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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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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물지 않는 내전의 상처

등록 2000-10-25 00:00 수정 2020-05-02 04:21

‘인종청소’의 현장 보스니아, 아직도 증오는 남아… 서구의 다민족사회 건설실험 성공할까

“93년에 고향 마을인 스레브레니차를 떠났으니, 7년째 난민생활을 해온 셈이다. 문제는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게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것이다. 이미 우리 마을은 세르비아인들이 집이며 밭을 다 차지한 상태다. 지금 와서 그들을 어떻게 몰아낼 수가 있겠는가.”(스브레냐 난민캠프에서 만난 50대 보스니아 회교도)

“사랑에 국경이 없다는 말은 이곳 보스니아에선 통하기 어렵다. 많은 젊은이들이 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종족간의 차이를 뛰어넘는 열정으로 결혼했지만, 지금은 마음고생들을 하며 살고 있다. 주변의 따가운 눈길 때문이다.”(내전이 터지기 2년 전인 90년, 세르비아 여인과 열애 끝에 결혼한 크로아티아인 상인의 푸념)

“아무리 돈도 좋지만, 세르비아 사람들이 나를 보면 시비를 걸 게 뻔하다. 잘못하면 맞아죽는데 거길 왜 가나.”(사라예보에서 세르비아 지역인 팔레에 가려고 하룻동안 택시를 전세내려 했을 때 손을 내젓던 보스니아 회교도 택시기사)

“나는 희랍정교를 믿는 세르비아인이지만, 내전 때 라도반 카라드지치의 세르비아세력에 맞서 싸웠다. 내 나라 보스니아를 지키기 위해 많은 세르비아인들이 회교도, 크로아티아인들과 함께 싸웠다. 국제전범으로 기소된 카라드지치는 밀로셰비치의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고 본다.”(사라예보에서 컴퓨터 관련사업을 하는 미르사드 옐리치)

“우리 지식인들이 문제다. 말로는 조화로운 다민족사회의 건설을 말하지만,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구체적인 어떤 사안을 높고 토론을 벌일 때면 어느 순간에 국가보다 종족이 앞선다.”(세르비아인인 미르코 페야노비치 사라예보대 정치학 교수)

91년 집단학살의 악몽

3년 내전에 30만명 희생, 조직적 강간범죄 등 전쟁이 인류문명을 얼마나 뒷걸음치게 만드는가를 뚜렷이 보여주는 곳이 바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다. 이곳 수도 사라예보는 지난 84년 올림픽을 치렀던 도시다. 그러나 이곳을 처음 찾는 방문객들은 “여기가 사라예보 맞아?”라는 의문을 품게 된다. 사라예보공항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간선도로 주변은 내전의 포화를 맞아 곳곳이 보기 흉한 모습이다. 16년 전 올림픽아파트로 지었다는 고층아파트들도 일부는 벽이 허물어지고 천정이 내려앉 있다. 신통한 것은 그런 아파트 건물에도 입주자들이 비닐을 엉성하게 두른 채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내전이 그친 지 5년이 지났건만, 그곳말고는 달리 오갈 데 없는 사라예보 시민들의 서글픈 현주소다.

흔히 보스니아내전으로 불리는 종족간의 분쟁은 80년대 말 90년대 초 동베를린장벽 붕괴와 소연방 해체와 맞물려 유고연방이 분해되는 과정에서 일어난 참변이었다. 슬로보단 밀로셰비치가 89년 세르비아의 실권을 잡은 배경에는 ‘위대한 세르비아’ 건설을 깃발로 내걸어 세르비아민족주의를 자극해 대중적 인기를 얻음으로써 가능했다는 게 정설이다. 이는 거꾸로 유고연방 내의 다른 공화국들로부터 경계심을 불러일으켰고, 91년 슬로베니아가 평화적으로, 크로아티아가 전쟁을 거쳐 유고에서 떨어져 나갔다.

그러나 90년대 전반기의 보스니아는 90년대 후반기의 코소보와 마찬가지로 벨그라드 정권으로부터 독립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혹독한 희생을 치러야 했다. 내전의 시작은 91년 10월 이곳 보스니아 회교도들과 크로아티아인들이 중심이 돼 유고연방에서 탈퇴를 선언하고 92년 2월 국민투표에서 이를 확정하면서 벌어졌다. 밀로셰비치의 세르비아민족주의와 이곳 보스니아 세르비아인들의 정서가 맞아떨어졌고, 밀로셰비치는 대포와 무기를 보내 지역 세르비아인들의 무장을 강화했다.

