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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만화는 ‘아저씨’나 읽는 것?

등록 2000-11-08 00:00 수정 2020-05-02 04:21

전자게임에 밀려 판매율 급감하자 청장년층 대상 향수 자극하는 저가만화 출판에 안간힘

일본 전철에서 요즘 만화를 읽고 있는 아이들을 발견하기란 그리 쉽지 않다. 아이들의 손에는 주로 휴대용 게임기가 들려 있다. 집에서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한 시대의 추억을 공유하는 잣대로 종종 어린 시절 연재되거나 방영되던 만화를 거론하곤 했지만, 최근엔 그같은 공유체험도 종류가 바뀌어버렸다. 현재 대학생인 세대들마저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나눌 때면, 만화나 드라마가 아닌 게임에 관한 이야기를 주된 화제로 떠올린다.

만화책의 비닐을 벗긴 이유

만화잡지와 단행본의 총판매량 또한 점차 줄어들고 있다. 가장 정점에 올랐던 95년의 경우 총매출액이 5800억엔에 이르렀지만, 이후 점점 줄어들어, 지난해에는 약 10% 정도가 빠진 5300억엔 선에 머물렀을 뿐이다. 단행본 만화보다 만화잡지쪽이 좀더 심각하다. 단행본 만화의 지난해 총매출액은 92∼93년 수준으로 후퇴한 데 비해, 만화잡지의 총매출액은 90∼91년 수준으로 후퇴했다. 만화잡지쪽이 단행본 만화보다 그 낙차가 더 큰 셈이다.

이는 ‘찍어내기만 하면 팔린다’는 만화시장의 전설이 이제는 옛날이야기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위기감을 느낀 일본 출판사들이 제일 먼저 취한 위기탈출 전략은 만화의 ‘비닐’을 없애는 것이었다. 원래 만화의 ‘비닐’은 신간서점에서 서서 책을 읽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었다. 하지만 그 ‘비닐’이 독자들을 서점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한 요인이 되었다는 것을 출판사들은 간파해낸 것이다. 그래서 출판사들은 비닐을 씌우지 않은 책을 팔 수 있도록 서점에 요청하기 시작했고, 만화 전문서점인 ‘만화의 숲’이나 ‘다카오카 서점’ 등 꽤 많은 서점이 이에 호응해왔다. 공짜 만화를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독자들의 발길을 유도하자는 만화출판사들의 판매전략은 맞아떨어졌다. 비닐을 씌우지 않는 서점의 만화코너는 서서 읽는 독자들로 붐비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정도로 만화출판사가 처한 위기를 돌파하기엔 위기의 그늘은 너무 크고 넓다. 유소년층 대신 청장년층을 겨냥한 ‘염가 만화’ 단행본 시리즈는 만화출판계가 좀더 정면승부를 내기 위해 고안해낸 기획이었다.

이를 제일 먼저 시도한 쪽은 소학관. 지난해 7월부터 편의점에서만 살 수 있는 ‘마이 퍼스트 빅’ 시리즈를 펴내고 있다. 가격은 286엔(세금포함 300엔) 균일이고, 대상은 어린이가 아닌 청년이다. 내용 또한 옛날에 이름을 날렸던 작품들과 짤막하게 재편집된 장기연재물들이다. 서점에 가지 않는 청년층을 주된 대상으로 했지만, 결과는 20대에서 50대에 이르는 광범위한 연령층의 지지를 받아 대히트를 기록했다.

올해 8월부터는 그 여세를 몰아, 서점용 ‘브루 코믹스’ 시리즈를 펴내기 시작했다. 컨셉은 편의점용 시리즈와 같지만, 가격은 최하 100엔부터 600엔까지 차별화했다. 으로 우리나라 샐러리맨층에도 인기가 높은 히로카네 겐시의 출세작 을 재편집해 95엔(세금포함 100엔)에 판매하고 있다. 다른 일반 문고판 만화가 600∼700엔 하는 점을 고려해보면 파격적인 가격이다.

그러나 정작 이같은 파격적인 가격정책을 쓸 수밖에 없는 이유는 더이상 무시할 수 없을 만큼 중고 만화시장이 성장했기 때문이다. 중고 만화서점으로 제일 유명한 곳은 ‘만다라케’. 우리나라 만화인들에게도 꽤 널리 알려진 곳이다. 그런데 이 만화고서점은 최근 일본 신흥기업 전문 주식시장인 ‘마자스’에 상장해, 만화고서점도 유망한 기업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공표했다. 세간의 화제를 불러모은 것은 당연하다. 도쿄에만도 나카노, 시부야점을 비롯해 많은 지점이 있고, 일본 주요도시엔 거의 ‘만다라케’ 만화 헌책방이 있다. 최근에는 미국에까지 지점을 냈다.

