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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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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민주주의는 유로존 엘리트를 이길 수 있나

채권단 안 ‘반대’ 국민투표 결과 놓고도 양보 없는 긴축 패키지 내놓는 독일 정부의 완강한 태도… 독일 정부의 노림수는 11월 스페인 총선 결과 ‘관리’
등록 2015-07-16 08:04 수정 2020-05-03 04:28

지난 7월5일 실시된 그리스 국민투표에서 국제채권단(유럽중앙은행(ECB),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 국제통화기금(IMF)) 안에 대한 ‘반대’가 61%를 얻어 승리했다. 놀라운 결과다. 사전 여론조사에서는 채권단 안 ‘반대’와 ‘찬성’의 지지율이 엎치락뒤치락했고 그 차이도 오차범위 안이었다. 어떤 여론조사 전문가도 결과를 쉽게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이런 상황이라면 ‘찬성’ 쪽이 유리하지 않겠느냐고 보았다. 은행들이 영업정지 하는 것을 목격한 그리스 국민이다. 게다가 EU, ECB, 독일 정부는 ‘찬성’에 투표하지 않으면 협상도 없다는 식으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기까지 했다. 이런 ‘공포’ 요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간발의 차로 찬성 쪽이 승리하지 않겠느냐는 전망이었다. 그러나 막상 투표함을 열어보니 결과는 딴판이었다. 채권단 안 반대가 찬성을 20%포인트 차로 따돌리며 61%라는 압도적 지지를 받았다.

알렉시스 치프라스 그리스 총리(오른쪽)가 지난 7월8일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에서 열린 유럽의회에서 그자비에 베텔 룩셈부르크 총리와 악수를 나누고 있다. 유로존에 속한 회원국들은 주말까지 새로운 개혁안을 내놓으라고 요구했고, 그리스는 7월9일 밤(현지시각) 구제금융 재개를 위한 재정 개혁안을 국제채권단에 제출했다. REUTERS

알렉시스 치프라스 그리스 총리(오른쪽)가 지난 7월8일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에서 열린 유럽의회에서 그자비에 베텔 룩셈부르크 총리와 악수를 나누고 있다. 유로존에 속한 회원국들은 주말까지 새로운 개혁안을 내놓으라고 요구했고, 그리스는 7월9일 밤(현지시각) 구제금융 재개를 위한 재정 개혁안을 국제채권단에 제출했다. REUTERS

협상 과정의 일환이었던 국민투표

그럼, 국민투표 결과가 나온 뒤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가? 그리스와 채권단 사이의 협상이 재개됐다. 필자가 이 글을 쓰고 있는 7월10일 현재도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가는 중이다. 채권단은 그리스에 이른바 ‘개혁’안, 즉 채권단이 제시한 긴축 기조를 어느 정도 수용할지에 대한 그리스 쪽 입장을 제출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그리스의 은행들은 유로 현금이 고갈되면서 계속 영업정지 상태다. 이번에도 협상이 틀어져 긴급 유동성 지원을 받지 못한다면 당장 며칠 안에 은행 시스템이 붕괴될 형편이다.

국민투표 정국이 닥치기 이전과 그리 다르지 않은 모양새다. 이럴 거면 그리스는 왜 국민투표를 한 것인가 하는 의문까지 생긴다. 이를 짚어보려면, 먼저 이번 국민투표가 철저히 협상 과정의 일환이었음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알렉시스 치프라스 그리스 총리는 국민투표를 실시하겠다고 처음 발표할 때부터 이것이 협상 과정의 한 절차임을 분명히 했다. 그리스 국민을 안심시키거나 채권단 쪽을 교란하기 위한 변명이 아니라 실제로 그랬다. 국민투표는 그리스 정부가 구제금융 협상에서 선택할 수밖에 없는 필연적 수순이었다.

