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5년 3월27일 인도네시아 수도 자카르타에서 진압복을 갖춰 입은 경찰이 군사법 개정 반대 시위에 나선 젊은이들을 강제 진압하고 있다. EPA 연합뉴스
오랜 군사독재를 딛고 일어선 인도네시아는 인도와 미국에 이은 세계 3대 민주국가다. 전체 인구(약 2억8천만 명)의 86%(2억4천만 명)가량이 무슬림인 세계 최대 무슬림 국가이기도 하다. 이슬람의 가치와 서구식 민주주의가 공존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드문 사례다. 그런 인도네시아에서 민주주의가 빠르게 뒷걸음질 치고 있다. 군사독재의 망령이 되살아날 조짐이다.
2025년 3월19일 인도네시아 유력 시사주간지 템포의 자카르타 사무실로 소포 상자가 배달됐다. 상자 안에는 귀가 잘려나간 돼지머리가 들어 있었다. 같은 날 인도네시아 신문평의회(언론중재위원회 격) 청사 앞으로 시위대가 몰려들었다. 이들은 템포가 “외국 편을 든다”고 비난했다. 앞서 2월에 프라보워 수비안토 대통령은 “외국 세력의 지원을 받는 매체가 나라를 분열시키고 있다”고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사흘 뒤인 3월22일 템포 사무실로 다시 소포가 배달됐다. 이번엔 머리가 잘린 쥐 여섯 마리가 들어 있었다.
1971년 창간한 템포는 인도네시아를 대표하는 탐사보도 전문매체다. 32년여 철권을 휘둘렀던 군사 독재자 수하르토의 ‘신질서’(오르데 바루·1966~1998년)에 정면으로 맞서다 1994년 폐간당하기도 했다. 수하르토가 시민혁명으로 권좌에서 쫓겨난 직후 재창간한 템포는 권력 감시의 최전선에서 날 선 필봉을 휘둘러왔다. 두 차례 ‘소포’가 배달될 무렵 이 매체가 집중한 것은 프라보워 대통령이 공들여온 ‘군사법 개정안’ 관련 보도다. 무슨 내용일까?