남한땅의 절반 크기로 인구는 400만명 남짓인 이곳 보스니아에서의 내전은 20세기 인류사의 잔인하고 수치스런 전쟁으로 기록된다. 인구의 40%가 피난을 떠나야 했고, 또한 40%의 집들이 불타거나 파괴됐다. 30만명쯤의 시민들이 내전으로 죽었다지만 정확한 통계는 없다. 스레브레니차 지역을 비롯, 내전 희생자 가운데 상당수는 인종청소 차원에서 집단학살을 당했다. 많은 부녀자들, 특히 세르비아인들의 계획적인 성폭행 희생자가 돼 피눈물을 흘려야 했던 곳이 보스니아다. 이 때문에 세르비아인들의 지도자로 내전을 이끌었던 라도반 카라드지치는 헤이그 국제전범재판소에서 밀로셰비치와 더불어 전쟁범죄자로 수배상태다. 4년 가까운 내전 속에 숱한 희생자를 낳은 보스니아내전은 95년 11월 데이튼평화협정으로 끝을 맺었고, 곧이어 유엔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에 따라 나토군이 주축이 된 평화유지군(처음엔 6만 병력의 IFOR, 지금은 1만9천 병력의 SFOR)을 따라 법질서 강화를 위한 유엔 현지기구인 ‘UNMIBH’를 비롯한 국제기구들이 오랜 전란으로 만신창이가 된 이곳으로 들어왔다.

난민 1만5천명 “귀향이 무서워”

보스니아 국무위원 가운데는 다른 나라에는 드문 난민장관이 있다. 그만큼 난민이 심각한 국가적 문제라는 얘기다. 사라예보에 있는 집무실에서 만난 술레이만 가리브 장관은 내전으로 정든 마을을 떠난 많은 난민들이 평화협정이 맺어진 지 5년이 다 돼가건만 아직도 고향땅을 밟지 못하고 지역 내 난민(이른바 IDPs)으로 시름겨운 나날을 보내는 상황을 걱정한다. 그는 “실은 나 자신도 난민 출신”이라고 밝혔다. 10월 현재 미귀환자 숫자는 1만5천명가량. 사라예보 주재 유엔난민고등판무관사무소(UNHCR)의 한 관계자는 “지난 1년 반 사이에 8만명이 살던 마을로 돌아갔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귀환을 망설이는 게 사실”이라고 현지사정을 전한다. 이 가운데는 코소보전쟁을 피해 보스니아로 옮겨온 일부 난민숫자도 포함돼 있다. 한때 6만명이 넘는 코소보난민이 이곳에 몰려왔지만, 상당수는 다시 코소보로 돌아갔다. 그러나 특히 보스니아 회교도들이 스르프스카공화국 안에 있는 고향에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 사라예보에서 50km 북쪽 마을 스브레냐에 자리한 난민캠프에는 200여명의 난민들이 수용돼 있다. 이들 난민들의 한숨섞인 푸념에 따르면, 세르비아인들이 수적으로 우세한 마을로 돌아가봐야 기다리는 것은 그들의 따가운 눈총이고, 많은 경우 이미 그들의 집을 세르비아인들이 차지한 채 그들의 밭을 무단경작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다 할 대안이 없는 앞날에 대한 불안과 좌절감 탓일까, 일부 난민들은 외래 방문객인 필자에게 심하다 싶을 정도로 거친 행동을 보였다.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약간의 설명이 필요할 듯하다. 흔히 ‘보스니아’로 불리는 이 나라의 공식이름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다. 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다시 두개의 공화국으로 나뉘어 각각의 대통령과 총리, 그리고 의회를 두고 있다. 보스니안 회교도와 크로아티안들이 합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연방’과 세르비아인들의 ‘스르프스카공화국’이 그러하다. 이 두 공화국 연합이 우리가 흔히 부르는 보스니아(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도 명칭의 혼란을 막기 위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국가 차원의 BH’, 이에 속한 두 공화국의 하나인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연방은 그저 ‘연방’으로 부른다. 보스니안 회교도와 크로아티안들의 연방은 두 사람의 대통령을 두고 있고, 세르비아인들의 스르프스카공화국도 한명의 대통령, 그래서 모두 합쳐 3명의 대통령이 있다. 이들 세명의 대통령은 8개월마다 한번씩 돌아가며 의장직을 맡아 ‘국가차원의 BH’ 대통령직을 수행한다. 4년이 임기이므로 두 번씩 대표 대통령직을 맡는 셈이다. 지금까지 BH 대통령은 회교도쪽의 알리야 이제테고비치였으나, 10월 중순 건강을 이유로 물러났다. 그는 1995년 세르비아의 밀로셰비치, 크로아티아의 프라뇨 투지만(1999년 사망)과 더불어 데이튼협정에 사인한 당사자다.