전쟁의 논리와 협상의 논리는 다르지 않다. 전쟁이든 협상이든 우리의 강점을 최대화하고 약점을 최소화하면서 상대방의 약점을 최대화하고 강점을 최소화해야 한다. 국민투표 실시 결정 전까지 협상 방향을 결정한 것은 채권단의 강점과 그리스의 약점이었다. 그리스 쪽의 약점은 집권당인 급진좌파연합(SYRIZA·이하 시리자)이 ‘유로존 잔류’와 ‘긴축정책 폐지’를 동시에 추구한다는 데 있다. 이는 대다수 그리스 국민의 바람이며 시리자는 이를 현 정부에 대한 유권자들의 ‘명령적 위임’이라 해석한다. 덕분에 채권단은 ‘유로존 잔류’ 여부를 지렛대 삼아 그리스 정부의 ‘긴축정책 폐지’ 요구를 끊임없이 후퇴시킬 수 있었다. 협상장 안에서는 이게 먹혔다.

그리스 정부로서는 후퇴에 후퇴를 거듭한 끝에 마침내 결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들의 약점이 아니라 강점을 발휘할 수 있는 곳으로 무대를 옮겨야만 했다. 그들의 강점은 물론 대중정치에 있었다. 그래서 치프라스 총리는 전장을 벨기에 브뤼셀의 협상장이 아니라 그리스 국내의 거리와 투표소로 옮겼던 것이다. 실제 시리자 정부는 자신의 강점을 전 유럽에 시위하는 데 성공했다. 당연히 그리스의 다음 목표는 이렇게 과시된 힘을 바탕으로 협상을 재개하는 것이었다.

그렉시트 각오하는 독일의 강경한 입장

실제 국민투표의 효과가 얼마간 감지되기도 한다. 그리스 쪽의 강점이 다져진 만큼 채권단 쪽 약점이 불거진 면이 있다. 채권단 내에서 강경파 독일과 달리 온건한 입장을 취해온 프랑스 사회당 정부가 국민투표 이전보다 더 적극적으로 독일을 설득하는 모양새를 보이는 것이 그 한 사례다.

이러한 세력 균형의 미묘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독일 정부는 여전히 완강하다. 독일 정부는 그리스가 결국 유로존에서 탈퇴하는(사실상 쫓겨나는) ‘그렉시트’(Grexit·그리스(Greece)와 탈출(exit)의 합성어) 가능성까지 각오하는 듯하다. 그렉시트가 현실화된다 하더라도 손해를 입는 것은 그리스일 뿐 유로존은 버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는 듯하다. 독일의 이런 강경한 입장이 이제껏 채권단의 행동 통일을 이끌어온 주된 힘이었는데, 이는 그리스 국민투표 뒤에도 요지부동이다. 현재 그리스 정부는 국민투표 이전에 채권단으로부터 요구받던 것과 동일한 긴축정책 패키지를 받아들이도록 강요받고 있다. 여기에 서명하지 않으면, 은행 붕괴와 그렉시트다. 3분의 2에 가까운 국민 지지를 등에 업은 민주주의의 위력은 현재로서는 여기까지다.

그리스 정부는 어쩔 수 없이 긴축 기조를 수용할 것으로 보인다. ‘긴축정책 폐지’를 내건 정부로서는 분명한 후퇴이자 굴복이다. 다만 국민투표 이전부터도 감지됐던 것처럼 그리스 쪽은 이러한 양보의 대가를 요구하는 데 온 힘을 쏟고 있다. 그것은 부채 조정(즉, 일부 탕감)의 합의다.

장기적으로는 그리스의 연간 예산 액수를 조정하거나 한두 가지 사안에서 긴축정책을 물리는 것보다는 부채 조정 쪽이 그리스에 더 긴요한 성과가 될 것이다. 부채의 총액과 구조를 바꾸는 것은 미래 세대의 삶이 기나긴 노예 생활로부터 벗어나는 것과 직결된다. 반면 긴축 기조는 어느 때라도 재협상을 통해 다시 바꿔낼 여지가 있다.

치프라스 총리가 국민투표 정국 와중에 채권단에 보낸 제안에서 IMF의 협상 배제를 요구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IMF를 제외하고 EU와 ECB만 상대한다면, 미래 어느 시점에든 유럽 내 세력 관계의 변화에 따라 긴축 기조에 대해 재협상을 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리자 정부는 부채 조정이야말로 장기 항전의 출발점이라고 보는 것 같다.

