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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40여년 만에 반정부시위 “이 싸움을 멈출 수 없다.”

한달째 계속되는 자유를 향한 이란 민중 시위에 참여중인 현지 시민들의 목소리
등록 2022-10-30 00:29 수정 2022-12-09 13:58
이란의 10대들이 히잡을 착용하지 않은 채 이란 반정부 시위대의 노래인 셰르빈 하지푸르의 <위하여>를 부르고 있다. https://twitter.com/AlinejadMasih/status/1576911788964081664

이란의 10대들이 히잡을 착용하지 않은 채 이란 반정부 시위대의 노래인 셰르빈 하지푸르의 <위하여>를 부르고 있다. https://twitter.com/AlinejadMasih/status/1576911788964081664

이란 수도 테헤란에서 히잡을 제대로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22살 마흐사 아미니가 숨진 뒤 이란을 중심으로 벌어진 반정부 시위가 한 달째에 접어들었다. 그사이 200여 명이 숨졌고 중고등학생까지 거리에 나섰다. 이들은 왜 용맹한 사자처럼 시위를 지속하는가. 이란 청년 세대를 연구해온 구기연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HK연구교수가 이란 현지 시위 참가자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_편집자
① 이란의 미래, 시위하는 10대

유럽 축구 경기를 즐기고 한국과 터키, 미국, 영국 드라마와 영화를 보고 자란 이란의 10대에게 이슬람 규범과 규율을 강조한들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겠는가?

“우리는 자유를 원하고 이란 사람 모두가 평화를 누리길 바라요. 강요된 종교를 원하지 않아요. 특히 히잡(착용)은 스스로 결정할 권리라고 생각해요. 마흐사 아미니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우리의 권리를 주장할 용기를 얻지 못했을 거예요. 왜 누군가가 종교적 규제를 위해 죽어야 하나요?”

10대인 사라는 안전 문제로 시위에 참여할 수 없을 때는 밤마다 집 안에서 구호를 외친다. 이란의 중고등학생은 교실 벽마다 걸린 최고지도자들의 사진을 찢었다. 교과서 앞표지를 장식한 ‘혁명의 아버지’ 이맘 호메이니의 사진도 마찬가지다. 이번 시위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을 이들은 도발적으로 벌이고 있다. 항의 표시로 히잡 속 허리까지 내려오는 머리카락을 보이며 친구들과 교실 안에서 노래를 부르는 모습은 인터넷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시간 날 때마다 해시태그를 통한 온라인 시위 활동을 열심히 한다고 했다.

2022년 10월26일 국제앰네스티는 이란 시위로 인한 10대 사망자가 적어도 23명 이상이라고 보고했다. 방탄소년단(BTS) 팬이던 17살 니카, 일상을 유튜브에 담던 16살 사리나, 총상을 입고 숨진 17살 아볼파즐까지.

② 시위대 음식 준비하는 40대 주부

“오늘(10월8일) 11시 바자르(전통시장) 상인 협회, 전국 소상공인 협의회를 비롯해 전국에서 대규모 시위를 계획하고 있어요. 그래서 혹시나 벌어질 상황에 대비해서 시위대에 나눠줄 음식과 약품을 준비하고 있어요. 얼마나 또 많은 인명 피해가 있을지…. 부디 이란의 평화를 위해 기도해주세요. 새벽 2시가 넘어서야 테헤란에서 인터넷 연결이 가능해서 급하게 메시지를 남깁니다.”

수도 테헤란에 사는 40대 후반 주부인 마리얌(가명)의 다급한 메시지가 와 있었다. 24시간이면 사라지는 그의 인스타그램 스토리에는 시위와 관련한 포스팅이 끊임없이 올라온다. 이란 현지시각으로 새벽에 가상사설망(VPN)을 연결하면 이란 정부의 인터넷 통제를 잠시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란인은 검열과 추적에 대비해 게시물이 아닌 스토리에 짧은 영상과 사진, 그리고 자기 생각을 적었다.