이처럼 ‘만다라케’가 급성장하게 된 계기는 150평짜리 시부야점을 내면서부터이다. 옛날 만화뿐 아니라, 옛날 애니메이션 LD와 OVA, 옛 동인지 만화, 옛 캐릭터 상품 따위를 파노라마식으로 모두 한 매장에 진열해 놓았다. 점원들 또한 시간제로 돌아가면서, 만화주인공 복장(코스프레)을 한 채, 만화영화 주제가를 손님들 앞에서 부른다. 만화에 관한 한 옛 추억을 최대한 집대성시킨 셈이다. 만다라케 나카노 본점의 오쿠미야는 그곳이 ‘마니아의 성지’로 불린다고 귀띔해준다. 매년 여름 도쿄에서 열리는 대규모 동인지 판매전이 열리는 기간이면, 만다라케도 덩달아 매상이 오른다는 것이다.

이 만화고서점의 타깃 역시 30∼40대이다. 물론 10대들도 종종 매장에 들르긴 하지만, 역시 주고객은 과거의 향수를 잊지 못하는 청장년층이다. 지난해 만다라케의 매출액은 31억엔. 앞으로의 잠재시장은 약 1조엔 정도로 추산된다. 아직 만화 헌책방 사업은 시작에 불과한 셈이고 무한한 성장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90년대 들어 중고 만화시장에 뛰어든 또다른 만화고서점은 ‘북오프’. 90년 1호점을 낸데 이어, 벌써 500개 지점을 돌파했다. 서점의 규모나 분위기도 일반서점과 크게 다를 바 없다.

흘러간 필름 ‘재탕 삼탕’이 대안일까

바로 이같은 중고 만화시장의 엄청난 성장이 기존 메이저 만화출판사들을 긴장하게 한 것이다. 따라서 편집기획 방향도 고서점에 나와 있는 과거 히트작 중심의 재편집 형태를 띠게 되었고, 가격 또한 중고 만화시장에 형성된 가격을 고려해 염가로 책정될 수밖에 없다. 이런 추세에 맞춰 30∼40대를 대상으로, 소년 시절의 히트작들을 다시 청년 시절의 속편으로 등장시키는 만화잡지도 기획되고 있다. 를 펴내고 있는 일본의 중견 출판사인 신조사가 새롭게 만화잡지 시장에 뛰어들려는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이 만화잡지의 총편집책임을 맡게 된 ‘코아믹스’사의 호리에는 와의 최근 인터뷰에서 “과거 히트작의 속편, 신조사의 시대소설과 외국 베스트셀러의 만화화를 시도해볼 계획”이라고 말했다. 새로운 만화잡지가 청장년층을 그 대상으로 할 경우 충분히 승산이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새로 자라나는 세대로부터 외면당한 채, 지나간 세대들의 향수를 자극하는 흘러간 필름만을 재탕 삼탕 돌릴 수밖에 없는 것이 지금의 일본만화의 현실이라면 문제는 좀 심각하다. 더구나 일본만화를 벤치마킹해온 우리나라 만화계를 생각해볼 때, 문제는 더 심각해질 수밖에 없다.

만화 고서점 만다라케만 해도 그렇다. 그곳이 마니아의 성지라고는 하지만, 여전히 과거의 화려했던 영광에 그 토대를 두고 있는 한, 그곳을 찾는 고객은 더이상 현재진행형의 마니아가 아닌, 과거추수형 마니아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아직 일본만화는 건재하다. 몇몇 청년 잡지는 오히려 예전보다 높은 판매부수를 자랑하기도 한다. 하지만 청년이 아닌 좀더 어린 독자들의 발길을 되돌리지 않는 한, 만화계의 미래는 그리 밝은 편이 아니다. 게임에서 출발해 만화로도 크게 성공한 는 그런 의미에서 많은 것을 시사해 준다. 예전처럼 만화를 출발점으로 해서 애니메이션, 게임, 캐릭터 순으로 발전해 간다는 고전적인 방식만으로는, 게임에 빠져 있는 어린 독자층의 발길을 돌릴 수 없다는 것을 일본만화계는 터득했기 때문이다.

새로운 전자환경에 맞는 새로운 개념의 만화를 다각도로 모색하고 있는 일본만화계. 만화왕국의 명성에 어울리는 대안을 어떻게 만들어낼 것인가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도쿄=신명직 통신원mjshin59@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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