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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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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언어는 혼돈인가

등록 2001-01-10 00:00 수정 2020-05-02 04:21

야웨의 절대적 권위에 따른 통일적 언어관… 자연의 이법을 존중하는 다양한 소리들

유대 겨레의 신화 가운데 언어와 관련해 또 한 가지 흥미로운 기록은 ‘바벨의 언어’ 이야기이다. “여호와께서 인생들의 쌓는 성과 대를 보시려고 강림하셨더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후로는 그 경영하는 일을 금지할 수 없으리로다.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그들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신고로 그들이 성 쌓기를 그쳤더라.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케 하였음이라.”( 11:5∼9)

이 대목은 메소포타미아 신화로부터 많은 영향을 입은 것으로 보이는 J문서에 나온다. 신이 인간의 언어를 다르게 만들었다는 모티브는,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자기록인 수메르 신화()에 이미 등장한다. 이른바 ‘바벨탑’이란 것도 오늘날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발굴되는 바빌로니아인들의 신전인 지구라트를 말하는 것이다.

바벨탑은 야웨의 권능을 드러내는 증거?

바벨의 언어 이야기는 아마도 야훼주의자들이 야훼의 권능의 절대성을 드러내기 위해 기록에 남겼을 것이다. 그러나 이 기록의 무의식에서는 오히려 인간의 위대함에 대한 찬양소리가 들려온다. 이 문서는 이른바 ‘전지적(全知的) 작가 시점’에서 기록되었다. 이야기의 기자는 야훼가 어떻게 판단하고 어떻게 행동했는지, 그리고 그 귀결이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 완전히 파악할 수 있는 위치에 서 있다.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如是我聞)는 식의, 유래에 관한 겸사조차 없다.

이 기록에 따르면, 야훼가 ‘인생들’이 바벨탑을 쌓는 것을 보고 일정한 위협을 느끼셨다고 판단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야훼 가라사대 “이후로는 그 경영하는 일을 금지할 수 없으리로다” 한 것이다. 전지전능한 야훼조차 금할 수 없는 일이 있을 것이라는 판단은 아무래도 인간의 자의적인 판단에 속할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야훼는 ‘인생들’이 하늘에 도전하는 바벨탑을 쌓을 수 있었던 까닭을 그들이 “같은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도대체 인간의 미천한 입에서 나오는 바람소리가 어떻게 절대자를 위협할 수 있을까. 우리는 여기서 인간의 언어로 절대자의 위대함을 논하면 할수록 더욱 깊이 신성모독에 빠져드는 역설을 본다.

바벨의 언어 이야기는, 이질적인 언어의 유래에 관한 매우 영감 풍부한 신화일 수는 있을지언정, 절대자 야훼의 권능을 드러내기 위한 삽화로는 적절하지 않다. 어찌하여 유일 절대자 야훼가 겨우 ‘인생들’이 통일된 언어를 사용한다는 사실에 위협을 느낀단 말인가. 그렇다면 야훼는 분명 영어공용어화 반대론자일 것이다. 세계 각 겨레가 영어를 공용어로 채택해 영어가 명실공히 만국공용어의 자리를 차지하고 나면 혀가 일치된 인생들이 또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를 테고, “이후로는 그 경영하는 일을 금지할 수 없을” 터이기 때문이다. 바벨 이야기는, 모든 신화란 결국 인간에 관한 이야기임을 다시 일깨워준다. J문서의 기자는 야훼주의자가 아니라 사실은 휴머니스트(인간중심주의자)이다.

노자가 말하는 하느님(여기서 하느님이란 말은 ‘인격신’이란 뜻이 아니라 ‘절대자’란 뜻으로 쓰였다)은 언어의 뒤안길에 숨어 있다. 인간의 언어를 혼란에 빠뜨리지 않더라도 무딘 인간의 언어로 다다를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노자의 하느님에게는 바벨의 언어가 필요하지 않다.

노자의 하느님은 풀이 무성하게 자란 성하(盛夏)의 녹음 한가운데서 이미 그 푸르름이 사그라들어 뿌리로 돌아감을 본다: “온갖 것들이 다투어 자라지만 나는 거기서 돌아감을 본다. 대저 온갖 것들이 쑥쑥 자라나지만 각자 자기 뿌리로 돌아갈 뿐이다.”(萬物竝作, 吾以觀復. 夫物芸芸, 各復歸其根. 16장) 그는 하늘을 찌르며 치솟는 마천루 바벨탑을 보면서도 인생들의 경영하는 일이 뿌리로 돌아감을 볼 것이다. “사물이 전성기를 맞이한 시점이 바로 쇠락해가는 때”(物壯則老. 30장)이기 때문이다.

야훼주의자의 하느님은 ‘유위(有爲)의 절대자’이다. 그는 유대 겨레의 전면에 나서서 인간의 행위를 제지하기도 하고 초자연적인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노자의 하느님은 ‘무위(無爲)의 절대자’이다. 그는 누구를 거스르며 작위하지 아니한다. 그는 절대자들이 흔히 지니고 있는 어떤 초자연적인 능력조차 지니고 있지 않다. 그가 지니고 있는 능력이 있다면, 자연의 질서를 가장 자연스럽게 흘러가도록 내버려두는 능력뿐이다.

