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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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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신조의 ‘원전 역주행’

‘2030년 원전 제로’ 계획 뒤엎고 원자력 비율 22%까지 높이기로…

3·11 참사로도 ‘탈핵’ 실패한 일본 사회
등록 2017-10-13 00:04 수정 2020-05-03 04:28
원전 재가동에 반대하는 일본 시민들이 2015년 8월 가고시마현 센다이 원전 앞에서 “재가동을 멈추라”며 항의집회를 열었다. 연합뉴스

원전 재가동에 반대하는 일본 시민들이 2015년 8월 가고시마현 센다이 원전 앞에서 “재가동을 멈추라”며 항의집회를 열었다. 연합뉴스

2011년 3월11일 발생한 도쿄전력의 후쿠시마 제1원자력발전소 참사는 일본뿐 아니라 전세계에 심대한 영향을 끼친 인류사적 사건이었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수많은 사람이 고향을 등져야 했고, 이 과정에서 1천 명 넘는 사람들이 피난 생활로 인한 고단함을 이기지 못하고 사망했다.

처참한 원전 사고를 겪은 일본 사회는 ‘탈핵’이란 결단을 내리는 데 성공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아니요’다. 2017년 7월 현재 일본에선 원자로 5기가 정상 가동 중이고, 2016년 현재 일본 전체 에너지 생산에서 원자력 비율은 4~5%로 추정된다. 일본 정부는 이 비율을 2030년까지 20~22%로 끌어올릴 계획이다. 3·11 원전 참사 이후 6년 동안 일본에선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자민당에 정권 내주며 ‘탈핵 구상’도 뒤집혀

3·11 참사를 직접 겪은 민주당 정권의 간 나오토 전 일본 총리는 2011년 7월 “원전에 의존하지 않는 사회를 목표로 한다”며 탈핵을 결단했다. 당연히 경제단체연합회(게이단렌) 등 일본 재계에선 ‘경제적 효율성’을 이유로 “조속히 원전을 재가동해야 한다”고 맞섰다.

이같은 반대 의견에 부딪힌 민주당 정권의 선택은 ‘절충론’이었다. 간 총리의 후임인 노다 요시히코 전 총리는 2012년 9월 “2030년대까지 원전 가동 제로를 목표로 하겠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왜 하필 2030년이었을까. 2030년대는 일본 원전 대부분이 ‘40년’으로 정해진 수명을 다하는 시점이다. 당장 탈핵을 실현하기는 어려우니 남은 원전을 수명을 다할 때까지 사용하고 새 원전을 짓지 않음으로써 자연스럽게 탈핵을 유도하겠다는 계획이었다. 노다 정권의 이 계획은 지난 6월19일 부산 기장군 고리원전 1호기 영구정지 기념행사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밝힌 “준비 중인 신규 원전 건설 계획은 전면 백지화한다. 원전의 설계수명을 연장하지 않는다”는 ‘탈핵 구상’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일본 정부는 원전 감시·감독을 대대적으로 강화하고 안전 기준을 상향 조정했다. 일본 정부는 2012년 9월 정부로부터 독립성을 강화한 원자력규제위원회(규제위)를 발족시켰고, 2013년 7월 3·11 원전 참사의 교훈을 반영한 ‘신 규제기준’도 만들었다. 이에 따라 일본 전력회사들은 일단 모든 원자로의 가동을 멈춘 뒤 ‘신 규제기준’에 따른 심사를 받게 됐다. 규제위의 새 기준을 통과한 원자로만 가동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일본 시민사회는 민주당 정권의 탈핵 정책을 적극 지지했다.

그러나 2012년 말을 경계로 상황이 급변한다. 그해 12월 중의원선거에서 민주당이 참패하며 자민당에 정권을 내줬기 때문이다. 재집권에 성공한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점진적 탈핵’을 목표로 내건 민주당 정권의 판단을 근본부터 뒤집는다.

간 나오토 전 총리 “아베는 망국의 총리”

‘원전 재가동’은 아베 총리의 철학이었다. 일본 언론인 오시타 에이지는 2013년 출판된 저서 에서 원전 재가동에 대한 아베 총리의 목소리를 날것 그대로 소개했다. 아베 총리는 이 책에 담긴 인터뷰에서 “원자력발전을 안정적 기저부하(base load) 전원으로 삼는 것은 일본의 에너지 사정을 생각할 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전쟁 전 일본은 미국에 석유 등 에너지를 의존하고 있었다. 미국이 (일본에) 석유 수출을 금지한 것이 큰 원인의 하나가 되어 전쟁에 돌입했다”고 말했다. 에너지 정책은 한 국가의 운명을 결정지을 수도 있는 안보적 관점에서 볼 필요가 있다는 견해였다.