2025년 3월27일 인도네시아 수도 자카르타에서 군사법 개정에 반대하는 시위대가 의회 정문에 군대의 역할 확대를 비판하는 구호를 적고 있다. AP 연합뉴스
3월20일 인도네시아 의회는 ‘군사법 개정안’을 본회의에 상정해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과거 수하르토 정권은 이른바 ‘이중 기능’이란 이름으로 군복 입은 현역 장교들이 정부 각 부처와 산하 기관, 민간 기업의 주요 보직까지 차지할 수 있도록 했다. 독재 부역자를 위한 ‘전리품’이자, 군부독재 유지를 위한 핵심 장치였다. 민주화 직후 이를 제어하기 위해 만들어진 게 군사법이다. 개정 전 군사법 제47조는 경찰청과 국방부, 각급 정보기구 등 10개 기관에서만 현역 군인이 일할 수 있도록 제한했다. 개정안은 이를 법무부와 대테러청, 해상보안청 등 14개 기관으로 확대하는 내용이 뼈대다.
프라보워 대통령은 2024년 10월 집권 이전부터 군사법 개정을 통해 현역 군인들에게 더 많은 ‘사회 참여’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제 그는 취임 다음날(10월21일) 자신의 비서인 테디 인드라 위자야 중령을 공보장관에 임명했다. 군사법 위반 시비가 일었지만, 프라보워 대통령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대선 후보 시절 프라보워 대통령이 으뜸 공약으로 내세운 건 이른바 ‘무료영양식사 프로그램’(MBG)으로 불리는 무상급식제도다. 유엔아동기금(유니세프)은 2024년 3월29일 펴낸 보고서에서 “2022년을 기준으로 인도네시아 어린이 21.6%(약 450만 명)가 영양 부족에 따른 발육부진 상태”라고 짚었다. 2025년 1월6일 인도네시아 26개 주에서 영유아, 초·중·고등학생, 임산부 등 약 57만 명을 대상으로 한 무상급식이 시행에 들어갔다. 대중은 환호했다. 현지 일간 콤파스가 1월20일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 프라보워 대통령의 지지율은 취임 100일도 안 돼 80.9%까지 치솟았다. 2024년 2월 실시된 대선 당시 그의 득표율은 58.6%였다.
프라보워 대통령은 2025년 9월까지 무상급식 수혜자를 1500만 명까지 늘리기로 했다. 또 2029년까지 단계적으로 8290만 명까지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이럴 경우 한 해 필요한 예산은 298조4천억루피아(약 20조6천억원)에 이를 것으로 인도네시아 정부는 내다봤다. 무상급식을 관장하는 국가영양청(BGN)에 식자재를 공급하는 건 농업부에 딸린 식량조달공사(Bulog)다. 식량조달공사는 쌀 등 식량 작물 수입과 유통도 떠맡고 있다. 프라보워 대통령은 2월7일 식량조달공사 사장으로 노비 헬미 프라세탸 소장을 임명했다. 역시 개정 전 군사법 위반이다. 이후에도 프라보워 대통령은 군사법의 허용 범위를 넘어서는 현역 군인 인선을 이어갔다. 교통부 감사국장에 마료노 중장을, 농업부 감사국장에 이르함 와로이한 중장을 임명했다. 군사법 개정안이 통과되기 전부터 군복 입은 장성들이 각급 요직에 똬리를 틀었다는 뜻이다.
프라보워 대통령은 1951년 10월 유력한 관료 집안에서 태어났다. 경제학자 출신인 부친은 초대 대통령 수카르노 정부에서 재정부 장관을 지냈지만, 좌파 성향의 수카르노 대통령과 맞서다 1960년 초 망명길에 올랐다. 그는 1967년 수하르토의 핏빛 쿠데타 뒤 귀국해 군부정권에서 무역부 장관을 지냈다. 망명객인 부친을 따라 싱가포르·스위스·영국 등지에서 성장기를 보낸 프라보워 대통령은 1970년 인도네시아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프라보워 수비안토 인도네시아 대통령이 2025년 1월11일 대통령 집무실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REUTERS
1974년 졸업과 함께 장교로 임관한 프라보워 대통령은 주로 특전사에서 잔뼈가 굵었다. 그는 1983년 독재자의 둘째 딸 티틱 수하르토와 결혼했다. 그의 군 경력은 탄탄대로였다. 1998년 늙은 독재자가 권좌에서 끌어내려지기 직전까지 그는 특전사 사령관을 지내며 시민의 저항을 앞장서 짓밟았다. 군사독재가 무너진 뒤 군에서 축출된 프라보워는 요르단에서 짧은 망명 생활을 거친 뒤 돌아와 정치권에 뛰어들었다. 그는 2009년 대선 때 수카르노의 딸 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 전 대통령과 손잡고 부통령 후보로 나섰지만, 역시 군부 출신인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 대통령에게 패했다. 2014년과 2019년 대선에도 거푸 도전했지만, 시민사회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은 조코 위도도(조코위) 대통령에게 크게 뒤졌다.
