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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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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자흐 반독재 시위에 러시아가 득 봤다

30년 독재와 경제위기에 불만 폭발… 러, 군사개입으로 유라시아 영향력 확대
등록 2022-01-14 17:45 수정 2022-01-15 02:46
2022년 1월11일(현지시각)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일어난 카자흐스탄의 알마티에서 집단안보조약기구(CSTO) 맹주국인 러시아의 평화유지군이 거리를 순찰하고 있다. 타스 연합뉴스

2022년 1월11일(현지시각)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일어난 카자흐스탄의 알마티에서 집단안보조약기구(CSTO) 맹주국인 러시아의 평화유지군이 거리를 순찰하고 있다. 타스 연합뉴스

2022년 새해가 시작되자마자 좀처럼 조직적인 저항을 보기 힘들었던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에서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벌어졌다. 국가비상사태가 선포되고 수많은 사람이 희생되는 등 심각한 정치·사회적 불안정 상황이 발생했다. 2022년 1월2일(현지시각) 서부 지역에서 시작된 시위가 서북부 유전지대를 거쳐 알마티 등 대도시와 악타우, 자나오젠, 아티라우, 우랄스크, 코스타나이 등 전국으로 급속하게 확산됐다. 일부 군중은 총포사와 상점을 약탈하고 장갑차를 탈취해 관공서, 방송사, 공항 등을 점령했다.

1월7일까지 엿새째 이어진 시위에서 시위대와 진압 군경 사이의 물리적 충돌로 다수의 사상자가 생겼다. 격렬한 조직적 시위에 당황한 카심조마르트 토카예프(69) 정부는 러시아가 주도하는 집단안보조약기구(CSTO)에 지원을 요청했다. 1월6일, 소련 해체 이후 설립된 6개 옛소련 국가와 2개 남아시아 국가의 안보협력체인 CSTO는 러시아 공수부대까지 포함된 2500명의 평화유지군을 파견하고 카자흐스탄 군대와 합동으로 시위 진압 작전을 벌였다.

LPG 가격 급등이 촉발한 전국 시위

이번 사태의 직접적 원인은 새해 초 카자흐스탄 정부가 차량용 액화석유가스(LPG) 보조금 지급을 중단하고 가격상한제를 폐지하면서 연료 가격이 급등한 데 대한 사회적 불만이었다. 카자흐스탄 정부는 시장자유화 조치로 원활한 LPG 공급을 기대했으나 오히려 LPG 가격이 폭등함에 따라 대중적 분노를 초래했다. 2011년 격렬한 파업과 시위로 수많은 사상자를 냈던 서부의 자나오젠 지역 노동자들과 주민들이 1월4일 LPG 가격이 1ℓ당 38텡게에서 120텡게로 약 3배나 급등한 것에 분노해 도로를 차단하고 시위에 돌입하면서 이번 사태가 시작됐다. 서부 지역에선 차량용 연료의 90%, 가정용 연료의 70%를 LPG가 차지한다.

그러나 이번 사태의 근본적 원인은 다른 데 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와 이후 지속된 경제 상황의 악화가 가장 핵심적인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카자흐스탄은 원유와 가스를 비롯해 막대한 양의 천연자원을 기반으로 소련 해체 이후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뤘다. 이후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기점으로 정체 국면에 돌입했다. 특히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 이후 러시아에 대한 서방의 경제제재, 석유와 가스를 비롯한 국제 원자재 가격 하락 등으로 러시아 경제가 침체하면서 러시아에 대한 경제 의존도가 높은 카자흐스탄의 위기는 더욱 증폭됐다.

또한 약 30년의 집권 동안 자원개발 이익을 독점하고 권위주의적 통치를 지속해온 전 대통령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82)와 그 일파가 여전히 정치와 경제에 강한 영향력을 미치는 상황에 누적된 분노와 불만도 이번 사태의 핵심 원인 중 하나다. 2019년 나자르바예프는 대통령직을 후임 토카예프에게 물려주고 자신은 안보회의 의장을 수행하면서 사실상 수렴청정 체제를 구축했다. 이에 더해, 2020년 이후 2년간 코로나19 대유행 국면에서 인플레이션, 실업률 폭등, 1인당 부채 증가, 록다운(이동제한)에 따른 소득 감소로 대다수 국민의 삶의 질이 하락하는 등 총체적 난국에 처했다. 더욱이 정부는 2020년 상반기부터 국제 유가 하락으로 재정수입이 줄어 피폐한 생활을 하는 국민을 지원하는 데 심각한 한계를 드러냈다.

