 대위에 대한 헌병대 조사가 시작되자 송 소령은 박 대위에게 ‘군악대 병사들 가운데 내부고발자가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박 대위로서는 제보자인 병사들과 함께 지내는 것은 서로에게 부적절하다고 생각해 이런 의견을 송 소령에게 밝혔고, 송 소령 또한 수긍했다. 그런데 송 소령이 말을 뒤집고 항명으로 몰고 있다.”

물론 군검찰과 송 소령은 “박 대위가 일방적으로 상관의 정당한 업무 지시를 따르지 않았다”며 이런 주장을 일축하고 있다. 양쪽의 팽팽한 공방 속에서 재판부는 제3자의 증언을 이유로 군검찰과 송 소령 쪽의 손을 들어줬다. 본부근무대 행정장교인 김아무개 중위가 법정에서 “박 대위가 항명한 것은 사실”이라고 진술한 것이다.

김 중위, 송 소령에게 유리하게 증언 바꿔

두 번째 항명 건에서도 김 중위의 증언은 결정적인 구실을 했다. 군검찰은 “‘군악대 행진 예비사열에 참석하라’는 정당한 지시를 박 대위가 따르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박 대위 쪽은 “송 소령은 단순히 사열에 참석하라고 지시한 것이 아니다. ‘사단 사령부에 올라가서 참모장께 설명도 하고 지휘를 하라’고 말하기에 ‘(당시는 헌병대 조사 중이어서) 내가 준비한 행사도 아니고 몸이 아파서 지휘는 힘들다’고 분명히 얘기했다”고 반박했다. 이번에도 재판부는 “(송 소령은 단순히) 참석하라는 지시를 내렸을 뿐 행진을 지휘하거나 참모장께 보고하라는 얘기는 하지 않았다”는 김 중위 증언을 근거로 유죄 판단을 내렸다.

여기까지만 놓고 보자면, 박 대위가 항명 혐의를 벗기는 어려워 보인다. 하지만 결정적인 증거인 김 중위의 증언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 증언 내용이 본인 작성한 진술서 내용과 어긋나기 때문이다. 김 중위는 지난해 10월2일 헌병대에 제출한 진술서에서 “사열이 있으니 군악대장이 (사단 사령부에) 올라가서 참모장님께 설명도 하고 지휘를 하라고 (송 소령이) 지시를 하셨다”고 밝혔다. 김 중위는 애초에는 박 대위 쪽 주장에 부합하는 진술을 한 것이다.

그렇다면 김 중위의 말과 글이 엇갈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김 중위는 재판에서 그 이유를 묻는 박 대위 변호인의 질문에 “내가 그런 진술서를 썼다면 진술서가 잘못된 것이다. 지금 하는 말이 맞다”고 답했다고 한다. 재판부는 이런 김 중위의 설명을 받아들여 박 대위 유죄의 근거로 삼았다. 하지만 검사나 수사관과 일문일답 형식으로 작성된 진술조서도 아닌, 본인 스스로 백지 위에 자필로 작성한 진술서에 왜 그런 내용을 써넣었는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다. 이는 또 ‘사건 발생 직후에 작성한 진술서와 5~6개월 뒤 재판에서 증언한 내용 가운데 과연 어느 쪽이 진실이겠냐’는 좀더 직설적인 질문으로도 이어진다.

박 대위 쪽에서는 이런 점에 비추어 김 중위 진술에 신빙성이 없다고 주장했지만,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또 송 소령과 김 중위는 직속상관-부하 관계일뿐더러, 이전에도 같은 대대에서 작전과장과 작전장교로 함께 근무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국방부 관계자도 “두 사람이 예전에 같은 부대에 근무했던 것은 사실”이라고 밝혔다. 물론 함께 근무했던 각별한 사이라는 사실이 곧바로 거짓 증언의 증거가 될 수는 없다. 결국 김 중위 진술의 신빙성에 대한 판단은 항소심에서 다시 다뤄질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이와 별개로, 이런 정도 혐의 내용이 중형을 선고받을 만한 사안이었느냐는 의문은 여전히 논쟁거리로 남는다. 1심 형량이 확정되면 박 대위는 강제 전역되기 때문이다. 군검찰 주장대로 박 대위가 며칠 동안 군악대장실 대신 부대 안 다른 사무실에서 근무했다고 하더라도 이게 강제 전역될 정도로 큰 잘못이냐는 것이다. 이에 대해 국방부 쪽에서는 “상관의 정당한 명령에 불복종하면 당연히 처벌을 받아야 한다”는 ‘정답’을 내놓았다. 하지만 직업군인을 강제 전역시킬 정도의 항명치고는 내용이 옹색한 것이 사실이다. 현역 군인조차 “이 기준대로라면 군인들 가운데 유죄 판결 안 받을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라고 평할 정도인 것이다.

강제 휴직된 박 대위 “기자와 얘기 못해”

숱한 논란 속에서 이제 공을 넘겨받은 2심 재판부는 어떤 결정을 내릴까? 일반론적인 얘기겠지만, 전망은 엇갈린다. 한 고참 군법무관은 “박 대위가 직속상관의 명령에 불복종했다는 사실관계는 명확한 만큼, 2심에서 결론이 뒤바뀔 가능성은 거의 없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하지만 군법무관 출신 한 변호사는 “1심에서는 소속 부대 간부가 재판에 직접 참여하기 때문에 부대의 입장이 재판에 반영될 여지가 있지만, 2심인 고등군사법원 재판부는 군법무관을 거친 군 판사들이 재판을 주재하기 때문에 1심과는 다른 결론을 종종 내놓곤 한다”며 “박 대위로서는 기대를 걸어볼 만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박 대위는 1심 유죄 판결에 따라 4월7일자로 보충대로 소속이 바뀌고 강제 휴직처리된 상태다. 사실상 아무런 보직 없이 재판을 받게 되며, 급여 또한 기본급의 50%만 지급받게 된다. 현재 처지와 상황에 대한 당사자의 의견을 들으려 했지만, 박 대위는 “군 규정상 상부 허락 없이 기자와 대화를 나눌 수 없다”며 접촉을 피했다. 교육 과정 중인 송 소령 또한 “(위로부터) 기자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지시를 받았다”며 전화를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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