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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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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북미’는 신뢰를 먹고 자란다

북–미 협상 진전의 대전제는 적대관계 해소 위한 신뢰 구축…

핵 없어도 체제 걱정 안 해야 비핵화 가능
등록 2018-07-17 16:46 수정 2020-05-03 04:28
세 번째 평양을 방문한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왼쪽)이 7월7일 김영철 북한 노동당 부위원장과 회담에 앞서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세 번째 평양을 방문한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왼쪽)이 7월7일 김영철 북한 노동당 부위원장과 회담에 앞서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두 손이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 굳게 쥔 주먹을 펴야 상대의 손을 잡을 수 있는 법이다. 6·12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 이후 북-미 간 첫 고위급회담이 7월6~7일 평양에서 열렸다. 본격적인 협상의 출발이다. 회담 직후 나온 북-미 양쪽의 반응은 차가웠다. 일부에선 “벌써부터 삐걱거리는 것 아니냐”는 지적까지 나온다. 적대와 반목, 불신과 적의에 차 보낸 세월이 70년이다. 출발이라 그렇다.

“친애하는 대통령각하, 24일전 싱가포르에서 있은 각하와의 뜻깊은 첫 상봉과 우리가 함께 서명한 공동성명은 참으로 의의깊은 려정의 시작으로 되었습니다. 나는 두 나라의 관계개선과 공동성명의 충실한 리행을 위하여 기울이고있는 대통령 각하의 열정적이며 남다른 노력에 깊은 사의를 표합니다.”

‘트럼프 각하’로 부른 김정은 친서
전날 회담에서 김 부위원장이 폼페이오 장관에서 전달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서한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트위터에 공개했다. 연합뉴스

전날 회담에서 김 부위원장이 폼페이오 장관에서 전달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서한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트위터에 공개했다. 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7월13일 이른 새벽(한국시각) 트위터 계정으로 공개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서한은 이렇게 시작된다. 7월6일 북-미 고위급회담 과정에서 김영철 북한 노동당 부위원장이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에게 전달한 것으로 전해진다. 4개 문장으로 이뤄진 짤막한 서한에서 김 위원장은 트럼프 대통령을 언급할 때마다 ‘각하’라는 극존칭을 썼다.

“조미사이의 새로운 미래를 개척하려는 나와 대통령각하의 확고한 의지와 진지한 노력, 독특한 방식은 반드시 훌륭한 결실을 맺게 될것이라고 굳게 믿고있습니다. 대통령 각하에 대한 변함없는 믿음과 신뢰가 앞으로의 실천과정에 더욱 공고해지기를 바라며, 조미관계개선의 획기적인 진전이 우리들의 다음번 상봉을 앞당겨주리라고 확신합니다.”

정상 간 주고받은 서한을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공개한 것은 분명 이례적이다. 정작 눈여겨볼 대목은 따로 있다. 첫째, 새로운 북-미 관계의 미래를 개척하기 위한 ‘독특한 방식’이다. 둘째, 북-미 관계가 획기적으로 진전되면 ‘다음번 상봉’이 앞당겨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풀어보자.

방식의 ‘독특성’은 정상회담 성사 과정을 보면 알 수 있다. 두 정상이 직접 나서 실무 접촉을 최소화하며 회담까지 이어졌다. 회담에서 두 정상은 앞으로의 협상 원칙을 큰 틀에서 제시했다. 실무 협상에서 ‘획기적 진전’을 이룬다면, 두 정상이 ‘다음번 상봉’을 통해 협상의 동력을 더욱 키울 수 있다. ‘최상의 시나리오’다. 첫 고위급회담의 결과와는 일정한 거리가 있다. 그런 점에서 회담 직후인 7월7일 북한 외무성 대변인이 발표한 담화문을 꼼꼼하게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북한의 의중이 섬세하게 담겨 있기 때문이다.

외무성 대변인은 담화에서 회담에 앞선 북쪽의 기대감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신뢰 조성에 도움이 되는 건설적인 방안을 가지고 오리라고 기대”했으며, “그에 상응한 그 무엇인가를 해줄 생각도 하고 있었다”는 게다. 하지만 미국 쪽이 “일방적이고 강도적인 비핵화 요구만” 들고 왔고, 이 때문에 “실로 유감스럽기 그지없다”고 외무성 대변인은 밝혔다.

