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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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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없는 아이’를 지켜달라!

등록 2000-12-05 00:00 수정 2020-05-02 04:21

제도에 절망하고 편견에 상처입고… 아이 키우려는 미혼모는 많으나 사회적 지원대책은 미흡

상반기 입양아 중 미혼모가 낳은 아기는 국내입양의 94%, 해외입양의 79%를 차지한다. 이런 비율은 90년대 중반 이후 매년 비슷한 수준으로 유지돼 오고 있다. 버려지는 아이들의 대부분이 미혼모 출산 아동임을 증명하는 통계다.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매년 5천명 이상의 미혼모가 아기를 낳고, 버림받은 아동의 약 60% 정도가 미혼모가 낳은 아이일 것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아이들이 버려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미혼모에 대한 부정적인 사회인식을 바꾸고 미혼모가 스스로 아이를 키울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입양이 버려진 아이들에게 가정을 돌려주는 2차 방어선이라면, 양육 미혼모를 지원하는 일은 가족 붕괴를 막는 1차 방어선이기 때문이다.

출산 뒤 주거시설 턱없이 부족

“TV에서, 거리에서 아기를 볼 때마다 가슴이 너무 아픕니다. 다시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내 아기를 데리고 어디 먼곳으로 떠나 살고 싶은 심정입니다.”

“직장인이고 아이를 가졌습니다. 출생신고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혼자 아이를 키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방법을 좀 가르쳐주세요. 아이를 포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제발 도와주세요.”

“지금은 만 18살인데 아기를 낳고 나면 19살이 돼요. 그러면 부모님 동의가 없어도 되는 건가요?”

한 미혼모 쉼터의 인터넷 게시판에 올라온 절절한 사연들이다. 이처럼 아이를 키우고 싶은하는 미혼모들은 많지만 사회적 지원 시스템은 미비하다. 미혼모가 의료서비스와 숙식을 제공받으며 아기를 낳기 위해 머물 수 있는 미혼모 쉼터가 전국 여덟곳에 불과하고, 머무를 수 있는 기간도 최장 1년이다. 출산 몇 개월 전 입소한 미혼모는 대부분 출산 뒤 몇달이 되지 않아 퇴소해야 한다. 쉼터에서 나온 뒤에도 모자 보호시설에서 주거를 제공받고, 생활비를 지원받을 수 있지만 그나마 정원이 넘쳐 서울의 경우 짧게는 1년에서 2년까지 기다려야 들어갈 수 있는 형편이다.

하지만 양육을 원하는 미혼모에게 이 시기는 가장 결정적인 때다. 대부분 미혼모들은 출산 전 아이 아버지와 헤어지고, 출산과 함께 가족과도 절연하게 된다. 게다가 출산 뒤에는 아이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당장 일터로 나서야 하지만 마땅한 일자리도 없고, 아이를 맡길 여유조차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서 자활능력이 없는 미혼모들에게 최소한의 생계를 보장해주고 직업교육을 시켜줄 기관이 필요하다. 자립을 준비하는 미혼모들이 모여사는 ‘미혼모 그룹홈’이 대표적인 예다.

서울 성북구의 삼선시장을 지나 가파른 비탈길을 한참 올라가면 평화모자복지회에서 운영하는 ‘정모임집’이 나온다. 올해로 12년째 운영되고 있는 미혼모 그룹홈이다. 오래된 2층 건물의 한층을 빌린 30여평의 넉넉지 못한 공간에는 다섯명의 미혼모와 아기들이 모여살고 있다. 방 안에 빨랫줄을 걸어 놓고 기저귀를 말려야 할 만큼 좁은 공간이지만 아이를 키우기로 결심한 미혼모들에게는 더없이 소중한 공간이다. 하지만 이곳도 처음 몇년 동안은 동네 주민들의 반대에 부딪혀 번번이 1년을 못 채우고 이사를 다녀야 했다. 가는 동네마다 “이 동네가 어떤 동네인데 미혼모 따위가 몰려오느냐!”는 매몰찬 말을 들어야 했다. 술만 취하면 ‘정모임집’의 문을 차며 고래고래 고함을 치는 동네 남자들도 적지 않았다.

불평등한 호주제가 문제 키운다

이런 편견에도 불구하고 “아기를 엄마 품에”라는 목표를 내건 평화모자복지회의 정모임집은 10년 넘게 이어져 오고 있다. 정모임집에서 주거만을 제공하는 것은 아니다. 미혼모와 아기의 생계지원은 물론 직업교육까지 책임진다. 미혼모들의 경제활동을 위해 어린이집 운영은 필수적. 엄마들이 직업 학원으로, 직장으로 생계를 위해 나가 있는 동안 아이들은 ‘개구장이 어린이집’에서 보살핀다. 또한 교육 프로그램과 지속적인 상담을 통해 잃어버린 자긍심을 되찾고, 앞날을 계획하도록 도와준다. 정모임집을 나간 뒤에도 지원은 이어진다. 형편에 따라 일정액의 주거비 무이자 대출과 어린이집 교육비 감면 혜택을 주는 것이다.

