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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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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시 잊힌 이름, 시리아

내전 13년 폐허에 덮친 강진… 주검에만 열린 국경
골든타임 72시간 동안 어디에도 도움의 손길은 없었다
등록 2023-02-18 09:06 수정 2023-02-18 23:49
2023년 2월11일 튀르키예와 시리아를 강타한 지진으로 가족을 잃고 부상을 입은 시리아 소년이 반군이 장악한 시리아 알레포주 진다이리스마을의 무너진 집 잔해 속에 앉아 있다. AFP 연합뉴스

2023년 2월11일 튀르키예와 시리아를 강타한 지진으로 가족을 잃고 부상을 입은 시리아 소년이 반군이 장악한 시리아 알레포주 진다이리스마을의 무너진 집 잔해 속에 앉아 있다. AFP 연합뉴스

‘우린 이미 목숨을 잃었다. 실망하게 해줘 고맙다.’

폐허가 된 시리아 북부의 어느 건물 파편에 남겨진 아랍어 글귀다. 2023년 2월13일 서울 마포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압둘 와합(39) ‘헬프시리아’ 사무국장이 휴대전화로 이 글귀 사진을 보여줬다. 2월6일(현지시각) 대지진이 튀르키예와 시리아 북서부 지역을 강타한 뒤 시리아 사람들은 절박하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구조의 손길은 더디게 닿았다. 절박함은 곧 무력감, 상실감, 분노로 이어졌다.

민간구조대 ‘화이트헬멧’의 고군분투

시리아 출신의 와합 사무국장은 시리아 현지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바샤르 알아사드 독재정권 때문에 구호물자가 통과할 길이 막힌 탓이 컸지만, 사람들은 즉각적인 구조 도움이 없다는 데 좌절했어요. 민간구조대 ‘화이트헬멧’이 여러 나라에 구조팀과 장비 도움을 요청했는데 골든타임 72시간 동안 아무 도움이 없었어요. ‘우리가 도와주고 싶어도 길이 없어(도로가 파손되거나 국경 관문이 막혔다는 뜻) 못 도와준다’고 해서 ‘국경까지만 구조장비를 갖다주면 우리가 하겠다’고 했는데 그조차 이뤄지지 않았어요. 그런데 인터넷엔 지진 발생 둘째 날부터 튀르키예 사람들이 시리아 난민들의 주검을 국경 너머 시리아로 돌려보내는 영상이 올라온 거예요. 그걸 본 시리아 사람들은 생각한 거죠. 주검은 튀르키예에서 시리아로 보낼 수 있는데, 구조 인력이나 장비는 보낼 수 없었구나. 그 길은 ‘주검만을 옮길 수 있는 길’이구나.”

와합 사무국장은 한때 평화로웠던 시리아 도시 락까에서 자랐다. 다마스쿠스대학 법학과를 졸업하고 수도 다마스쿠스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2009년 한국으로 유학 왔는데, 그길로 고향에 돌아가지 못할 줄은 몰랐다. 2011년 아사드 정권이 민주화운동을 강경 진압하면서 유혈사태가 벌어졌고, 내전이 시작됐다. 와합 사무국장은 국내 시리아 난민 구호단체 헬프시리아에서 활동하며 화이트헬멧 등 시리아 현지 구조단체와 연락했다. 화이트헬멧은 독재정권에 저항하는 반군 장악 지역의 민간구조대다. 사실상 반군 장악 지역은 무정부 상태기 때문에, 평범한 시민들이 하얀 헬멧을 쓰고 정부·소방을 대신해 민간인을 구조하는 역할을 해왔다.

시리아 내전의 참혹함을 고발한 다큐멘터리 <사마에게>(2020년) 감독 와드 알카팁도, 2월11일 트위터 계정 ‘액션포사마’(Action for Sama)를 통해 현지 상황을 이렇게 전했다.

“밥 알 하와(튀르키예와 시리아를 잇는 국경검문소) 교차로로 향하는 도로를 사용할 수 없다는 유엔의 주장은 부끄럽다. (문은) 열려 있었다. 시리아 자원봉사자들은 가까스로 건넜다. 그들에겐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2023년 2월13일 서울 마포구의 한 카페에서 시리아 최초의 한국 유학생인 압둘 와합 ‘헬프시리아’ 사무국장이 <한겨레21>과 만나 이야기하고 있다. 손고운 기자

2023년 2월13일 서울 마포구의 한 카페에서 시리아 최초의 한국 유학생인 압둘 와합 ‘헬프시리아’ 사무국장이 <한겨레21>과 만나 이야기하고 있다. 손고운 기자

“가족에게 사랑한다 전해달라”던 매몰자는 끝내…

유엔은 시리아에 발 빠르게 구조 인력·장비를 보내지 못한 과오를 인정했다. 2월12일 마틴 그리피스 유엔 인도주의·긴급구호 담당 사무차장은 자신의 트위터에 “우리가 시리아 북서부 사람들을 실망시켰다. 기다렸던 국제적 지원이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당연히 버림받았다고 느꼈다. 우리 의무는 이 실패를 되도록 빨리 바로잡는 것”이라고 썼다.