담화문을 보면, 북쪽이 이번 회담에서 제시한 의제는 북-미 관계개선을 위한 다방면적 교류, 정전협정 체결 65돌(7월27일)을 계기로 종전선언 발표, 비핵화 조치의 하나로 탄도미사일 엔진(대출력발동기) 시험장 폐기, 미군 유해 발굴을 위한 실무 협상 등 크게 네 가지다. 무엇보다 종전선언에 대해선 “조선반도에서 긴장을 완화하고 공고한 평화보장 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첫 공정인 동시에 조-미 사이의 신뢰 조성을 위한 선차적인 요소”라고 강조했다.

비장함 느껴진 외무성 담화

외무성 대변인은 회담 결과에 대해 “극히 우려스러운 것”이라고 밝혔다. 또 “우리의 기대와 희망은 어리석다고 말할 정도로 순진한 것이었다”고도 표현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신뢰심을 아직 그래도 간직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미국 중앙정보국(CIA) 분석관 출신인 로버트 칼린 전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 선임 정책보좌관이 7월9일 한반도 전문매체 에 기고한 글에서 외무성 담화를 두고 “분노라기보다는 일종의 비장함이 느껴졌다”고 촌평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그럼 북한이 원하는 건 뭘까? 다시 담화 내용을 보자.

“조-미 사이의 뿌리깊은 불신을 해소하고 신뢰를 조성하며, 이를 위해 실패만을 기록한 과거의 방식에서 대담하게 벗어나 기성에 구애되지 않는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풀어나가는 것, 신뢰 조성을 앞세우면서 단계적으로 동시행동 원칙에서 풀 수 있는 문제부터 하나씩 풀어나가는 것이 조선반도 비핵화 실현의 가장 빠른 지름길이다.”

이에 대한 미국 쪽 반응은 7월8일 일본 도쿄에서 열린 한·미·일 3개국 외무장관 회담에 이은 기자회견에서 나왔다. 회견에선 미국 쪽이 6·12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사용을 극도로 피해온 ‘제재’란 말이 모두 11차례 등장했다. 폼페이오 장관은 모두발언과 질의응답 과정에서 각각 4차례씩 모두 8차례 썼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과 고노 다로 일본 외무상이 모두발언에서 각각 한 차례씩, 또 기자가 질문하는 과정에서도 한 차례 ‘제재’란 말을 썼다. 북-미 관계가 삐걱거리고 있음을 상징하는 것일까? 폼페이오 장관의 발언을 종합하면, 딱히 그런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폼페이오 장관은 회견에서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의 합의사항을 평화로운 북-미 관계 수립, 북한에 대한 체제안전 보장, 비핵화 등 세 가지로 요약했다. 그는 이 세 가지가 “병렬적, 동시적”으로 진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체제안전 보장과 북-미 관계개선에서 진전이 이뤄지는 동안 비핵화 부문에서도 진척이 있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풀어야 할 과제와 이를 위한 해법에서 외무성 대변인의 담화 내용과 고스란히 맞닿아 있다. 폼페이오 장관은 ‘제재’와 관련해선 “비핵화가 완료될 때까지 제재는 지속될 것”이란 말만 되풀이했다. 원칙을 새삼 강조한 셈이다.

신뢰 구축은 ‘안보 대 안보’의 교환
1998년 10월9일 오전 한국전쟁 때 북한에서 전사한 미군 유해 5구를 판문점에서 넘겨받은 유엔사 장병들이 운구하고 있다. 이정우 선임기자

1998년 10월9일 오전 한국전쟁 때 북한에서 전사한 미군 유해 5구를 판문점에서 넘겨받은 유엔사 장병들이 운구하고 있다. 이정우 선임기자

“신뢰는 위에서 아래로 부과해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한반도는 물론이고 전세계적으로도 수많은 포괄적 합의가 이뤄졌지만, 실무선에서 상호간 신뢰가 없어 합의가 깨지거나 이행이 지지부진한 사례가 숱하다. 따라서 최고위급에서 선언적 합의가 이뤄지더라도, 실무진 차원에서 확신과 믿음, 투명성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이 이뤄져야 한다. 최고위급 차원의 외교가 결실을 맺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필요한 조처다.”

나토 사령부에 딸린 군비 통제·군축·비확산센터 연구원인 안보전문가 맷 코다는 지난 7월6일 기고문에서 본격적인 북-미 협상에 앞선 신뢰 구축 조치의 중요성을 이렇게 강조했다. 4·27 남북 정상회담과 6·12 북-미 정상회담이란 두 가지 ‘최고위급의 선언적 합의’가 화해와 협상의 문을 열었다. 두 정상회담을 통해 북한의 비핵화, 북한에 대한 체제안전 보장, 새로운 남북관계와 북-미 관계에 대한 큰 틀의 합의가 이뤄졌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세 가지는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있다. 코다 연구원은 이렇게 지적했다.

