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항씨가 털어놓는 ‘그 여자와 함께한 10년’… 남자아이에게 던진 ‘이유 있는 욕설’에 기뻐하고 염려했도다
▣ 김규항/ 어린이 잡지 발행인
(사진/ 곽윤섭 기자)
“김단. 먹고 자는 시간을 뺀 하루의 대부분을 그리기와 종이접기 따위로 보내는 내 딸이다. 김단이 태어나자 아내와 난 김단에게 결혼을 권유하지 않을 것을 약속했다. 갓난아이를 두고 좀 싱거운 짓이었고 얼마간 관념적이었지만 여자가 자존을 지키며 살기 힘든 세상에 또 하나의 여자를 내놓은 장본인들은 긴장했고 그렇게라도 미래를 대비하고 싶었다.”(‘딸 키우기’, 1998년 8월)
정의의 ‘조폭소녀’ 그들과 대결하다
나를 아는 사람들은 대개 김단의 이름도 기억한다. 그는 1998년에 쓴 ‘딸 키우기’라는 글에 처음 등장한 이래 여러 번 내 글에 등장했다. 한 사람이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은 그가 접촉하는 모든 대상에 반영되는 것이지만, 누구에게나 다른 모든 대상들을 가늠할 만한 기준 대상 같은 게 있다. 내 경우는 아이들, 특히 김단이다. ‘특히 김단’인 건 물론 그가 여성(이라는 소수자)이기 때문이다. 김단은 이제 초등학교 4학년, 우리 나이로 열한살이다.
“메신저 창에 ‘조폭소녀’가 접속을 해왔다. 김단이다. ‘이 녀석은 제 별명에 만족해하는군.’ 나는 혼자 조용히 웃었다. 몇달 전 김단이 제 동무들, 특히 남자 동무들 사이에서 ‘조폭소녀’라 불린다는 걸 알았다. 겉모습에서부터 하고 노는 짓까지 여느 여자아이들과 다를 게 없는 김단은 유독 ‘남자의 폭력’ 앞에선 자못 전사로 변한다고 했다. ‘잘 가고 있군.’ 나는 그때도 혼자 조용히 웃었다.”(‘딸 키우기 2’, 2003년 4월)
지난해 어느 날, 언제나처럼 아내와 식탁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아내가 뭔가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형, 단이가 욕을 좀 하나봐.” “욕?” “응, 병수 엄마가 그러는데 엄마들끼리 그런 이야기가 있대.” “김단이 여자라서 더 그렇게 말하는 거겠지.” “그 엄마들이 ‘여자애는 욕을 하면 안 된다’는 편견이 있는 건 사실이야. 그렇다고 하더라도 욕을 많이 하는 게 좋은 일은 아니잖아.” “그야 그렇지.”
그날 밤 나는 김단의 방문을 두드렸다. “단아, 아빠가 궁금한 게 있는데.” “뭔데, 아빠?” “김단이 욕을 많이 한다는 이야기가 있어서.” “누가 그래?” “그냥 들은 얘긴데, 욕을 좀 하긴 하지?” “응.” “어떤 욕인지 아빠한테 말해줄래?” “말하기 싫은데.” “아빠가 욕을 해야 할 때 못하는 건 바보라고 했잖아. 괜찮으니까 말해봐.” “음… 씨팔!” “씨팔, 그리고?” “좆같이.” “아빠가 하는 것 보고 배운 거니?” “영화 같은 데서도 나오잖아.” “그런 욕을 누구한테 하지?” “남자애들한테.” “여자애들한테는?” “한번도 한 적 없어.” “남자애들이 어쩔 때 하는데?” “여자애들 이유 없이 때리고 괴롭히고 그럴 때.” “자주 하니?” “아니, 몇번 한 적 없어.” “그래, 말해줘서 고맙구나. 나중에 또 이야기하자.”
서둘러 이야기를 마친 건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유 없이 사람을 괴롭히는 놈들에게 욕을 해주었다니 잘못은커녕 오히려 대견스럽기만 했다. 초등학교 남자아이들이라는 게 좀 보태서 말하면 앞뒤 없이 날뛰는 원숭이 새끼들과 다를 바 없는데(더 지난다고 반드시 나아지는 것도 아니지만) ‘씨바’나 ‘졸라’ 따위의 체제화한 욕으로 제압하기란 쉽지 않으리라. 아내 역시 “그 엄마들이 그런 욕을 들었으니 얼마나 놀랐겠어”하며 웃고 말았다.