2014년과 2019년 두 차례 대선에서 프라보워 대통령은 △강한 군대 △국가 안보 △주권 수호를 강조했다. 2019년 대선 뒤 조코위 대통령은 패배한 프라보워를 국방장관으로 발탁했다. 연임 제한으로 출마가 불가능한 2024년 대선을 앞두고 조코위 대통령은 프라보워와 밀착했다. 임기 막판까지 70~80%대의 높은 지지율을 유지했던 조코위 대통령은 자신의 소속 당 투쟁민주당의 후보 대신 프라보워를 대통령 후보로 지지했다. 투쟁민주당은 결국 조코위 대통령을 출당시켰다.
프라보워는 조코위 대통령의 아들 기브란 라카부밍 라카를 부통령 후보로 선택하는 것으로 화답했다. 인도네시아 헌법은 정·부통령 출마 자격을 만 40살 이상으로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길은 쉽게 열렸다. 2023년 10월 헌법재판소는 선출직 경험이 있으면 40살 미만이어도 출마가 가능하다는 결정을 내렸다. 기브란은 아버지의 고향이자 정치적 기반인 자바섬 수라카르타 시장(2021~2024년)을 지냈다. 당시 헌재 소장이던 안와르 우스만은 조코위 대통령의 매제다. 그렇게 시민사회의 전폭적 지지를 받았던 ‘서민 대통령’(조코위)은 독재자의 사위(프라보워)와 하나가 됐다. 프라보워는 경제성장, 일자리 창출, 무상급식을 대표 공약으로 내세우고 젊은층 공략에 나섰다. 독재를 경험하지 못한 세대는 ‘귀여운 할아버지’에게 열광했다. 2024년 2월 대선과 함께 총선이 치러졌다. 투쟁인민당은 16.7%의 득표율로 원내 제1당이 됐다. 프라보워 대통령의 소속 정당인 그린드라당은 13.2%를 득표했다. 여기에 선거에 앞서 그를 지지한다는 뜻을 밝힌 골카르당 등 4개 정당의 합산 득표율은 46%에 달했다. 닛케이 아시아는 프라보워 대통령의 취임을 두 달가량 앞둔 2024년 8월22일 “ 8개 원내 정당 가운데 투쟁민주당을 제외한 7개 정당이 그린드라당과 연합전선을 구축하기로 결정했다 ” 며 “ 이들의 의석을 합 하면 전체의 80%에 이른다 ” 고 전했다. 의회는 프라보워 대통령의 수중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2025년 3월27일 인도네시아 수도 자카르타의 의회 부근에서 군사법 개정에 반대하는 시위대가 경찰이 쏜 물대포에 맞서고 있다. EPA 연합뉴스
군사법 개정을 앞두고 인도네시아 시민사회는 “나라를 수하르토 군사정권 시절로 되돌리려는 것”이라며 강력히 반발했다. 군대가 국가 방어를 뛰어넘어 공적 영역에서 역할을 확대 강화할수록,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을 침해할 수 있다는 점을 오랜 기간 경험한 탓이다. 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는 3월19일 성명을 내어 “프라보워 대통령의 의도는 군사법 개정을 통해 민간 영역에서 군대의 역할을 복원시키려는 것으로 보인다. 과거 오랜 기간 군대는 인권유린을 저지르고도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았다. 시민사회와의 협의 없이 군사법 개정안 통과를 서두르는 것이야말로 정부가 공언한 인권 존중과 투명성 확대에 정면으로 반한다”고 짚었다.
“지정학적 변화와 세계적 군사 기술 발전은 재래식 및 비재래식 갈등 해결을 위해 군대가 변신해야 할 것을 요구한다. 우리는 주권을 지켜내는 과정에서 인도네시아 국민을 절대 실망시키지 않겠다.” 샤프리 샴수딘 국방장관은 3월20일 군사법 개정안 처리에 앞서 의회에 출석해 이렇게 말했다. 의회가 개정안을 통과시키자 자카르타의 의회 의사당을 비롯해 전국 각지에서 대학생 등 청년층을 중심으로 거센 저항의 불길이 번졌다. 영국 비비시(BBC) 방송은 이날 시위에 참가한 청년 활동가의 말을 따 “군대는 정치에 개입해선 안 된다는 게 민주주의의 본질이다. 군대는 그저 병영을 관리하고 국가를 방어하면 된다. (…) 1998년 이후 민주주의는 조금씩 지속적으로 목 졸려왔다. 오늘 군사법 개정안 통과는 그 절정이다. 의회가 민주주의를 살해했다”고 전했다. 3월27일에도 군사법 개정 반대 시위가 인도네시아 전역에서 불타올랐다.
“인도네시아의 개정 군사법은 권위주의 정권 시절로 되돌아갈 것이라고 선언하진 않았다. 비상계엄을 선포하거나, 시민의 기본권을 정지시키거나, 의회를 해산하지도 않았다.” 외교·안보 전문매체 디플로맷은 4월7일 이렇게 보도했다. 이 매체는 “하지만 군사법 개정을 통해 국가가 안보를 어떻게 인식하는지, 또 누구에게 안보를 맡길지에 대한 구조적 변화가 명문화됐다”며 “이 조용한 법률적 재조정은 공개적인 위기 상황보다 장기적으로 훨씬 실질적 변화를 초래할 가능성이 크다”고 덧붙였다. 군사독재 종식 27년, 인도네시아 민주주의가 다시 기로에 섰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단독] 통일교 문건 “민주 전재수 의원, 협조하기로” 돈 전달 시점에 적시 [단독] 통일교 문건 “민주 전재수 의원, 협조하기로” 돈 전달 시점에 적시](https://flexible.img.hani.co.kr/flexible/normal/500/300/imgdb/child/2025/1209/53_17652760315584_20251209503558.jpg)
[단독] 통일교 문건 “민주 전재수 의원, 협조하기로” 돈 전달 시점에 적시

