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11월9일 미국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후보의 당선 확정 직후 언론은 “2001년 9·11 공격에 버금가는 미국 정치 사상 최대의 충격”이라는 수사로 이를 표현했다. 세계 최고 여론조사기관들의 관측이 모두 어긋났고,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웹사이트의 당선 가능성 예측 화살표는 개표 시작 3시간 만에 힐러리 클린턴의 당선 가능성이 90%대에서 10%대 이하로 추락하는 요동을 쳤다.
허를 찔린 건 언론사뿐만이 아니었다. 밤이 깊어지는 시간, 미국을 대표하는 코미디언 스티븐 콜베어는 대선 특집 심야 코미디쇼를 생방송으로 진행하고 있었다. 쇼는 만화로 시작했다. 트럼프는 약자를 증오하는 냉혈한인 아버지에게 억압받고 자라온 콤플렉스 덩어리로, 2011년 언론인 만찬에서 자신을 조롱한 버락 오바마의 농담에 발끈해 백악관 탈환에 나서는 형편없는 사람으로 소개됐다. 직후 무대에 나타난 콜베어는 트럼프 성대모사를 하며 “나는 독재자가 될 것”이라고 “방송에서 욕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겠다”며 욕설을 내뱉었다.
하지만 개표가 진행되며 트럼프가 예상을 뛰어넘는 선전을 하자 상황이 바뀌었다. 능청스럽던 콜베어는 불안한 모습을 보였고, 트럼프의 아내 멜라니아 목소리를 따라했던 여자 코미디언도 “오늘 안 웃긴 것 안다”고 인정했다. 설마 하며 진행되던 코미디가 공포 리얼리티 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방송이 끝날 무렵에는 무거운 분위기에 웃는 방청객조차 거의 없었다.
민주당에 그 결과는 더 참혹하다. 전체 표는 클린턴이 많았지만, 실제 중요한 주별 선거인단 결과를 보면 민주당의 서부 몇 주, 동부의 인구밀도가 높은 몇 주를 제외한 남부와 중서부 대다수가 빨간 공화당 지역으로 드러났다.
두 개의 나라공화당은 애초 강세를 보인 하원에서 사상 최대 의원 수(공화당 239석 대 민주당 193석)를 유지했다. 이뿐만 아니라, 민주당의 숙원 사업인 상원 뒤집기 꿈도 격전지 펜실베이니아와 미주리에서 패배하며 사라지고 말았다(공화당 51석 대 민주당 48석).
고로 트럼프 당선자는 취임과 함께 그가 원하는 대법관 누구라도 큰 걱정 없이 지명하고, 인준시킬 수 있는 막강한 힘을 부여받았다. 공화당 대통령이 상·하원을 장악하며 절대 권리를 행사한 것은 1928년 허버트 후버 대통령 이후 처음이다.
출구조사 결과는 미국의 분열상을 보여준다. 가장 두드러진 점은, 백인들이 이익집단처럼 똘똘 뭉쳐 트럼프에게 몰표를 던졌다는 것이다. 백인 58%가 트럼프를 지지한 반면, 흑인은 8%만 트럼프를 지지했다. 특히 대학을 나오지 않은 저학력 블루칼라 백인은 67%나 트럼프를 지지했는데 이들이 많이 살고 있는 위스콘신, 미시간, 펜실베이니아 등의 주가 민주당에서 공화당으로 돌아서며 이번 선거를 좌우했다.
도농 간 차이도 두드러졌다. 민주당 성향이 짙은 도회지에 사는 사람들의 힐러리 지지율은 59%로 트럼프(35%)보다 압도적으로 높았지만, 소도시나 시골에서는 트럼프 지지자(62%)가 힐러리(34%)의 갑절 가까이 많았다. 실제 트럼프가 거주하면서 한 표를 행사한 뉴욕시 트럼프타워 근처 투표소에서는 향후 미국 대통령이 선거하는 내내 야유가 이어졌다.
예상외 결과… 여성과 히스패닉종교 간 차이도 눈에 띈다. 개신교인의 트럼프 지지율은 58%, 백인 복음주의 기독교인의 트럼프 지지율은 무려 81%나 된다. 전형적인 트럼프 지지자는 “시골에 사는, 교육 수준이 낮으나 소득 수준은 중간 정도인 개신교 백인”으로 요약된다.
투표 양태를 보면 통념을 뛰어넘는 지점도 곳곳에 보인다. 가장 두드러지는 점은 ‘젠더의 실패’다. 주지하다시피 이번 선거는 1920년 미국 여성들이 지난한 투쟁 끝에 참정권을 얻은 뒤 최초의 여성 대통령 당선 가능성으로 주목받는 상황이었다. 특히 선거 막바지에 트럼프의 음담패설과 성추문 파문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며, 일각에선 도덕적 가치를 중시하는 보수주의자의 대거 이탈까지 예상했다. 소셜미디어 등에서 여성주의자들이 조직적으로 성폭력 문제를 제기해 트럼프에게 타격을 입힐 것으로 예상됐다.