“핵무기가 없어도 체제안전을 걱정할 필요가 없어야 북한의 비핵화가 가능하다. 아무도 자신을 카다피처럼 만들어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김정은 위원장이 확신할 수 있어야 한다. 한-미와 동맹국은 북한이 결국 비핵화 약속을 지킬 것이라고 믿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신뢰가 필요하다.”

북-미 협상이 본궤도에 오른 지금, 신뢰 구축은 협상과 똑같은 방식으로 이뤄져야 한다. 이른바 ‘안보 대 안보’의 교환 말이다. 길은 두 갈래다. 이른바 ‘재래식 위협’을 낮추기 위한 과정은 ‘새로운 남북관계’ 차원에서 다뤄질 필요가 있다. 군사 당국 간 회담으로 남북 군축 협상에 나서야 한다. 이를테면 서울과 수도권을 위협하는 장사정포 후방 배치를 북쪽이 선택한다면, 남쪽 역시 이에 상응하는 조처를 내놓아야 한다는 얘기다. 1953년 7월27일 전쟁이 멈춰선 이후 지금껏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이다.

회담 연기는 북한의 ‘노쇼’?
'신뢰가 먼저다.' 지난 6월 12일 싱가포르에서 열린 북-미 정상회담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왼쪽)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얘기를 나누고 있다. 연합뉴스

'신뢰가 먼저다.' 지난 6월 12일 싱가포르에서 열린 북-미 정상회담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왼쪽)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얘기를 나누고 있다. 연합뉴스

비핵화를 통한 핵 위협 제거 과정은 ‘새로운 북-미 관계’에 달려 있다. 앞서 확인한 대로, 원칙에 대한 북-미 간 이견은 없는 상태다. 다만 서로가 가진 시간표가 다를 뿐이다. 북한이 종전선언 등 관계개선을 급선무로 보지만, 미국은 비핵화로 가는 가시적인 성과에 목말라 있다. 북-미의 시간표를 ‘동기화’하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이 또한 ‘신뢰’의 문제다. 앞서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와 스위스 안보연구센터(CSS)는 2007년 6월 공동으로 펴낸 ‘한반도에서 신뢰를 구축하기 위한 도구함’이란 제목의 보고서에서 “비핵화는 짧은 기간에 이뤄질 수 있는 게 아니다. 따라서 ‘돌이킬 수 없는 비핵화’를 이룬 뒤가 아니라, 그에 앞서 신뢰 구축을 위한 진지한 노력이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에서 합의한 한국전 참전 미군 포로·전사자 유해 송환을 위한 북-미 접촉이 7월12일 예정대로 열리지 못했다. ‘예약해놓고 사전 통보 없이 나타나지 않는 것’을 뜻하는 ‘노쇼’라는 표현이 한국과 미국의 언론에서 쏟아졌다. 북한이 본격적으로 ‘판 깨기’에 나선 것 아니냐는 억측도 나왔다.

아니었다. 7월13일 정부 안팎의 설명을 종합하면, 북은 예정된 회담 당일 오전 서해 군 통신선을 통해 ‘유엔사령부와 직접 연결하는 전화회선을 다시 연결할 테니 기술적 준비를 해달라’는 뜻을 남쪽에 전달해왔다. 인민군 판문점 대표부와 유엔사를 연결하는 직통전화는 한-미 연합 키리졸브 훈련을 이유로 북한이 일방적으로 정전협정 무효화를 선언한 2013년 3월11일 이후 끊긴 상태였다.

북쪽은 직통전화가 연결되자 ‘준비 부족’을 이유로 만나기 어렵다는 뜻을 밝힌 뒤, 회담의 격을 ‘장성급’으로 높여 7월15일 군사회담을 열자고 제안한 것으로 전해졌다. ‘노쇼’가 아닐뿐더러, 북-미 군사 당국 간 끊겼던 연락 채널 복원과 ‘장성급’ 소통 채널까지 마련할 수 있게 됐다는 얘기다.

위기 상황에서 직접 대화할 수 있는 수단을 마련하는 것은 군사적 긴장을 낮추기 위한 이른바 ‘운용적 군비 통제’의 핵심이다. 남북이 4·27 정상회담에 앞서 서둘러 끊겼던 판문점 연락 채널과 서해 군 통신선 복원에 나선 것도 이 때문이다. 북-미 군사 당국 간 연락·소통 채널 확보는, 한-미 연합 군사훈련 중단과 함께 신뢰 구축을 위한 중요한 전기로 삼을 수 있다. 종전선언 협상을 위해서도, 북-미 군사 당국 간 소통은 긴요할 수밖에 없다. 이만하면, 출발치곤 괜찮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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