나자르바예프 지고, 토카예프 뜨고

현 사태는 장기화하기보다 이른 시일 안에 안정화 국면으로 전환되리라고 전망된다. 카자흐스탄 군경은 시위대에 대한 강경 진압을 지속해 전국의 주요 시설을 탈환하고, 알마티 등 대도시 시위 거점을 소탕했다. 1월11일 현재, 치안 당국의 강경 진압에 공포를 느낀 대다수 시위대가 집으로 대피했으며, 일부 급진 세력만이 시위를 지속했으나 이 역시 곧 진압됐다. 시위의 재확산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으나, 정부 당국은 CSTO 평화유지군의 지원 아래 통제력을 회복한 상태이다. 공식적으로 사망자만 168명이 넘고, 부상자는 1천 명이 넘으며, 6천 명 이상 체포되는 끔찍한 결과를 남긴 채 시위는 종료됐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카자흐스탄에선 나자르바예프와 토카예프가 권력을 공유하는 ‘양두체제’가 종식되고, 토카예프 대통령 중심의 새로운 권력구조가 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시위 사태 전까지만 해도 토카예프는 카자흐스탄 양두체제의 하위 구성원에 불과했으며, 사실상 대부분의 실권은 나자르바예프와 그 측근들이 갖고 있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노인은 물러가라!”는 이번 시위 구호가 대변하듯, 성난 군중의 표적이 나자르바예프와 그 측근들이었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히 조직적 저항의 경험이 없는 카자흐스탄에서 갑자기 전국 10여 곳에서 조직적 시위가 일어난 것은 자발적인 대중의 저항이라기보다 중앙아시아 특유의 ‘씨족 혹은 족벌 정치’(Clan Politics)식 대중 동원 양상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이번 사태의 본질은 나자르바예프 전 대통령 세력에 대한 토카예프 세력의 승리이자 권력 장악이라고 할 수 있다. 이번 사태의 전개 과정에서 토카예프 쪽은 내각 총사퇴와 동시에 나자르바예프를 안보회의 의장직에서 해임하고, 내각과 정보기구 등에서 나자르바예프 세력을 대거 축출했다. 1월8일 토카예프는 나자르바예프의 최고 측근인 전 국가안보위원회(KNB) 위원장 카림 마시모프(56)를 반역 혐의로 이틀 전 체포했다고 발표했다. 또 나자르바예프가 6년 전에 임명한 최측근인 국가안보회의의 부사무총장 아자마트 압디모무노프도 이날 해임했다. 이렇듯 흥미롭게도 토카예프 대통령은 이번 사태에서 가장 큰 수혜자였으며, 향후 자신에게 권력을 집중시킬 수 있는 정치적 환경을 조성하는 기회로 삼았다.

일각에서는 토카예프가 이번 사태를 의도적으로 조직했다는 음모론도 제기됐으나, 이를 입증할 만한 구체적 증거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토카예프의 긴박했던 CSTO 평화유지군 지원 요청 등을 고려할 때 오히려 예기치 않았던 위기를 기회로 활용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다만 토카예프가 시위 진압 이후에도 국민의 사회·경제적 요구에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성과를 보여주는 건 불가능하리라고 예상된다. 그뿐 아니라, 지배집단과 족벌 간, 족벌 내 권력투쟁도 쉽게 사그라지지 않을 수 있어 향후 불안정성은 엄존한다.