를 통독해보면, 야훼는 처음엔 유대 겨레의 매사에 시시콜콜 나서는 유위의 절대자였으나, 이후로는 깊은 침묵에 빠진다. 그는 이제 유대 겨레 앞에 직접 나서는 대신 선지자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발언한다(이는 예수회 수사 출신의 종교학자 잭 마일스가 에서 편 주장이다). 구약 시대의 야훼는 유위의 절대자였으나, 신약 이후의 야훼는 무위의 절대자로 변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언어가 질서를 뜻한다는 인간중심적 도그마

유위의 절대자와 무위의 절대자가 근원적으로 다른 건 아니다. 인생들이 하는 짓을 절대자가 내려다보다가 정 못 참겠어서 내려와 인간들을 흩어놓았다는 설명이나, “사물이 장성하면 곧 쇠락해진다”는 설명이 크게 다른 건 아니다. 노자는 장성강대한 바벨탑을 누가 무너뜨리는지는 “말할 수 없는 영역”의 안에 가둬두고 세상의 모든 일은 “스스로 그러하다”고 말하고 있는 반면에, 야훼주의자들은 우주의 모든 일을 주재하는 야훼가 멋대로 장성한 사물을 쇠락시킨다고 극화하여 말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사실 인생들에게는 야훼주의자의 설명이 훨씬 알아듣기 쉽다. 그건 일종의 ‘산타클로스 효과’이다. 가령 아이들에게 왜 울면 안 되는지를 설명해서 울음을 그치게 하기란 지극히 어려운 일에 속한다. 그러나 산타클로스 보살마하살의 공덕을 빌리면 금세 울음을 뚝 그치게 할 수 있다.

우리의 관심사인 언어에 관한 사고로 돌아가자. 에 나오는 ‘바벨’이란 지명은 흔히 ‘혼돈’을 뜻한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지명은 ‘신의 문’이라는 뜻의 아카드어 ‘밥일리’에서 왔다. 유대 겨레는 바빌론과 수메르 신화를 자신들의 신화 안으로 차용하면서 ‘바벨’이라는 지명이 히브리어 ‘바랄’(뒤섞다·혼란시키다)에서 온 것이라 강변하며 ‘혼돈’을 뜻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바벨을 ‘혼돈’이라 해석한 것은 의도적인 오독에 해당한다. 그 오독의 밑바탕에는 “언어란 질서를 의미하며, 언어가 다양해진다는 것은 혼돈을 의미한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인간의 언어가 자연에 어떤 질서를 부여할 수 있다는 믿음은 인류사에서 매우 뿌리깊은 인간중심주의의 도그마이다.

장자(莊子)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글 가운데 한편인 들머리에서 초나라의 사상가 남곽자기(南郭子기)의 입을 빌려 사람의 피리소리(人뢰), 땅의 피리소리(地뢰), 하늘의 피리소리(天뢰)에 대해 말하고 있다. 땅의 피리소리란 대지 위로 거센 바람이 불어갈 때 들판의 웅덩이와 계곡과 나무의 옹이 따위의 온갖 구멍이 피리처럼 울리며 내는 소리를 말한다. “산들바람에는 작은 소리로 웅웅거리고, 세찬 바람에는 거센 소리로 우렁차게 울린다. 그러다 사나운 바람이 그치면 모든 구멍이 텅 빈 듯 일시에 소리를 그친다.” 남곽자기의 말을 들은 그의 제자 안성자유는 “땅의 피리소리란 대지의 온갖 구멍이 내는 소리이고, 사람의 피리소리란 대나무 젓대가 내는 소리로군요”라고 답한다. 명말청초의 학자 왕부지는 인간의 언어나 음성이 모두 “대나무 젓대가 내는 소리의 부류에 들어간다”()고 말한다. 사람의 언어가 아무리 다양하고 가지각색이라 해도 그것은 모두 사람의 목구멍을 피리구멍 삼아 내는 인뢰(人뢰)에 속한다. 남곽자기는 다시 이렇게 말한다: “대저 바람이 천만 가지 구멍에 불어와 구멍마다 제각기 다른 소리를 내다 저마다 스스로 소리를 멈추게 한다. 그게 모두 자기가 내는 소리이겠는가? 바람을 일으킨 자는 누구이겠는가?”(夫吹萬不同, 而使其自已也. 咸其自取, 怒者其誰邪? 3) 그게 바로 ‘하늘의 피리소리’다.

사람의 혀놀림을 함부로 통일시키려는 억지

사람의 피리소리(언어)를 하늘의 피리소리와 땅의 피리소리에 견주다보면 인간 언어의 다양성에서 혼돈을 느낄 겨를이 사라진다. 제아무리 인간이 저마다 목청껏 자기 논리를 편다 해도 그 소리들은 휘잉 소리를 내며 도도하게 불어가는 솔바람소리에 섞여 원융한 조화 속으로 흘러간다. 억지로 사람들의 혀놀림을 통일시킬 필요도 없으며, 억지로 그것을 흩어놓을 필요도 없다. 이게 바로 노장사상의 언어관이다.

그렇다면 사람의 피리소리로 하늘의 피리소리를 표현하는 길은 없는 걸까? 노자 또한 사람의 피리소리(언어)에 의존해 을 설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노자가 말한 길 또한 ‘늘 그러한 길’은 아니지 않은가.

한겨레 저널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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