지난 12년 동안 평화모자복지회의 정모임집을 통해 가정을 꾸리거나 성공적으로 자립한 미혼모는 100여명에 이른다. 하지만 민간 복지 시스템이라 정부의 지원은 전무한 상태. 정부의 지원을 받으려면 법인을 설립하고 미혼모 1인당 13평에 이르는 공간을 확보해야 하는 등 까다로운 조건을 갖춰야 한다. 정모임집의 운영과 어린이집 원장을 맡고 있는 홍명숙씨는 “정부에서 받을 수 있는 지원금보다 까다로운 지원 조건을 맞추기 위해 들어가는 비용이 더 많아 법인 설립을 포기했다”며 “더 근본적인 문제는 양육 미혼모를 아예 도외시하는 정책방향”이라고 비판했다. 보건복지부 여성복지과 담당자는 “대부분의 미혼모들이 양육 책임을 지려하지 않는 현실”이라며 “모자 보호시설 이외에 미혼모 지원책을 수립할 여유가 없다”고 밝혔다.

평화모자복지회에 이어 미혼모 그룹홈을 운영하는 곳으로는 ‘애란원’이 있다. 미혼모 쉼터를 중심으로 운영하던 이곳은 지난해부터 ‘중간의 집’을 열었다. ‘중간의 집’이란 미혼모 쉼터에서 모자원 입소까지 1∼2년 동안 머무르는 곳이란 뜻이다. 내년에는 민간공동기금의 지원을 받을 예정이어서 곧 좀더 넓은 집으로 옮겨간다. 애란원 한상순 원장은 “양육 미혼모에 대한 정부의 지원이 좀더 확충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지난 7월 애란원에서 아이를 출산하고 중간의 집에 머물고 있는 김지혜(27·가명)씨는 “중간의 집이 있어서 아이를 키울 결심을 굳힐 수 있었다”고 돌이킨다.

기혼이던 아이 아빠와 헤어지고 어렵게 출산을 결심한 김씨는 반드시 내 아이는 내가 키우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아이를 키우는 일이 모성애만으로 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출산 뒤 다시 아이 아빠에게 연락할 처지도, 집으로 돌아갈 형편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경제적 자립이 절박했다. 다행히 중간의 집에 들어가 직업교육을 받을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김씨는 현재 중국어 학원에 다니며 통역가이드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이젠 아이를 키우는 미혼모의 생활에 익숙해졌다는 김씨는 “아이 때문에 생활의 활력도 생기고, 인생의 목표도 더욱 뚜렷해졌다”고 거듭 말했다.

꿋꿋하게 아이를 키울 결심을 한 김씨지만 동사무소에서 아이의 출생 신고서를 받아들고는 심란해졌다. 출생신고서 뒷면에 ‘혼인 외자는 아버지의 이름을 올리지 말라’고 적혀 있었던 것이다. 현행 호주제에서 미혼모가 아이를 자기 호적에 올리기 위해서는 따로 세대주로 분가해야 한다. 하지만 이런 경우에도 아이 아버지의 이름을 올릴 수가 없다. 만약 아버지의 이름을 올리기 원한다면 생부의 호적으로 편입되는 수밖에 없다. 반면 남자는 혼인 외자인 경우에도 자기 호적에 아이를 올리면서 생모의 이름을 명시할 수 있다. 한국여성민우회 가족과 성상담소 양혜경 소장은 “불평등한 호주제 탓”이라며 “책임지지 못할 출산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아이 아버지에게 양육책임을 지울 법적 강제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넌 왜 아빠가 없니?”

이처럼 아이를 낳고 양육하는 일은 미혼모 혼자만의 책임이 아니다. 당연히 아이의 아버지가 함께 책임지고 부담을 나누어야 할 문제다. 하지만 여태껏 아기 양육의 책임은 고스란히 미혼모 혼자만의 몫으로 돌려져왔다. 사회적 통념 탓도 있지만 법적인 강제도 미미하다. 평화모자복지회의 홍명숙씨는 “친자인지소송을 통해 양육비를 받을 수 있긴 하지만 절차가 까다롭고 자칫하면 아이를 빼앗길 위험도 있어 미혼모들이 소송을 꺼리게 된다”고 전했다.

혼자 생활고를 견디며 아이를 키우던 미혼모들이 또 한번 사회의 편견에 부딪히는 때는 아이가 유치원이나 학교에 입학할 무렵이다. 흔히 “넌 왜 아빠가 없니?”라는 물음에서 시작해서 “저 아이 엄마는 미혼모”라는 수근거림으로 이어지는 우리 사회의 편견은 아이와 엄마에게 극복하기 힘든 상처로 다가온다. 아이가 네다섯살이 되도록 기울인 노력을 수포로 돌리고 아이의 미래를 위해 이 무렵 입양기관을 찾는 미혼모들도 있다고 한다. 사회복지사 차승연씨는 이런 비극을 막기 위해서는 여성과 아동을 존중하는 사회인식의 확산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아이를 버리는 건 미혼모 혼자가 아닙니다. 아이를 버리는 미혼모 뒤에는 언제나 이를 조장하는 무책임한 아버지와 지원하지 않고 수수방관하는 사회가 버티고 있으니까요. 미혼이든 기혼이든 태어난 생명은 보호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더이상 가슴아픈 생이별은 없어야지요.” 양육 미혼모를 지원하는 일은 버려지는 아이를 줄이기 위한 가장 근본적인 대책이다.

신윤동욱 기자s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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