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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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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하라, 연대하라”

등록 2002-05-08 00:00 수정 2020-05-02 04:22

거대한 시스템으로 정착되는 차별의 구조… 비정규직은 노동운동의 위기이자 희망

‘노동절 휴무에 관한 업무 협조전’. 노동절을 앞둔 지난 4월25일 경기도 고양시청 앞에 자리잡은 경기도노동조합 사무실. 테이블에는 경기도 내 각 시청 시설관리과장 앞으로 보내는 노동절 휴무 문건 한장이 놓여 있었다. “노동절에 공무원들이 안 쉰다고 우리 조합원들도 따라서 못 쉬게 해왔는데, 이제는 노동절 휴무를 모두 지키라고 노동조합 이름으로 보내는 겁니다. 빨간 날 쉬고 명절 때 집에 가고, 우리 조합원도 노동자니까 당연히 누려야죠.” 사람좋은 웃음을 엷게 띠며 경기도노조 김헌정(39) 위원장이 짧게 설명했다.

불합리한 처우, 이젠 따진다

비정규직 노동자 1100여명을 조합원으로 거느린 경기도노조는 지난 2000년에 설립된 지역 일반노조다. 사업장의 울타리를 뛰어넘어 의정부·고양·포천·부천 등 경기도 지역 환경미화원, 주차관리원, 하수도청소원, 도로보수원 등이 조합원으로 가입하고 있다. 조합원의 특성상 상대편 사용자는 주로 시청인데, 노조가 상대하는 사용자만 34명에 이른다. 의정부시 등 몇 군데와는 조합원의 노동조건 개선을 담은 단체협약을 맺었다.

물론 노조를 조직하는 과정에서 해고 위협 등 탄압도 많이 받았다. 하지만 이를 뚫고 비정규직 노동자 스스로 조직화에 성공한 노조로 평가받고 있다. 노조를 굳건히 뿌리내리기 위해 지금은 시청 소속 비정규직을 중심으로 힘을 쏟고 있지만 점차 사업장을 가리지 않고 경기도 안의 모든 비정규직을 포괄해 나갈 예정이다. 고양시 공원관리사업소 소속 공원관리원인 조합원 조창하(56)씨는 시청에서 그대로 월급을 받아가며 노조전임으로 일하고 있다. 그는 “하급 공무원들이 ‘언제든 해고할 수 있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니면서 개인적인 이삿짐과 벌초까지 우리한테 시켜도 해고 위협이 두려워 끽소리 한번 못했다”며 “하지만 우리가 노조에 가입한 뒤부터는 저들이 머슴부리듯 하던 것을 싹 끊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시청한테 위탁받은 민간업체들이 걸핏하면 떼먹던 조합원들의 휴일노동수당을 노조가 단체협상을 통해 받아내기로 한 것도 대표적인 “투쟁의 결과”라고 덧붙였다.

노동조합을 갖게 된 뒤부터는 사용자의 불합리한 처우도 당당하게 따지고 있다. 다른 조합원인 환경미화원 조순연(41)씨는 “민간 청소업체가 미운 털이 박힌 환경미화원의 일터를 사는 동네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일부러 배치해왔다”며 “노조가 문제를 공식 제기하자 업체 쪽이 배치 전환을 연기한 상태다”고 ‘노조의 힘’을 과시했다.

비정규직 노동자 스스로 뭉쳐 조직화하는 사례는 경기도노조 외에도 여러 군데가 있다. 빌딩 청소원, 대학교 시설노동자, 방송사 비정규직 노동자 등을 한데 묶는 부산지역 일반노조(위원장 정의헌)가 있고, 외국인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뭉친 서울경인지역 평등노조(위원장 임미령)도 있다. 모두 업종과 고용형태를 가리지 않고 특정 지역에 흩어져 있는 모든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조직대상으로 삼고 있다.

아직도 대부분은 ‘고립된 투쟁’

비정규직 문제의 해법은 크게 △비정규직이 단결해 독자노조를 건설하는 길 △정규직 노조가 비정규직을 끌어안거나 적극 연대하는 길 △비정규직 보호를 위한 법·제도를 강화하는 길로 나뉜다. 경기도노조처럼 비정규직 스스로 뭉치는 게 큰 흐름을 이루고 있지만, “노동자는 하나다”는 슬로건 아래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연대하는 사업장도 있다. 기아자동차 광주공장 사내하청노조는 정규직 노동자들과의 연대투쟁을 통해 120여명이 정규직으로 전환됐고 경남 진주의 정규직 신호제지노조는 사내하청 노동자들을 조직해 제지산업노동조합이라는 사내하청노동조합을 따로 구성했다. 이 과정에서 정규직 노조는 “원청회사가 하청과의 도급계약을 일방적으로 해지하는 식으로 하청노조를 탄압하면 끝까지 싸워 막아주겠다”며 하청 노동자들과 정규직 조합원들을 설득해나갔다.