부채 조정이 그리스엔 긴요한 성과

그러나 그리스가 과연 긴축 기조 수용의 대가로 부채 조정을 받아낼 수 있을지는 오리무중이다. 채권단 내 상당 그룹(가령 프랑스·이탈리아 정부나 IMF)이 국민투표 이후 부채 조정에 대해 긍정적 입장을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최후의 장벽은 역시 독일 정부다. “긴축 철회도 안 되고, 부채 조정도 안 된다.” 이것이 이 글을 쓰는 시점에서 독일 정부의 입장이다. 대체로는 긴축정책에 대한 그리스의 ‘굴복’과 부채 조정의 ‘일부 성과’로 협상이 타결될 것 같지만, 이러한 독일 변수 때문에 이마저도 확실한 것은 아니다. 독일 정부는 부채 조정의 선례를 만드느니 차라리 그렉시트를 유도하는 입장을 고수할 수도 있다.

경제적 계산으로만 보면, 독일 정부의 이런 벼랑 끝 전술은 지극히 비합리적이다. 그러나 독일 정부가 대변하는 유럽 지배 세력의 노림수는 단기적인 경제적 이해에 있지 않다. 중요한 것은 정치적 전략이다. 지금 이 전략의 시야는 그리스를 넘어 더 먼 곳으로 뻗어 있다.

국민투표로 민주주의의 역사를 새로 쓴 그리스 민중에게는 좀 미안한 말이지만, 진짜 전장은 그리스가 아니다. 11월 총선을 앞둔 스페인이다.

스페인도 재정위기 국가다. 그리고 지난해부터 포데모스라는 신생 좌파 정당이 약진하고 있다. 그러나 스페인은 그리스가 아니다. 이 나라의 인구는 5천만 명에 달하고, 농업과 제조업이 발달해 있다. 역사·문화적으로는 거대한 라틴아메리카 지역과 연결돼 있다. 그리스에 비해 긴축정책 강요에 맞서 장기 항전을 벌일 잠재력이 풍부하다. 그렉시트는 유로존의 운명과 직결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스페인의 저항과 이탈은 유로존의 붕괴로 충분히 이어질 수 있다.

따라서 유로존 엘리트들로서는 11월 스페인 총선 결과를 ‘관리’하는 게 급선무다. 이제까지는 좀 방심했다. 스페인 시민사회는 그리스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따라서 안전판도 더 강하리라 내다봤던 것이다. 가령 포데모스가 약진하자 별 볼일 없던 우파 지역정당 시우다다노스를 ‘반부패 정당’으로 띄워서 대항마로 키울 수 있었던 게 그런 차이의 결과다.

유로존 엘리트에게 진짜 무대는 스페인

그러나 최근 그 안전판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이 뚫렸다. 지난 5월 실시된 스페인 지방선거에서 포데모스가 참여한 좌파 선거연합이 이 나라 제1, 제2의 도시인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의 시장을 배출했다. 일단 포데모스가 다른 좌파 정당들과 ‘시리자형’ 정당 연합의 초보적 형태를 결성하는 데 성공했다는 것은 불길한 징조다. 더 불길한 것은 마드리드에서 좌파 선거연합이 사회주의노동자당(스페인의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지지를 얻어 연립정부를 결성했다는 사실이다.

급진 좌파만 시리자 사례를 학습한 게 아니다. 사회주의노동자당도 파속(PASOK·시리자에 지지층을 빼앗긴 그리스의 사회민주주의 정당) 사례를 학습했다. 사회주의노동자당은 파속의 운명을 반복하기보다는 차라리 포데모스 등과의 공동집권 가능성을 열어놓기로 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되면 스페인에서 포데모스나 여타 급진 좌파가 ‘참여하는’ 정부가 등장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유로존 엘리트들이 이런 상황에 개입할 가장 효과적인 방안은 그리스처럼 시리자 정부가 등장한 뒤 애먹는 게 아니라 그런 정부의 등장 자체를 저지하는 것이다. 그리고 스페인에서 이를 실현할 길은 현재의 그리스 정부에 어떠한 역사적 성과도 넘겨주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의 곤궁한 현실이 11월 스페인 총선에서 더없이 효과적인 ‘반좌파’ 선전 수단이 되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스 국민투표는 민주주의가 살아 있음을 증명한 위대한 역사적 순간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축배를 들기에는 아직 이르다. 이것은 ‘민주주의 대 금융 과두제 자본주의’의 싸움에서 끝의 시작도 아니고 시작의 끝조차 아니기 때문이다. 단지 시작의 시작일 뿐이다.

장석준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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