“알겠어요, 아빠”에 코끝이 찡
그러나 그 일은 그렇게 끝나지 않았다. 몇달 전 어느 날 아내가 다시 말했다. “단이가 남자아이들에 대해 너무 반감을 갖는 것 같아.” “김단은 여자애들 괴롭히는 놈들한테 그런다잖아.” “그건 좋은데 남자애들한테는 전반적으로 좀 거칠게 행동하는 게 보여.” “거칠게 안 하면 안 되니까 그렇겠지.” “우리가 단이가 욕하는 걸 알고도 가만두었던 건 여자 남자를 떠나서 단이가 이유 없이 약한 사람을 괴롭히는 일과 싸웠기 때문이잖아.” “동감이야.” “그런데 내가 요즘 관찰해보니까 남자애들한테는 무작정 거칠게 대하는 경향이 있어.” “그래….” “단이네 반 홈피에 들어가봤는데 단이 게시물에 남자아이들이 뭐라고 해놓은 줄 알아?” “뭐라고?” “‘사람이나 패지 마라!’ ‘조폭소녀는 지구를 떠나라!’ 그런 식이야.” “재미있군.” “그런데 그걸 올린 게 여자애들을 이유 없이 괴롭히는 아이가 아닐 수도 있겠구나 싶었어.” “그래, 그건 좋은 게 아니지.”
말하자면 김단은 ‘분리주의’적 경향을 보인다는 얘기였다. 아내와 나는 김단에게 어릴 적부터 여성의식을 심어주고 주체적인 여성으로 키우는 데만 집중하느라 그런 과정에서 나타나는 또 다른 편향에 대해선 많이 생각하지 않았다는 걸 비로소 깨달았다. 간단히 끝날 문제가 아닐 수도 있었다. 김단은 나름대로 ‘체험’에 기반하여 그런 것일 테니 말이다. 그러나 이 문제를 잘 해결하면 김단의 의식이 한층 성숙해진다는 것도 분명했다. 나는 김단의 행동도 좀 살펴볼 겸 며칠 묵혀두었다가 김단과 대화했다.
“단이는 남자애들이 싫어?” “응, 조금.” “남자애들이 다 여자애들을 괴롭히는 건 아니잖아?” “그렇지는 않지만 바보 같은 짓 하는 건 거의 다 그래.” “아빠가 보기에도 남자애들이 좀 그렇긴 해.” “얼마나 짜증나는데.” “그래.” “아빠가 남자애들한테 지면 안 된다고 했잖아.” “아빠가 그랬지. 그런데 아빠가 남자애들을 전부 미워하라고 한 건 아니야.” “그런데 남자애들이 거의 다 그렇다니까.” “그래 아빠도 알아. 그런데 거의 다 그렇다는 게 전부가 그렇다는 건 아니야.” “그건 그래.” “김단이 그렇게 보여서 아빠가 좀 걱정이 돼.” “….” “김단, 진짜 강한 사람은 겉으로 거칠지 않다고 아빠가 그랬지?” “응.” “평소엔 거친 사람들은 꼭 필요할 땐 겁쟁이들이야. 아빠는 단이가 누구에게나 편안하고 부드럽지만 꼭 필요할 땐 용감했으면 좋겠어.” “아빠는?” “김단이 보기에는 어때?” “좀 그런 것 같아.” “솔직히 말하면 아빠도 그렇지 않아. 하지만 그렇게 되려고 노력을 하지. 단이도 조금만 노력하면 어때?” “알겠어요, 아빠.”
김단은 부러 존댓말로 대화를 마무리하고는 환하게 웃어 보였다. 코끝이 찡해졌다. 그와 함께한 10년의 시간들이 내 가슴속에서 환등기 소리를 내며 돌아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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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존경받는 진보적 인사가 정작 제 식구들, 특히 제 딸에게서 전혀 존경받지 못하는 걸 보고 놀란 적이 있다. ‘저렇게 훌륭한 아버지를 왜 존경하지 않는 걸까?’ 얼마가 지나서야 나는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흔히 짐작하듯 (그리고 그런 인사들의 가장 편리한 면죄부인) ‘세상에 헌신하느라 가족에게 소홀해서’가 아니었다. 그는 실은 매우 가부장적인 사람이었던 것이다.
딸은 단지 딸, 아들 하는 자식 중의 하나가 아니다. 딸은 한 남자가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가장 정교하게 알아낼 수 있는 (폭로하는), ‘삶의 시험지’이다. 한 남자가 ‘딸에게서 존경받는 인간’이 되려고 애쓴다면 그의 삶은 좀더 근사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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