그러나 대부분의 비정규직 노조는 한국통신 계약직노조처럼 회사의 탄압과 기존 정규직 노조의 외면 속에서 고립된 채 장기투쟁을 벌이고 있는 게 현실이다. 민주노총이 몇해 전부터 ‘비정규직 차별철폐와 정규직화’를 내걸고 비정규직 노동자를 조직하도록 지침을 내렸지만 사업장마다 정규직 조합원들의 반발에 부닥치고 있다. 민주노총 김진억 조직2국장은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의 갈등을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노동운동의 가장 큰 숙제”라며 “대공장 중심의 노동운동에서 벗어나 비정규직 노동자를 조직하고 차별을 철폐하는 데로 나아가지 않으면 노동운동이 큰 위기를 맞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정규직이 빠진 자리를 비정규직이 끊임없이 채우고 있는 현실에서 비정규직을 끌어안지 못하는 노동운동은 조합원 수 감소와 노조의 교섭력 약화를 겪으면서 위기를 맞을 수밖에 없다.

현대자동차 울산공장에서 만난 한 사내하청 노동자는 “현대자동차노조가 파업해 일을 제쳐도 우리 하청 노동자들이 있기 때문에 공장은 돌아가고, 그래서 파업도 예전처럼 힘있는 무기가 되지 못한다”며 “우리 비정규직을 노조가 끌어들이지 않고서는 정규직조차 힘이 부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비정규직을 버리면 기존 정규직 노조도 맥을 못 춘다는 얘기다. 현대자동차노조 이상도 실장 역시 “비정규직이 급증하면서 이제 비정규직 없이는 공장 가동이 어려운 단계까지 와버린 상태”라며 “비정규직을 방치한 채 정규직 조합원만을 위한 노조는 한계에 봉착할 것”이라고 털어놨다.

그럼에도 노동자 내부의 차별과 격차는 연대와 단결을 어렵게 만들고, 이는 다시 갈등과 분열을 낳아 노동운동을 위기로 몰아넣고 있다. 정규직 고용안정을 위해 현대자동차노조가 사내하청 노동자 비율(16.9%) 유지를 회사 쪽과 합의한 대목이 이를 잘 보여준다. 이 고용안정협약은 기존의 정규직 자리까지 비정규직으로 채워넣는 문을 정규직 노조 스스로 열어준 꼴이 되고 말았다는 점에서 “문전옥답을 내주고 자갈밭을 대신 받은 격”이나 다름없다. 남성-여성 노동자, 대기업-중소기업 노동자의 차별과 마찬가지로 정규직-비정규직 노동자도 늘 분열의 소지를 안고 있다. 그러나 더 심각한 건 노동자 내부의 극단적인 차별과 배제의 구조가 거대한 시스템으로 정착되고 있다는 점이다.

‘영원한 정규직’은 없다

비정규직 급증과 열악한 노동조건은 정규직 노동자의 고용과 노동조건도 함께 악화시킨다. 비정규직에 대한 정리해고가 끝나고 나면 “값싸고 쉽게 부려먹을 수 있는 비정규직으로 이참에 다 갈아버리겠다”는 회사 쪽의 비정규직화 공세가 어김없이 들어오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비정규직은 ‘외면할 수 없는 또 다른 나’다. 자본 앞에 영원한 정규직, 영원한 직영은 없다. 비정규직을 외면한 대기업 정규직 노조의 경제주의는 ‘전투에서의 승리’를 누릴 수 있을지 몰라도, 노동자들이 모래알처럼 흩어지면서 정작 ‘전쟁에서는 패배’할 공산이 크다. 한국비정규노동센터 박영삼 정책국장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은 정규직과 대기업 노동자의 기득권을 위협하지 않는 선에서만 인정되고 있는 게 현실”이라며 “상층부 노동자들의 이익을 털끝 하나 안 건드리고 비정규직의 처지를 개선하는 일이 가능한가”라고 되물었다.

비정규직은 노동운동의 위기이자 동시에 희망이기도 하다. 비정규직의 ‘삶의 불안’을 노조로 조직화하면 노동의 미래를 열어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금속노조 울산지부 이광재 조직부장은 “비정규 노동자는 노다지”라며 “건지는 대로 조직화할 수 있는 이 금맥을 어떻게 캐느냐가 노동운동의 관건”이라고 말했다.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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