95년 말 클린턴 행정부가 중재자로 나서서 맺어진 데이튼평화협정에 따라 내전을 멈추긴 했지만, 그동안 깊어진 갈등의 골을 메우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려야 할 것으로 이곳 사람들은 내다본다. 사라예보대 학장인 바히드 클랴이치 교수(정치학)의 표현대로 “데이튼협정이 전쟁보다야 낫지만, 진정한 평화와는 아직 거리가 있다”는 것이다. 최근 보스니아 북동쪽 소도시 브르코에서 수백명의 세르비아계 학생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무슬림 주민들에게 돌을 던지며 난동을 일으킨 사건은 보스니아의 긴장이 휴화산마냥 잠복돼 있음을 보여준다.

보스니아 현지를 취재하면서 필자가 겪은 분단의 작은 체험담. ‘국가차원의 BH’ 수도이자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연방의 수도인 사라예보에서 스르프스카공화국의 주요도시인 팔예로 가려면, 사라예보 외곽인 도브리냐로 가서 차를 타야 한다. 도브리냐는 말하자면 두 공화국을 가르는 경계선에 위치한 마을이다. 보스니아 회교도 택시기사는 필자를 그곳에 내려놓고 황급히 떠났다. 세르비아인들과 마주쳐서 좋을 일이 없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그런데 버스정류장에서 사라예보 시내로 전화를 하려고 공중전화에 카드를 넣으니 작동이 안 됐다. 그 전화는 오로지 스르프스카공화국으로만 통하는 전화였다.

1국2체제는 실질적 분단

또다른 분단의 목격담 하나. 필자는 크로아티아에서 야간버스를 타고 보스니아 국경을 넘었는데, 세르비아인들이 지배하는 스르프스카공화국 국경검문소에서는 유고 국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이들은 아직도 심정적으로 밀로셰비치가 90년대 내내 정치적 구호로 내걸었던 ‘대(great)세르비아’의 향수를 지닌 채 ‘국가 차원의 BH’ 국기 사용을 거부하고 있다. 보스니아에서 유고연방의 작은 파트너인 몬테네그로로 넘어갈 때에도 마찬가지로 그곳 스르프스카공화국 경찰의 검문을 받았는데, 그곳에도 유고연방의 3색 국기가 휘날리고 있었다. ‘국가 차원의 BH’ 의회가 통일된 국기를 제정했음에도 세르비아인들은 여전히 그 사용을 거부하는 상황이다. 데이튼평화협정으로 포화는 멎었지만, 아직도 많은 부분에서 갈등과 증오가 도사리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사정이 이러니, ‘연방’쪽에서 범죄를 저지르고 스르프스카공화국으로 도망가면 잡을 길이 막연해진다. 우리의 대법원장격인 카심 베지치 최고법원장은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법률적 공조가 잘 먹히지 않는 게 1국2체제의 연합이 지니는 문제점”이라고 지적한다. 그는 “시간이 흐르면서 내전의 상처가 아물 무렵이면 이 문제가 해결될지…”라며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내전은 이 지역 인구지도를 바꾸었다. 91년 인구비율은 세르비아인 31%, 보스니아 무슬림 44%, 크로아티아인 17%였다. 그러나 미 국무부 자료는 세르비아인들이 40%, 무슬림이 38%, 크로아티아인이 22%로 바뀌었다(98년 통계). 내전이 벌어지기 전 무슬림이 다수였던 보스니아 동부지역은 지금 세르비아인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밀로셰비치의 무력지원을 받은 라도반 카라드지치의 인종청소에 많은 무슬림들이 죽임을 당하거나 고달픈 난민 또는 이주민으로 고향마을을 떠났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한 통계로는 회교도 사망자가 20만명, 해외 이주 회교도가 20만명으로 전쟁 전 회교도 인구의 5분의 1이 줄어들었다. 그 자신이 회교도인 술레이만 가리브 난민장관은 내전 전인 1991년과 지금의 바뀐 인구지도를 번갈아 가리키며 “저렇게 바뀌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 속에 지냈을까를 생각하면 잠이 안 온다”고 말한다.