아베 총리의 뜻에 따라 일본 정부는 2014년 4월 “원자력은 에너지 수급 구조의 안정성에 기여하는 중요한 ‘기저부하’ 전원”이라는 내용이 포함된 ‘에너지 기본계획’을 발표했다. 7월에는 2030년에 일본 사회가 화력·수력·원자력·재생가능에너지 등 다양한 에너지원의 비율을 얼마로 유지해야 하는지를 정한 ‘최적의 비율’(베스트 믹스)을 내놓는다. 이를 통해 일본의 전체 전기 생산에서 원전의 비율은 20~22%로 정해졌다. 3·11 원전 참사 전인 2010년의 28.6%보다 다소 낮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높은 수치였다. 이 목표를 달성하려면 수명이 ‘40년’으로 정해진 일부 노후 원전을 재가동하거나 새 원전을 건설해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신 규제기준을 통과한 첫 원전이 재가동된 것은 2015년 8월11일이었다. 주인공은 가고시마현 사쓰마센다이에 위치한 센다이 원전 1호였다. 일본이 원전 참사 3년 만에 다시 원전 국가로 복귀한 운명적인 순간이었다. 이 원전이 처음 재가동된 날 ‘탈핵’을 강하게 주장했던 간 나오토 총리는 원전 정문 앞에서 열린 항의집회에 참석해 아베 총리를 향해 “망국의 총리”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후 규제위의 신 규제기준을 통과한 원자로는 하나둘 재가동되고 있다. 의 7월 보도를 보면, 규제위 심사가 마무리돼 가동된 원자로는 센다이 1·2호기, 다카하마 3·4호기, 이카타 3호기 등 5개, 심사를 통과해 가동을 기다리는 원자로는 다카하마 1·2호기, 미하마 3호기, 오이 3·4호기, 겐카이 3·4호기 등 7개로 확인된다.

아베 정권의 원전 재가동 방침에 맞선 저항은 두 군데에서 튀어나왔다. 첫째는 아베 총리의 정치적 스승인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의 ‘탈핵 선언’이었다. 고이즈미 전 총리는 아베 총리가 민주당 정권의 ‘탈핵 결정’을 되돌리려던 2013년 10월 돌연 탈핵을 주장하며 일본 정치의 전면에 등장했다. 그가 탈핵을 주장한 가장 큰 이유는 일본에선 사용후 핵연료의 최종 처분장을 만드는 게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고이즈미 전 총리는 ‘탈핵’을 매개로 의기투합한 호소카와 모리히로 전 총리가 도쿄도지사 선거에 나서자 그를 강력히 지원하며 아베 정권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그러나 고이즈미-호소카와 탈핵 연대는 2014년 2월 도쿄도지사 선거에서 패배하며 간단히 진압됐다.

그 뒤 일본 시민들의 끈질긴 법정 투쟁이 이어졌다. 이 가운데 일본 시민사회가 거둔 귀중한 ‘1승’이 일본 시가현 오쓰 지방재판소가 2016년 3월9일 내린 가처분 결정이었다. 오쓰 지방재판소는 1985년 운전을 개시한 다카하마 3·4호기의 재가동을 막아달라는 지역 주민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이들 원자로를 운전해서는 안 된다”는 결정을 내렸다.

새 규제기준 통과한 원자로 5곳 재가동

이 결정을 내린 야마모토 요시히코 재판장은 원전 사고가 발생했을 때 인류가 입는 피해보다 원전의 경제적 효율성이 우선할 수 없다는 너무나 지당한 논리를 내세웠다. 야마모토 재판장은 결정문에서 “후쿠시마 사고로 인해 일본이 입은 피해는 심각했고, 원전을 가동한다는 것의 위험성이 구체화됐다. 원전발전이 얼마나 효율적이든, 발전에 필요한 비용 면에서 경제적 우위성이 있든 그에 의한 손해가 구체화했을 때 (원전 가동의 장점이 이 위험성보다) 반드시 우위에 있다고 말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상급법원인 오사카 고등재판소는 2017년 3월 운전 정지 가처분 결정을 취소했고, 간사이전력은 2017년 6~7월 다카하마 3·4호기를 재가동했다. 인류에게 씻을 수 없는 커다란 상처를 남긴 3·11 원전 참사 이후에도 일본 사회는 끝내 탈핵을 실현해내지 못한 것이다.

길윤형 편집장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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