나경원, 법안과 무관 필리버스터 강행…우원식 의장, 마이크 껐다

김건희 “도이치 어떡해?” 이준수 “결혼했구먼ㅋ” 카톡 공개

코스트코 ‘조립 PC’ 완판…배경엔 가성비 더해 AI 있었네

놀아라, 나이가 들수록 진심으로
![[단독] 학폭 맞다…전체 1순위 키움 지명 박준현에 교육청 ‘사과 명령’ [단독] 학폭 맞다…전체 1순위 키움 지명 박준현에 교육청 ‘사과 명령’](https://flexible.img.hani.co.kr/flexible/normal/500/300/imgdb/child/2025/1209/53_17652647350405_20251209502925.jpg)
[단독] 학폭 맞다…전체 1순위 키움 지명 박준현에 교육청 ‘사과 명령’

아빠 곰은 회색곰, 엄마 곰은 북극곰…애기 곰은 ‘생태계 붕괴’ 상징

국힘 당무감사위, 한동훈 가족을 당원게시판 글 작성자로 사실상 특정

구리 ‘서울 편입’ 추진 본격화…시 “의회 요구 반영해 보완책 마련”
![[단독] 통일교 ‘민주당 정치인 15명 지원’ 정황…특검은 수사 안 했다 [단독] 통일교 ‘민주당 정치인 15명 지원’ 정황…특검은 수사 안 했다](https://flexible.img.hani.co.kr/flexible/normal/500/300/imgdb/child/2025/1208/53_17651431283233_20251207502130.jpg)
[단독] 통일교 ‘민주당 정치인 15명 지원’ 정황…특검은 수사 안 했다

![[단독] 키움 박준현 ‘학폭 아님’ 처분 뒤집혔다…충남교육청 “피해자에게 사과하라” [단독] 키움 박준현 ‘학폭 아님’ 처분 뒤집혔다…충남교육청 “피해자에게 사과하라”](https://flexible.img.hani.co.kr/flexible/normal/500/300/imgdb/child/2025/1209/53_17652425593471_20251209500852.jpg)



![[단독] 전학, 침묵, 학폭…가해자로 지목된 고교 에이스 [단독] 전학, 침묵, 학폭…가해자로 지목된 고교 에이스](https://flexible.img.hani.co.kr/flexible/normal/500/300/imgdb/child/2025/0815/53_17551955958001_20250814504074.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