총선으로 극단세력 걸러질까

돌이켜보면, 보스니아는 다른 발칸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역사 이래 숱한 고난을 치러왔다. 로마제국의 한부분이었다가, 세르비아왕국과 헝가리왕국의 지배를 잇따라 받았다. 1200년께 선 보스니아왕국은 260년쯤 독립을 누리다가 오토만 터키에 정복당했다. 400년에 이르는 오토만 터키의 지배는 이곳의 많은 기독교인들을 회교도로 개종시켰다. 1878년 통치권은 다시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으로 넘어갔다. 1차대전이 일어난 배경에는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한 세르비아 민족주의자가 제국의 황태자를 죽인 사건이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얘기다. 이 지역이 세계의 화약고란 악명을 얻은 것은 이 무렵부터다.

보스니아는 지금 11월11일에 있을 총선으로 분주한 모습이다. 필자가 머물던 시점에선 아직 본격 선거유세가 벌어지지는 않았지만, 각 정당들은 250만명쯤으로 추산되는 유권자들을 상대로 한 득표전략을 한창 준비하는 모습이었다. 놀랍게도 보스니아엔 무랴 93개의 정당이 있다. ‘연방’쪽의 주요정당은 민주행동당(SDA)과 사회민주당(SDP)이다. 현재 제1당인인 SDA는 보스니아 회교도들이 주축인 반면, SDP는 무슬림과 크로아티아, 그리고 일부 세르비아인들이 참여한 범국민정당을 깃발로 내걸고 있다. 그런 까닭에 현역의원이자 사라예보대 교수(정치학)를 겸임하고 있는 세아드 아드비치 SDP 부총재는 “갈수록 유권자들의 우리 당에 대한 호감도가 높아간다”며 총선에서의 제1당을 자신했다. 한편 세르비아쪽 스르프스카공화국의 주요정당은 세르비아민주당(SDS)과 세르비아사회민주당(SNSD)인데, 같은 세르비아민족주의 흐름 속에서도 SDS가 훨씬 과격하다. 현재 전범으로 수배중인 라도반 카라드지치가 지난 90년 창당한 당이 바로 SDS다. SDS의 근거지인 스르프스카공화국의 팔예에서 만난 SNSD 팔예지구당위원장이자 현역의원인 마리코비치 페타르는 벨그라드의 정권교체와 더불어 “세르비아 유권자들의 투표성향이 무조건 극우로 가던 지난날의 행태에서 바뀔 것”이라는 기대감을 보였다.

부패로 생긴 재정적자, 국제사회가 해결?

보스니아의 총선을 관리하는 국제기구가 유럽안보협력기구(OSCE)다. 보스니아 현지 OSCE 책임자인 로버트 베리 대사는 이 지역 정치인들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인물. 그는 인터뷰에서 “행동강령이나 실제 정책이 95년 데이튼평화협정 정신에 어긋난다고 판단할 경우 선거 참여를 금지시키는 게 나에게 위임된 권한”이라고 못박았다. 그렇기에 특히 극단적인 세르비아정당들은 지금껏 총선 참여를 금지당해왔다. “선거를 가능한 한 자주 치름으로써 그들 극단세력들을 걸러낼 생각”이라고 베리 대사는 밝힌다. 실제로 이번 총선으로 당선될 의원들이 ‘언제까지’라고 임기가 보장된 것도 아니다.

오늘의 보스니아가 안고 있는 골칫거리 가운데 하나가 고질적인 부패문제다. 지난 8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보고된 한 자료에 따르면, 적어도 해마다 5억달러의 세금원이 정부 고위관리들을 포함한 공무원들의 부패 때문에 새나간다는 지적이 있을 정도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6·25를 겪은 50년대의 한국처럼 자동차공장은 물론 이렇다 할 번듯한 제조업체가 없다. 많은 것들이 수입에 의존한다. 이들 수입품에 대한 관세만 제대로 걷어도 재정적자의 상당폭을 메울 수 있으리라는 지적이다. 그러나 보스니아는 밀수 천국이다. 세무공무원들이 수입업자와 결탁, 적당한 선에서 눈가림하는 일이 비일비재다. 특히 담배밀수가 심각한 것으로 알려진다. 필자는 이곳에서 독일제 담배인 다비도프를 한갑에 2마르크를 주고 샀다. 1달러가 채 안 되는 값이다. 정상적인 수입품이라면 이렇게 낮은 가격을 매길 수 없다. 국제통화기금(IMF)은 담배밀수 하나로 2억3천만달러의 세금원이 사라진 것으로 분석한다. 한마디로 만성적이고 구조적인 부패다.

