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10월, 러시아 해군 탱커 선박 TNT-25호가 핵잠수함에서 생긴 저준위 핵폐기물 900t을 싣고 동해로 출발했다.1 목적지는 일본 홋카이도섬 서쪽 540㎞ 떨어진 바다. 이곳에 핵폐기물을 버릴 예정이었다. 그러나 러시아 해군 선박이 도착했을 때 환경보호단체 그린피스의 감시선 페가수스호가 기다리고 있었다. 러시아는 감시선의 접근을 따돌리고 핵폐기물을 방출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방출 장면은 전세계에 공개됐다.
그러자 같은 바다를 끼고 사는 이웃 나라 일본 국민이 분노했다. 일본 언론도 러시아의 행위가 환경에 대한 경각심이라곤 전혀 없는 행동이라고 비판했다. 일본 정부도 러시아가 핵폐기물을 일본 바다에 버리는 행위는 양국 상호 불신을 더욱 악화시킬 거라고 경고했다.
막상 일본 정부의 항의에 놀란 것은 러시아였다. 그때까지 일본과 미국 또한 핵폐기물을 바다에 버렸다. 원자력 의존도가 높았고, 육지에 핵폐기물 저장소가 부족했던 일본은 국제협약에서 저준위 핵폐기물 바다 투기를 금지하는 것조차 반대했다. 사실 당시 러시아는 이미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1997년까지 핵폐기물 해양 방출 일정을 통지한 상태였다. 더욱이 해양 방출 전인 그해 5월, 일본에 해양 투기 대신 지상 핵폐기물 저장 시설을 지을 돈을 요청했다.
일본 정부는 자기들 앞바다에 다른 나라가 핵폐기물 900t을 방출하자 생각을 바꿨다. 그리고 그린피스 등이 주도해 핵폐기물 해양 투기를 원칙적으로 금지하는 국제협약(런던협약)이 나오자 일본도 해양 방출 금지로 돌아섰다. 그때까지 협약에서 핵폐기물 해양 투기를 법적으로 금지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약 28년이 지난 2021년, 일본의 손가락은 자신을 향하고 있다. 러시아를 비춘 거울 앞에 일본이 서 있다. 러시아의 900t 핵폐기물에 분노했던 일본은 4월13일, 후쿠시마 방사능 사고 오염수 약 137만t을 바다에 방출하기로 공식 발표했다. 일본의 방출은 배에서 버리는 것이 아니기에 런던협약이 아닌 국제해양법협약을 적용한다.
그날 스가 요시히데 총리 관저는 누리집에 한 장이 안 되는 짧은 발표문을 올렸다. 총리가 참석한 오염수 대책 관계 각료 등 회의에서 오염수 해양 방출이 ‘현실적이라고 판단’하고 기본방침으로 정했다는 내용이었다. 다핵종제거설비에서 처리한 뒤 물에 희석해 안전성을 확보하고 2년의 준비를 거쳐 방사능 오염수를 바다에 버리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총리 관저의 공식 발표문에 방출할 양은 공개하지 않았다.
가장 돈이 적게 든 방식이 ‘현실적’그리고 28년 전과 같이 돈 문제, IAEA 그리고 미국이 다시 등장한다(일본의 오염수 배출 결정에 존 바이든 미국 행정부는 “국제적으로 수용되는 핵 안전기준에 부합하는 접근법을 채택한 것으로 보인다”며 지지 뜻을 밝혔다). 러시아가 1억달러의 핵폐기물 처리 예산을 탓하며 핵폐기물을 바다에 버렸듯이, 일본은 방사능 오염수를 처리하는 방법으로 검토한 5가지 대안 중 가장 돈이 적게 드는 방식을 ‘현실적’이라며 선택했다. 일본 정부의 ‘다핵종제거설비 등 처리수의 취급에 관한 소위원회’가 2020년 2월 낸 보고서는 91개월에 걸쳐 바다에 버릴 경우 34억엔(약 349억원)이 든다고 계산했다. 이는 98개월의 공사와 912개월의 감시가 필요하다고 본 지하 매설 대안의 2431억엔(약 2조5천억원)의 1.3%밖에 되지 않는다.
28년 전 러시아로부터 핵폐기물 방출을 통보받는 역할만 했던 IAEA는 이번에는 일본의 방사능 오염수 폐기 방식이 ‘국제 관행’에 부합한다고 발표했다. 오랫동안 핵폐기물을 바다에 버린 미국은 일본의 결정을 환영했다.
방사능 오염수에는 한-일 관계의 본질적 모순이 비친다. 일본은 가장 직접적인 이해 관계국인 한국의 당사자성과 피해자성을 부인했다. 일본은 IAEA와 미국과만 대화했다. 현재 알려진 바로는 한국에 자신의 해양 방류 결정의 구체적 근거를 설명하지도, 자료를 제공하지도 않았다. 나는 일본의 다음 단계는 한국의 일본산 수산물 수입 제한을 해제하려고 다시 시도할 것이라고 생각한다(2011년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한국은 후쿠시마 주변에서 잡힌 모든 수산물 수입을 금지함). 일본의 기득권자들은 후쿠시마 원전 사고라는 근본적 질문에 답하지 않은 채 ‘부흥’이라는 장식표를 붙이려 한다. 이를 위해 일본은 한국이 ‘스스로 피해를 호소할 자격이 있는 국가’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대신 IAEA와 미국의 논리를 한국이 따라야 하고, 중국·북한에 맞서는 방파제 역할을 한국에 요구할 것이다. 한국의 자율적 판단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일본 옆에 IAEA와 미국이 버티고 있다.
일본이 공언한 앞으로 2년의 방출 준비 기간 중 무엇을 해야 하는가? 우리는 끊임없이 일본에 묻고 물어야 한다. 이른바 처리수가 안전하다는 근거는 무엇인가? 한국의 우려를 해소할 만한 자료를 달라! 일본은 처리수 안전성을 판단할 한국의 독자적 능력을 부인할 것이다. 한국이 판단하기에 필요하고 충분할 정도의 구체적 근거와 자료를 따로 제공하지 않을 것이다. 대신 IAEA와 미국의 틀 안에 한국이 머물도록 시도할 것이다.
그러나 일본과 한국이 가입한 유엔해양법협약에 따르면 일본은 해양자원을 보호·보존할 일반적 의무가 있다. 이웃 나라에 해를 주지 않음을 보장해야 한다. 그리고 환경영향평가를 해야 하며, 한국과 필요한 협의에 나서야 한다.
지치지 않고 일본에 안전성 자료를 요구하는 일이 곧 국제해양법재판소에서 방출 중단 임시구제 명령을 받아내는 소송을 준비하는 과정이다(문재인 대통령은 4월14일 일본의 오염수 방류를 막기 위해 국제해양법재판소에 제소하는 방안을 검토할 것을 지시했다). 유엔해양법협약은 회복 불가능한 손해가 발생할 위험이 있을 때 사전적 임시구제 명령을 소송으로 얻을 수 있게 한다.
지금까지의 일본 행동을 볼 때, 일본이 핵폐기물을 방출하기 전에 일본을 제소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재판 과정에서 우리에게 신뢰를 주고 소통했는지 물을 것이다. 그동안 일본이 한국에 준 오염수 자료가 무엇인지 국민에게 공개하는 것이 신뢰와 소통의 출발점이다. 또한 IAEA를 넘어서는 아시아 원자력 안전 기구를 창설하는 변화로 이어져야 한다.
송기호 통상법 전문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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