테헤란의 전통시장에서 사업하는 남편과 안정된 삶을 누리는 마리얌은 평범하게 살아왔다. 하지만 이번 시위로 그는 비장한 시위대의 일원이 돼 있었다. 마리얌 부부는 시위가 주로 열리는 엥겔럽(혁명) 광장 근처에 있는 자신의 건물 1층 출입문을 열어두고 시위대의 피신 장소로 활용했다. 이들은 시위대를 위해 밤마다 간단한 음식과 물, 구급약을 준비했다. 자신의 건물 폐회로티브이(CCTV)에 찍힌, 시위대가 피신하고 보안군이 긴 곤봉으로 건물 유리창을 깨는 영상을 국외 통신사에 제보하기도 했다.

10월9일 현지시각 새벽 2시30분에 마리얌은 와츠앱 메시지로 전화를 걸어줄 수 있는지 물었다. 와츠앱으로 전화받는 그의 목소리는 울음으로 젖어 있었다.

“남편이 잘못하면 총 맞을 뻔했어요. 오늘 전국 바자르마다 유혈 사태가 터졌어요. 보안군이 쏜 총알이 2층 사무실 벽에 박혀버렸어요. 정말 죽을 뻔했다고요.” 그는 쏟아내듯 설명했다. “우리 아이들이 왜 자유 없이 정권의 노예로 살아가야 하나요? 지금 이곳 사람들은 하루하루 먹고살 걱정을 하고 있어요. 빵조차 살 돈이 없다고요. 이렇게 사나 이렇게 싸우다 죽으나 마찬가지예요. 우리는 이 싸움을 멈출 수 없어요.”

③ 2009년 반정부 시위 참가자

“우리 함께했던 88년(이란력 1388년/2009년)을 기억하지? 요즘 그때를 자주 떠올리곤 해. 내 마음과 영혼까지도 너무 힘들어. 많은 아이가, 사람이 죽어가고 있어. 하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없어. 여기 상황이 비참하다는 것을 세계 사람들이 알아야 할 텐데….”

이란 현지시각으로 새벽, 메신저 와츠앱 너머로 들리는 사키네(가명)의 목소리는 젖어 있었다. 사키네 가족은 내가 이란에 현지조사를 처음 간 2002년 인포먼트(정보제공자)로 처음 만났다. 그 후 20년간 만남을 지속한 덕에 그들은 내 ‘이란 가족’이 됐다.

2009년 6월, 이란 대선이 있던 날 나는 사키네의 가족과 함께 투표장에 갔다. 그 가족이 지지한 개혁파 대선 후보 미르 호세인 무사비를 지지하기 위해 그의 상징색인 녹색 옷을 함께 입었다. 하지만 다음날 새벽, 보수파 대통령 마무드 아마디네자드의 승리 결과는 예상보다 빨리 나왔다. 사키네의 거실에서 시청한 <비비시 페르시안>(BBC Persian) 방송에서는 분노를 표출하는 이란 사람들이 나왔다. 밤 9시가 되자 골목마다 ‘알라후 아크바르’(신은 위대하다) ‘독재자에게 죽음을’이라는 구호가 울려 퍼졌다. 사람들은 누가 누구인지 알 수 없게 모두 집에 불을 끈 뒤 창문을 열고 이렇게 외쳤다. 짙은 어둠 속에서 함성이 메아리쳤다.

그날부터 이란 대도시 거리에서 사람들은 부정선거를 주장하며 평화시위, 침묵시위에 나섰다. 1979년 이란 이슬람혁명이 일어난 지 30년 만에 터진 대규모 반정부 시위였다.

“우리는 울고 있지만 더 이상 눈물을 흘리지 않아. 우리는 아직 끝나지 않았어. 멈출 수 없어.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어.” 그들의 안위를 걱정하는 나에게 사키네는 희망을, 미래를 이야기했다. 내 이란 가족은 언제 평범하고 평화스러운 삶을 살 수 있을까.

구기연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HK연구교수·<이란 도시 젊은이, 그들만의 세상 만들기>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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