그러나 뚜껑을 열어본 결과, 의외로 여성의 42%가 트럼프를 지지했다. 백인 여성들의 힐러리 배신이 두드러졌다. 백인 여성의 53%가 트럼프를 지지했는데, 그중 대학을 나오지 않은 백인 여성들의 트럼프 지지율은 62%로 힐러리 지지(34%)의 두 배에 가까웠다.
여성 가운데에도 세대별 선호도가 뚜렷이 엇갈렸다. 18~29살의 젊은 ‘밀레니엄 세대’는 힐러리를 63%로 압도적으로 지지해 이전 세대와 차별성을 보였다. 미국 사회 내 성차별 문제를 적극적으로 제시한 언론인 출신 저술가 린 포비치는 공영 라디오 인터뷰에서 “이는 여성들도 젠더 문제가 아닌 고용 창출 등 경제적 문제를 보고 투표한 것”이라며 특히 저학력, 시골 여성들에게는 경제적 어려움 극복이 더 중요했다고 해석했다.
하지만 포비치는 이번 선거에서 젊은 여성들이 도처에 만연한 성차별과 성폭력에 눈뜨는 계기가 됐다며, 이런 정치적 세례는 향후 미국 정치에 희망으로 남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번 선거에서 힐러리의 가장 성공적인 소셜미디어 사이트는 힐러리 지지자가 개인적으로 만든 페이스북 비밀그룹 ‘팬트슈트 네이션’(Pantsuit Nation)으로, 긍정적 메시지를 유도하는 이 사이트는 한 달도 안 돼 회원 300만 명이 넘는 엄청난 집단으로 부상했다.
또 하나 예상을 뛰어넘는 결과는 남미계 히스패닉 유권자가 이민자를 범죄자로 비하하고, 주로 남미계인 불법 이민자 추방을 강력하게 내건 트럼프를 29%나 지지했다는 것이다. 플로리다, 애리조나 등 격전주에선 35%까지 올라간 히스패닉의 트럼프 지지율은 트럼프가 힐러리와 달리 스페인어로 선거운동을 전혀 하지 않고, 히스패닉 인사들과 접촉 시도도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더욱 놀랍다. 이는 히스패닉 유권자들도 경기 부양을 약속한 트럼프의 약속에 매료됐다는 것을 뜻한다.
분노와 ‘에코 체임버’그렇다면 민주당과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여론조사기관들, 등 유수 언론사 모두 왜 힐러리의 승리를 점치는 오류를 범했을까? 아직 제대로 된 반성문이 나오기엔 이르지만, 몇 가지 공통분모는 눈에 띈다.
첫째, 중서부 블루칼라의 분노 깊이를 알지 못했다. 한때 자동차와 철강, 석유화학 등 미국 제조업의 심장부이던 이 지역의 쇠퇴는 꾸준히 이어졌다. 고등학교를 나와 별다른 기술 없이도 열심히 일하면 집도 사고 아이들 대학도 보내는 중산층의 ‘아메리칸드림’ 붕괴는 어제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이들을 분노케 한 것은 단순한 빈곤이 아니다(실제 중서부의 트럼프 지지층 핵심은 극빈층이 아니다). 위스콘신대학 케시 크레이머 교수는 이들을 진정 분노케 한 것은 엘리트가 자신을 무시한 채 의사결정을 하는, 무기력함이라고 지적했다. “도시 사람들이 우리 시골 사람들을 무시하며 무식한 인종차별주의자로 여긴다”는 판단이 정치 ‘아웃사이더’ 트럼프의 지지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이들에게는 트럼프의 막말도 매력적이다. 최소한 전자우편을 은닉한 힐러리처럼 거짓말을 일삼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크레이머 교수는 중서부 격전주에서 “유색인종 증오보다 도시 사람들에 대한 분노가 더 중요하게 작용했다”고 지적했다.
이 지점은 트럼프의 승리를 점쳤던 몇 안 되는 진보주의자 중 한 명인 영화감독 마이클 무어가 여러 번 강조한 것이다. 미시간주 출신 무어는 “트럼프가 멕시코에서 조립한 차에 관세 35%를 매기고, 애플로 하여금 아이폰 생산 기지를 중국에서 미국으로 옮기게 하겠다는 공약은 이들 블루칼라 중산층에게 음악으로 다가왔다”고 인터뷰에서 지적했다.
둘째, 민주당과 언론을 포함한 진보 진영의 게으름과 무능도 트럼프라는 괴물을 더 크게 만들었다. 뉴욕 맨해튼에 자리잡은 유수 신문사와 방송국은 격전지인 시골과 중서부로 가 유권자들의 체온을 재기보다는 접근하기 좋은 젊은 도시 유권자들의 견해를 훨씬 많이 들었다.
