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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르키예 지옥 한복판에서 ‘천국’을 봤습니다

지진 피해 현장에서 만난 ‘천국’이란 이름의 젠네트 가족… 최악의 상황에서도 희망 잃지 않고 이방인 환대
등록 2023-02-18 08:33 수정 2023-02-18 08:43
튀르키예 카흐라만마라시의 구호텐트에서 만난 젠네트(왼쪽)와 남동생(오른쪽), 가운데는 젠네트의 조카. 한겨레 조해영 기자

튀르키예 카흐라만마라시의 구호텐트에서 만난 젠네트(왼쪽)와 남동생(오른쪽), 가운데는 젠네트의 조카. 한겨레 조해영 기자

2023년 2월11일, 지진이 일어난 튀르키예 카흐라만마라시(카라만마랴슈)의 거대한 텐트촌에서 튀르키예어로 ‘천국’이라는 이름(젠네트)을 가진 이재민을 만났다. 튀르키예인 가운데에는 특정한 단어를 이름으로 쓰는 사람이 많았다. 말라트야(말라티아)에서 만난 10살 남자아이의 이름은 ‘야프락’, 튀르키예어로 ‘잎’이란 뜻이었다. 43살 젠네트는 텐트촌에서 노모와 남동생, 아이들과 함께 지내고 있었다.

상투적 표현 넘어야만 보이는 비극

2023년 2월7일, 튀르키예 지진 취재 현장으로 떠나면서 결심했다. 현장은 ‘지옥’일 수는 있겠으나 기사에 ‘지옥’이란 단어는 쓰지 않겠다고. 불교를 믿는 나에게 ‘지옥’이란 살면서 이런저런 죄를 많이 지은 이들이 죽어서 당도하는 곳이다. 새벽에 튀르키예를 덮친 지진은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재난이었다. 아무 잘못도 없는 이들이 땅이 갈라져 건물에 깔린 일을 ‘지옥’이라고 부를 수는 없었다. 그런데 ‘천국’이란 이름의 젠네트를 만나자, 지옥 같은 어려움 속에서 이들이 지키고 싶은 천국을 생각하게 됐다.

텐트촌은 모든 것이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젠네트와 가족은 삶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이불과 옷가지, 구호물품이 깔끔하게 정돈돼 있었다. 가진 것을 모두 잃어버린 상황에서도 젠네트는 “아이들의 건강”을 염려해 플라스틱으로 된 구호물품 대신 집에서 건져온 도구를 쓴다고 했다. 지진이 일어난 순간을 설명할 때를 제외하곤, 젠네트의 표정은 대체로 밝았다. “아이들 앞에서 안 좋은 소리를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젠네트의 텐트는 말 그대로 ‘지옥 안의 천국’처럼 보였다. 어떤 비극은 상투적 표현을 온전히 이해한 뒤에야 제대로 들여다볼 수 있음을 깨달았다.

아다나와 카흐라만마라시, 말라트야와 하타이 등지에서 만난 튀르키예인들은 재난의 한가운데에 있으면서도 시종일관 친절했다. 우연히 들른 주유소에서는 밥을 내줬고, 물이 나오지 않는 화장실을 이방인에게 열어줬다. 구호물품으로 받은 빵을 취재진에게 떼어줬으며 정부 텐트조차 받지 못한 오지 마을 주민들의 입에서 “(취재진이 잘 곳이 없으면) 우리 텐트에서 자도 된다”는 말이 나왔다.

2023년 2월13일 아침(현지시각) 튀르키예 말라트야주 바탈가지 바흐첼리에브레르의 구호텐트. 한 텐트에서 18명이 생활한다. 텐트가 부족해 어른들은 차에서 잠을 잔다. 한겨레 백소아 기자

2023년 2월13일 아침(현지시각) 튀르키예 말라트야주 바탈가지 바흐첼리에브레르의 구호텐트. 한 텐트에서 18명이 생활한다. 텐트가 부족해 어른들은 차에서 잠을 잔다. 한겨레 백소아 기자

“한 명을 살리는 것은 모든 생명을 살리는 것”

출국하기 전날 한 신문방송학과 교수에게 전화해 물었다. “튀르키예 지진 취재를 가는데 뭘 해야 할까요?” 그는 “현장의 지옥도를 자세히 보여주면 된다”고 했다. 내가 가진 거라곤 한국과 튀르키예를 오가는 왕복 항공권과 ‘현장 잘 보여주기’라는 취재 목표뿐이었다. 그렇게 튀르키예와 시리아 대지진 취재를 시작했다.