조심스럽게 부는 변화의 바람

이 나라 재정적자의 상당폭은 따라서 동유럽민주화지원기금(SEED)이나 국제통화기금(IMF), 세계은행, 그리고 미국의 USAID 등이 나서서 해결해주는 상태다. 지난 95년 데이튼평화협정 이래 지금껏 5년 동안 미국과 유럽연합(EU)은 보스니아 재건을 위해 40억달러를 지원한 것으로 집계된다. 이 가운데 8억원이 SEED 기금이다. 클린턴 행정부는 미국의회에 2001년도 지원분으로 1억달러를 요청해놓은 상태다. 부패한 관리들의 공금유용을 일일이 감시하기란 기술적으로 어려운 노릇이다. 그래서 미국의회의 일각에서는 “보스니아의 부패문제가 개선되지 않는 한 재정지원을 보류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밑빠진 독에 물 붓기란 지적이다. 그러나 현지의 얘기를 들어보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관리들의 시각은 조금 다르다. “말이 40억달러이지, 현금보다는 물자 위주라 40억원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지금까지 원조액은 3억달러로 본다”는 얘기다. 한 고위관리는 “일부 관리들의 부패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만, 국제원조기관들의 구조적 부패, 이를테면 납품업자로부터 뇌물 챙기기, 액수 부풀리기 등의 문제도 아울러 있음을 지적하고 싶다”고 말한다.

보스니아는 동유럽에서도 가난한 나라에 속한다. 1인당 구매력이 1770달러(1999년)에 지나지 않는다. 같은해 한국의 1인당 구매력이 1만3300달러이니, 어느 정도 사정을 짐작할 수 있다. 교사, 경찰 등 하급공무원들의 월급이 300∼500도이치마르크(150∼250달러)에 지나지 않기에 부패가 따를 수밖에 없다는 지적도 있다. 고용창출도 미미해, 대학을 나오고도 일자리가 마땅치 않다. 실업률이 35∼40%에 이른다(1999년). 알바니아, 터키 사람들이 그러했듯 그동안의 내전과 가난에 절망한 탓에 많은 보스니아 사람들이 서유럽으로 옮겨갔다. 미 중앙정보국(CIA)쪽 자료로는 1천명당 26명의 보스니아인들이 해외로 옮겨가는 추세다. 실제로 이곳의 많은 사람들은 형제자매들이 보내주는 해외송금으로 부족한 생활비를 충당하고 있다. 이곳 국민경제는 모든 면에서 해외의존도가 높다. 코소보와 마찬가지로 필자가 보스니아에 머무르는 동안 모든 경비를 독일 마르크화로 지불할 수 있었다.

내전의 상처를 치유하고 조화로운 다민족사회를 건설하려는 국제사회의 노력은 경제적 지원을 중심으로 법질서 유지와 사법체계 정비(UNMIBH), 선거 등을 통한 민주화제도 정착(OSCE), 난민 처우개선(UNHCR), 데이튼평화조약 이행감시(OHR), 평화유지활동(SFOR) 등 다각도로 이뤄지고 있다. 한 가지 문제는 지금까지 국제사회의 재정지원이 주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연방’에만 치중됐고, 세르비아계 주민들이 다수인 스르프스카공화국은 찬밥신세였다는 점이다. 밀로셰비치의 영향력 아래 있었던 탓에 스르프스카공화국 사람들은 데이튼평화협정이 “세르비아의 이해와 충돌하는 조약”으로 마땅찮게 여겨왔고,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재정지원도 받지 못해왔다. 그런 스르프스카에도 변화의 바람이 일고 있다. 친서방 경향을 보여온 도디크 공화국 총리가 이끄는 온건 SNSD정당이 11월11일의 스르프스카지역 총선에서 SDS를 비롯한 친밀로셰비치 강경파들을 누르고 승리할 가능성이 점쳐진다. 세르비아인으로 사라예보대 정치학교수인 미르코 페야노비치는 “내전의 갈등이 조금씩 봉합되면서 보스니아 세르비아계 사이에도 국제적 원조를 통한 경제발전의 중요성을 염두에 두기 시작했다”고 풀이한다. 밀로셰비치의 몰락, 코슈투니차 정권의 등장도 보스니아 세르비아인들의 정치의식 변화에 주요한 변수로 작용한다는 분석이다. 경제원조라는 당근으로 보스니아의 평화를 담보할 수 있을지, 무엇보다 서구사회의 보스니아 다민족사회 건설 실험이 성공할 것인지 두고볼 일이다.

사라예보=글·사진 김재명/ 분쟁지역 전문기자kimsphoto@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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