시리아의 상황은 절박하다. 13년째 내전이 이어지고 지진 피해까지 겹쳤기 때문이다. ‘시리아 북서부 의료시설 대부분은 지진으로 가동이 어려운 상황이다. 국경없는의사회가 지원하는 모성병동 두 곳도 건물 붕괴 위험으로 전원 대피했다.’ 시리아 반군 점령 지역에서 구호활동을 벌이는 국경없는의사회가 2월15일 한국사무소에 보내온 현지 상황이다. 다음과 같은 보고도 이어졌다. ‘2월8일 기준 알레포 및 이들리브 의료시설에 부상자 3465명과 사망자 551명이 유입됐다.’ ‘인구 1460만 명 중 국내 실향민은 690만 명 정도인데 대부분이 여성과 아동이다.’

와합 사무국장에게 화이트헬멧의 한 대원은 현지 상황을 이렇게 전했다고 한다. “와합이 전화하기 직전에 나는 어느 건물 잔해 위에 있었다. 밑에서 갇힌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를 언제 꺼내줄 수 있느냐’고 하기에 ‘힘내라, 조금만 기다려라, 장비를 옮기고 있다’고 말했다. 그분이 ‘왠지 저는 죽을 거 같다. 가족한테 사랑하고, 챙기지 못해 미안하고, 용서해달라고 꼭 전해달라’고 했다. 우리는 울면서 콘크리트를 옮겼다. 그분은 결국 세상을 떠났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지진으로 인한 시리아 내 사망자 수가 1만 명에 가까울 것으로 추정한다. 튀르키예에서 숨진 3만5천여 명(2월16일 집계 기준) 가운데도 다수가 시리아 난민이다.

최악의 지진이 발생한 곳은 시리아 북서부 반군 점령 지역이다. 시리아의 독재자 아사드 정권은 지진이 발생한 당일에도 반군 점령 지역에 폭격을 가했다. 중동 전문 매체 <미들이스트아이>(MEE)는 2월7일(현지시각) “아사드 정부군이 지진 발생 두 시간도 채 안 돼 마레아(반군 점령지) 마을을 강타했다”고 전했다. 이곳 사람들은 시리아 정권이 지진 피해 지역 구호를 빌미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제재 완화를 얻어낼까봐 두려워했다. 독재자에게 저항하면서 시작된 시리아의 민주화운동은, 미국·러시아 등 세계 각국의 이해관계는 물론이고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 단체, 쿠르드족까지 가세한 대리전으로 변질됐다. 자유를 얻고 싶었던 평범한 사람들의 삶은 완전히 부서졌다.

시리아의 두 아이가 폭격으로 목숨을 잃은 동생의 얼굴을 어루만지고 있다. 다큐멘터리 <사마에게> 갈무리

시리아의 두 아이가 폭격으로 목숨을 잃은 동생의 얼굴을 어루만지고 있다. 다큐멘터리 <사마에게> 갈무리

후원에 그치지 말고 지켜봐달라

“지금 시리아 사람들은 상실감이 너무나 커요. 처음 시리아 민주화운동(2011년)이 일어났을 때, 사람들은 ‘독재자는 물러나라’고 쓰인 손팻말을 영어·프랑스어·독일어로 제작해 들고나왔어요. 국제사회가 안다면 무조건 도와주리라고 생각한 거죠. 그런데 이제는 알고 있어도 적극적으로 돕지 않음을 깨닫게 됐어요.”(압둘 와합) 2013년 시리아 정부군이 화학무기를 사용해 어린이 등 무고한 시민 1600명을 죽였는데도 국제사회가 침묵한 일이 대표적이었다.

와합 사무국장은 시리아 상황이 궁금하다면 다큐멘터리 <사마에게>를 찾아보라고 추천했다. 다큐멘터리 속에서 얼굴에 먼지를 뒤집어쓴 어린 두 형은, 숨진 남동생의 얼굴에 키스를 퍼붓는다. 엄마는 파란 천에 싸인 아이를 안고 거리로 나가 무작정 걷는다. “내 아들이에요. 빼앗으면 용서 못해요.” 낡은 의료시설 침대에 걸터앉은 의사는 혼자 울며 읊조린다. “아이들이 무슨 죄야. 아무 잘못이 없잖아.”

시리아의 한 병실에 혼자 남은 의사가 울고 있다. 다큐멘터리 <사마에게> 갈무리

시리아의 한 병실에 혼자 남은 의사가 울고 있다. 다큐멘터리 <사마에게> 갈무리

와합 사무국장은 2월18일 시리아 국경과 인접한 튀르키예 가지안테프로 출국한다. 국내 재난구호단체 ‘더프라미스’의 김동훈 상임이사도 동행해 시리아 내부를 도울 현지 비정부기구(NGO)를 물색할 예정이다. 지금이라도 헬프시리아·화이트헬멧·더프라미스·국경없는의사회 누리집 등을 통해 시리아를 도울 수 있다. 와합 사무국장은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후원 뒤에도 시리아를 기억해주세요. 어떻게 돕는지 지켜봐야 그 단체들도 더 투명하게 행동하면서 힘을 얻을 거예요.”

손고운 기자 songon1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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