언론인도 인간인데, 이들이 접하는 견해 역시 자신과 비슷한 친구들로 둘러싸인 트위터와 페이스북 등이 대부분이었고, 그 결과 이들은 비슷한 견해로 둘러싸인 ‘에코 체임버’(Echo Chamber) 속에 있다는 점을 망각했다. 이는 최근 한국 선거에서도 잇따라 드러난 현상이다. 이들의 앞마당인 맨해튼에서 트럼프가 각종 망언과 논란에 휩싸인 점도 결과적으로 트럼프가 광고비를 지출하지 않고도 엄청난 지지율을 높일 수 있게 해줬다.
언론과 여론조사의 굴욕여론조사 실패도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 전문가들은 여론조사 원재료의 정확도가 심각하게 떨어졌다는 점을 가장 큰 문제로 삼는다. 이는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과거 집전화 시대에 개발된 여론조사 방법이 휴대전화와 인터넷 시대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참고로 아직도 상당수 미국 주에선 휴대전화로 여론조사를 하는 것이 불법이라, 휴대전화만 있는 젊은 유권자의 접근을 통계학적 보정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다.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여론조사 자체에서 많은 사람이 거짓말을 했다는 것이다. 미국 평균 투표율은 60%에 불과하지만, 80%가 여론조사에서 ‘투표 예정’으로 이야기한다. 그것이 옳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보수 기독교층 등이 성추문, 인종차별 등 도덕적 결함이 많은 트럼프 지지를 밝히기 꺼렸을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100명 중 한 명만 거짓말을 했더라도, 1~2%포인트 차이로 승자가 결정된 중서부 주에선 잘못된 관측을 낳기 십상이고 실제로 그랬다.
그나마 가장 결과에 근접한 예상치를 내놓은 대선 분석 사이트 ‘파이브서티에이트’(538.com)의 네이트 실버는 “언론인들이 복잡한 통계 원리를 이해하지 못한 결과, 오차범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고 그냥 지지도 차이만 본 채 힐러리 승리로 성급한 결론을 내렸다는 점도 중요하다”고 반성했다. 데이터 블로그 에디터 아만다 콕스도 “확률은 확률에 불과한데, 수치를 기정사실로 이해해 이들과 제대로 소통하지 못했다”고 반성했다.
지금 미국은 떨고 있다. 힐러리 지지자의 92%이자 미국 전체 인구의 3분의 1 이상이 트럼프가 “두렵다”고 했다. 트럼프 승리가 단순히 향후 4년만을 결정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당장 트럼프 내각의 유력자들은 공화당의 ‘올드 보이’ 뉴트 깅리치(전 하원의장), ‘브리지 게이트’로 정치적 생명이 날아간 줄 알았던 크리스 크리스티(뉴저지 주지사) 등의 인사들이다.
국내 정책으로 보면, 연방대법관 앤터닌 스캘리아의 사망으로 생긴 공백을 별 무리 없는 보수주의자로 채울 것으로 예상됨에 따라, 낙태권과 ‘오바마 케어’ 등 오바마의 핵심 정책이 후퇴하거나 무효화될 것으로 보는 의견이 많다. 더 중요한 것은 대법관 상당수가 70~80대로 은퇴를 앞두고 있어 보수 대 진보의 대법원 구성이 5 대 4가 아닌 6 대 3 또는 7 대 2까지 갈 수 있다는 우울한 전망이 나돈다.
미국 전체 인구 3분의 1 “두렵다”국제적으로 트럼프 승리는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필리핀의 로드리고 두테르테 등 전세계적인 권위주의와 국수주의의 상승과 맥을 같이한다. 트럼프가 20년 이상 지속된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을 바로 엎기는 쉽지 않겠지만,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등 대아시아 무역에서 보호주의를 대폭 강화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대표적 지구온난화 부인자인 마이런 캠벨이 미국 환경청장으로 내정될 가능성이 높다는 하마평은 파리협약 등에 기대를 걸어온 전세계를 한숨 쉬게끔 한다.
선거는 끝났지만 캘리포니아부터 뉴욕까지 미국 전역에서 직접행동과 시위가 연일 이어지고 있다. 뉴욕대학 교수이자 저명한 진보 사회평론가인 린 더건은 “월가의 도움 없이 당선된 트럼프에게 뺏긴 유권자들의 마음을 되돌리기 위해 진보 진영은 버니 샌더스 등 민주당 좌파가 왜 약진했는지 교훈을 되씹어야 한다”며 미 자유주의 및 진보 진영의 깊은 성찰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서수민 미국 템플대학 교수전화신청▶ 02-2013-1300 (월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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