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걸음이 빨라졌다. 몰려든 취재진과 인파를 뚫고 내달리는 그의 얼굴이 붉게 상기됐다. 마침내 검문소 들머리의 빛바랜 노란색 차단막이 삐걱이며 열렸다. 가족과 얼싸안은 그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축하의 노래와 구호 소리가 울려퍼졌다. 영국의 공영방송 《BBC》 등 외신이 동영상으로 전한 팔레스타인 저항운동가 아헤드 타미미(17)가 석방된 7월29일의 풍경이다.
애초 하루 전에 석방돼야 했다. 하지만 7월28일은 토요일, 유대인의 휴일인 안식일이었다. 하루 늦춰진 석방도 순탄치 않았다. 7월29일 아침 이스라엘 당국은 아헤드와 어머니 나리만, 사촌 누르 타미미가 요르단강 서안지구 북쪽에 있는 검문소를 통해 석방될 것이라고 통보했다. 집에서 차량으로 1시간30분을 달려야 하는 거리다.
가족과 친척들이 그곳에 도착했을 때 이스라엘 당국은 다시 정반대 쪽에 있는 검문소로 가라고 했다. 2시간을 차로 달려야 하는 곳이다. 전화는 두 차례 더 왔다. 아헤드 가족은 두 차례 더 길을 되짚어가야 했다. 아헤드의 이모 마날은 7월31일 미국의 진보적 독립언론 와 한 인터뷰에서 “이스라엘 당국은 아무 설명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자기들 하고 싶은 대로 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아버지도 10여 차례 투옥 ‘가문의 저항’</font></font>아헤드는 2001년 1월31일 태어났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자리한 요르단강 서안지구 라말라에서 서북쪽으로 20㎞ 떨어진 작은 마을 나비 살레가 조상 대대로 살아온 땅이다. 타미미 집안이 그곳에 터를 잡은 건 17세기로 알려져 있다. 마을 주민 600여 명 대부분은 혈연이나 혼인으로 연결된 친척이다.
팔레스타인 풀뿌리 저항운동가인 아버지 바셈 타미미도 그곳에서 나고 자랐다. 1967년 6월5~10일 이른바 ‘6일 전쟁’ 직후 이스라엘이 요르단강 서안 지구를 점령했을 때, 생후 10주 된 갓난아기 바셈은 한동안 가족과 동굴에서 숨어 지내야 했다. 그가 10살 되던 해인 1977년 마을 곁에 할라미시 유대인 불법 정착촌이 들어섰다. ‘싸움’의 시작이었다.
바셈은 지금까지 모두 10여 차례 체포와 투옥을 경험했다. 이스라엘 당국이 기소와 재판 절차 없이 ‘위험인물’을 무기한 억류하는 이른바 ‘행정구금’으로 3년간 옥살이도 했다. 2009년 나비 살레의 유대인 정착촌 주민들이 마을 수원지를 빼앗고 정착촌 확대를 시도했다. 이후 바셈은 금요성일(이슬람 국가의 휴일)마다 항의 시위를 주도해왔다. 아헤드 타미미도 어려서부터 이 시위에 가담했다.
“(붙잡힌) 우리 오빠는 어디로 데려갔느냐?” 2012년 11월2일 깡마른 11살 아헤드는 중무장한 이스라엘군 병사에게 주먹을 들어올리며 이렇게 외쳤다. 당찬 그 모습이 유튜브로 공개되면서, 그는 일약 유명 인사가 됐다. 2015년에도 부러진 팔에 석고붕대를 감은 사촌동생을 체포하려는 이스라엘군에 맞서는 모습이 공개되면서 유명해졌다.
지난해 12월15일의 일이다. 금요성일을 맞은 나비 살레 주민들이 주례 시위에 나섰다. 마을 어귀를 가로막고 선 이스라엘군을 향해 여느 때처럼 돌멩이를 던졌다. 이스라엘군은 고무 코팅된 금속 탄환으로 응수했다. 타미미의 15살 난 사촌동생 모하메드 타미미가 조준 발사된 탄환에 머리를 맞고 쓰러졌다. 그는 6시간에 걸친 수술을 받고 며칠 뒤에야 의식을 회복했다.