러, 유라시아 안보 수호자 이미지

러시아도 이번 사태로 여러 성과를 거두었다. 조 바이든 미국 정부가 ‘가치 외교’를 내세우면서 옛소련권 전역에서 이른바 ‘색깔혁명’이 재현될 것을 두려워한 러시아가, 2021년 대선 이후 자국과 벨라루스에서의 유사한 시위 사태와 우크라이나를 둘러싼 서구와의 대립을 중요한 안보 국면으로 판단해 이번 카자흐스탄 사태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고 할 수 있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러시아는 그동안 자국과 서구 진영 사이에 균형을 추구해온 카자흐스탄과의 관계 강화와 영향력 확대를 도모하고 있다. 러시아는 이번 사태의 해결 과정에서 2021년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 사이의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 때 손상된 CSTO의 권위를 회복했다. 그뿐 아니라 카자흐스탄에서 동맹국 지원과 군대의 신속한 철수를 실행함으로써 중앙아시아, 나아가 유라시아 지역에서 러시아만이 유일하게 각국의 주권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안보를 보증할 수 있음을 대내외에 천명했다.

또 하나 주의 깊게 볼 부분은 아프가니스탄 사태 이후 중앙아시아 지역을 둘러싸고 묘한 경쟁관계를 보여주는 중국의 태도다. 카자흐스탄은 중앙아시아를 관통하는 중국의 ‘일대일로’ 사업의 핵심이자 1700㎞에 이르는 국경을 맞댄 접경국이다. 카자흐스탄의 정정이 불안해지면 자칫 신장웨이우얼자치구로 혼란이 확대돼 위구르족 분리독립 운동으로 확산될 것을 중국은 우려한다. 이 때문에 중국은 “카자흐스탄에서 혼란을 부추겨 색깔혁명을 일으키려는 외부 세력에 단호히 반대한다”며 상하이협력기구(SCO) 차원에서 군대를 파견할 수 있음을 내비치기도 했다.

이처럼 중국이 적극적인 개입 정책으로 전환하는 것은 중앙아시아, 나아가 유라시아에서 러시아와의 주도권 경쟁의 한 측면이라고 할 수 있다. 카자흐스탄은 중국 일대일로의 주요 참여국이다. 중국과 카자흐스탄의 경계 지역인 호르고스(훠얼궈쓰)는 물류 허브이자 주요 송유관이 지나가는 지역이다. 중국은 자국의 글로벌 전략 ‘일대일로 정책’이 러시아의 군사행동으로 방해받을 수도 있음을 경계한다.

유라시아경제연합이냐 일대일로냐

무엇보다 러시아가 현 상황을 이용해 그동안 서구와 러시아(그리고 중국) 진영 간의 균형외교를 펼쳐왔던 카자흐스탄을 러시아가 주도하는 유라시아경제연합(EAEU)으로 끌어들일 경우, 카자흐스탄을 경유해 투르크메니스탄과 우즈베키스탄에서 중국으로 공급되는 석유와 천연가스에 관세를 부과하게 되면서 러시아가 이 지역에 직접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다. 중국은 카자흐스탄 석유의 17%를 구매하는 만큼, 카자흐스탄에 대한 러시아의 군사개입과 유라시아경제연합 확대는 민감한 사안이 아닐 수 없다.

이런 현실을 반영하듯, 중국의 왕이 외교부장은 러시아에 “양국은 조율과 협조를 강화해 외부 세력의 중앙아시아 국가 내정 간섭에 반대하고 색깔혁명과 ‘삼고세력’, 즉 테러리즘·분리주의·극단주의의 혼란을 방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중국이 러시아에 조율과 협력을 강조하며 카자흐스탄 사태에 대해 중국과 협의할 것을 즉각적이고 적극적으로 요구한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분명한 점은, 러시아·중국·카자흐스탄 정부의 주장대로 서구 세력과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 분리주의 집단의 조직적 개입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겠지만 그것이 현 사태의 본질은 아니라는 것이다. 설령 영향이 있더라도 민주주의를 염원하는 유라시아 대중의 열망을 왜곡해서는 안 될 것이다. 또한 미-중, 미-러 경쟁 구도 속에 한층 더 공고해진 것으로 보이는 러-중 관계가 실은 아프가니스탄 사태 이후 중앙아시아와 유라시아 지역에서 양국의 경쟁 구도로도 이어질 수 있음에 착목할 필요가 있다.

정재원 국민대 유라시아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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