인천에서 튀르키예 이스탄불까지는 비행기로 12시간이 걸린다. 2월7일 한밤의 인천국제공항엔 취재진이 많았다. 두꺼운 외투를 챙겨 입은 사람들이 방송 장비와 카메라를 들고 출국 절차를 밟았다. 이날 공항에선 한국 해외긴급구호대(KDRT)의 출정식이 열렸다. 살리 무랏 타메르 주한튀르키예대사는 “튀르키예에는 이런 말이 있다. 한 명을 살리는 것은 모든 생명을 살리는 것과 같다. 한 명이라도 살리러 와준다면 우리는 감사하게 생각할 것”이라고 말했다. 튀르키예로 떠날 수색견들이 주황색 유니폼을 입은 소방대원들을 보며 꼬리를 흔들었다.

취재진이 12시간을 날아오는 동안에도 튀르키예 현지의 피해 규모는 계속 늘었다. 비행기 안에서도 부서지고 무너지고 죽고 오열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튀르키예 현지 방송 뉴스로 지켜봐야 했다. 이스탄불 공항 곳곳에는 국가적 애도를 알리는 리본이 걸린 것 외에는 평온한 분위기였다. 공항에서 만난, 커다란 짐가방과 아이를 안은 여성은 피곤한 얼굴로 “구조대가 너무 늦게 왔다”고 말했다.

하지만 재난의 현장에 도착하자, 분명히 구석구석 생이 파괴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먼 나라의 이야기에서 한국을 떠올리기도 했다. 콜센터에서 일한다는 20대 여성 이재민은 한국의 여성노동자를 연상하게 했다. 은행 빚을 잔뜩 지고 3개월 전 정육점을 열었다는 마흐멧의 얼굴에서 코로나19로 어려움을 겪던 3년 전 한국 자영업자들의 표정이 겹쳐 보였다.

튀르키예에 일주일 남짓 머무르는 동안, 이재민들의 슬픔이 분노로 변하는 것이 느껴졌다. 취재진에게 따뜻하게 차(茶)를 내어주던 이재민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범죄 소식, 튀르키예 정부의 재난 대응에 날카로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무너진 이들 개개인의 앞날은 물론, 튀르키예 국가의 앞날에도 이번 재난은 분기점이 될 것 같았다.

언어를 잃은 느낌, 오래 기억할 것

2월16일 밤, 이스탄불에서 인천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 지난 일주일 내내 ‘언어를 잃은 느낌’을 받았다. 알고 있던 어휘는 음절, 자음과 모음으로 모조리 부서졌다. 카흐라만마라시의 텐트촌을 본 날, 취재 메모에 나는 이렇게 썼다. “알던 것들이 다 무너지는 느낌. 그건 이 사람들만큼이나 무너짐의 의미를 지금 체감하는 이들이 이 세상에 없을 것이기 때문. 그럼에도 불구하고 먹을 것, 마실 것을 나눠주고 환대해준 사람들에게 우리가 주어야 할 어떤 의무와 책임으로서의 환대.”

지진 피해 현장을 취재하느라 씻지 못하고 자동차에서 잠드는 날들이 고생스럽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이겠으나, 취재 기간 경험한 고생스러운 일을 굳이 나열하는 대신 일종의 ‘오답 노트’를 쓴다. ‘지옥’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겠다는 결심이 무너졌듯이, 기사의 표현에 관해서는 어떤 결심도 의미가 없었다. 어떤 곳에서든, 설령 모든 것이 완전히 파괴된 곳에서도 기자의 일은 그저 현장을 보고 사람의 말을 듣는 것. 튀르키예에서 쓴 기사의 모든 문장이 그렇게 나왔다. 이것을 잊지 않고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다. 가지 못한 시리아에는 더 많은 ‘전할 것’이 있을 것이다.

카흐라만마라시(튀르키예)=조해영 <한겨레> 기자 hy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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