아헤드는 집 마당까지 들어온 중무장한 이스라엘군 2명에게 다가섰다. “당장 나가라!”고 외치며, 자기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병사에게 발길질을 하고, 뺨을 올려쳤다. 사촌과 어머니까지 거들었다. 두 병사는 대응하지 않았다. 당시 상황을 촬영한 영상은 페이스북을 통해 삽시간에 전세계로 퍼져나갔다. 사건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로부터 나흘 뒤인 19일 밤 이스라엘군이 아헤드의 집을 급습했다. 아헤드와 어머니 나리만 등이 한꺼번에 체포됐다. 13일 뒤 아헤드는 폭행과 선동, 투석 등 모두 12가지 혐의로 기소돼 군사법원에 넘겨졌다. ‘점령군을 욕보인 죄’였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구금 기간 고졸 검정시험 통과</font></font>미성년인 아헤드를 군사재판에 넘긴 것을 두고 국제적인 비난 여론이 거세졌다. 비공개 조사와 재판 과정에서 성추행 의혹까지 불거졌다. 이스라엘 당국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헤드의 체포를 부른 사건이 벌어지던 날 총탄에 쓰러졌다 가까스로 회복했던 사촌동생 모하메드는 사건 발생 두 달여 만인 올해 2월 이스라엘군에 체포됐다 풀려났다. 13살 때 처음 체포돼 3개월간 감옥에 갇혔던 그다. 이스라엘 당국은 지난 5월에도 그를 집 앞에서 납치하듯 체포해 군부대에서 흠씬 두들겨 팬 뒤 팔레스타인 당국에 넘겼다. 6월6일엔 갓 20살을 넘긴 아헤드의 사촌오빠 에즈 타미미가 이스라엘군과 투석전 중 뒤통수에 총을 맞아 목숨을 잃었다.
수감 중인 아헤드에 대한 이스라엘 쪽의 독설도 불을 뿜었다. 종교주의 극우정당인 ‘유대인의 집’(하마이트 하예후디) 소속인 바자렐 스모트리츠 이스라엘 의회 의원은 4월21일 트위터에 올린 글에서 “아헤드 타미미가 지금 감옥에 있는 것은 매우 슬픈 일이다. 적어도 그의 무릎에라도 총을 쐈어야 했다. 그랬다면 평생 가택연금 상태로 지낼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혐오의 극치였다.
국제사회의 관심과 압박이 집중되던 3월24일 아헤드와 어머니 나리만 등은 유죄를 인정하는 조건으로 감형을 받기로 이스라엘 당국과 합의했다. 형기는 8개월로 정해졌다. 구금 기간 아헤드는 고졸 검정시험을 통과했다. 그는 석방되자마자 영국 일간지 과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여성 전용 수감시설에서 동료 수감자들과 함께 긴 시간 법률 책을 읽었다. 우리는 감옥을 학교로 바꿨다. …신께서 허락하신다면, 법률을 공부하고 싶다. 팔레스타인 민중을 탄압한 이스라엘의 죄상을 형사재판정에서 분명히 가리고 싶다. 유능한 법률가가 돼 우리나라의 권리를 되찾고 싶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다음 생엔 프로 축구선수가 꿈</font></font>앳된 소녀는 투쟁으로 단련됐다. 투옥 경험은 그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 아헤드는 “체포와 투옥은 정말 힘든 경험이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말로 표현할 길이 없다. 하지만 그 경험이 내 삶에 가치를 더해줬고, 좀더 성숙하고 의식 있게 나를 바꿔줬다”고 말했다. 그는 조사 과정에서 불거진 성추행 의혹에 대해선 “나한테만 그런 것도 아니다. 우연히 그런 것도 아니다. 그게 그들의 방식일 뿐”이라고 했다. 삶이 달랐으면 꿈도 달랐을까? 그는 “다음 생에선 프로 축구선수가 되고 싶다”고도 했다.
팔레스타인 인권단체 ‘아다미어’가 내놓은 자료를 보면, 지난해 이스라엘 당국이 체포한 팔레스타인 미성년자는 1467명에 이른다. 올해 4월 말 현재 이스라엘 당국이 구금하고 있는 팔레스타인 미성년자는 300명이 넘는다. 이 가운데 65명은 16살 이하다. 국제어린이보호기구(DCI) 팔레스타인 지부가 지난해 내놓은 자료를 보면, 해마다 500~700명이 체포된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전화신청▶ 1566-9595 (월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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