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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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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이 말라붙은 땅, 단비 같은 외침

쁘라윳 짠오차 군부정권 1년… 시민·언론 입막음에 침묵하던 타이 사회에 파문 일으킨 학생·‘저항하는 시민들’의 ‘네오민주주의운동’
등록 2015-07-10 16:02 수정 2020-05-03 04:28

6월24일 오후 1시20분께, 타이 방콕 파툼완 경찰서 인근에 도착한 학생 14명은 지지자와 취재진, 사복경찰들이 뒤엉킨 100여 명의 인파에 둘러싸였다. 탐마삿대학 법학도 랑시만롬이 격문을 읽어 내려갔다.
“두려우십니까. 우리도 두렵습니다. 하지만 침묵할 수 없습니다. 군정의 불법적인 권력 앞에 더 이상 그럴 수 없습니다. (중략) 더 늦기 전에, 싸움을 각오한 마지막 한 사람이 사라지기 전에….”
쿠데타로 집권한 지 1년에 접어든 현 타이 쁘라윳 짠오차 총리의 폭압적 정권 운영에 더는 ‘침묵할 수 없다’고 성토하는 학생들의 모습은 시국을 고려하면 대범한 행동이다.

“두렵다, 그러나 침묵할 수 없다”

지난 6월25일 타이 방콕 민주탑에서 “군정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친 학생들. 이들은 5명 이상 집회를 금한 군정 명령 3호 위반은 물론 선동죄 혐의로 연행됐다. 현재 방콕 리멘트 감옥과 여성중앙교도소에서 군사재판을 기다리고 있다.

지난 6월25일 타이 방콕 민주탑에서 “군정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친 학생들. 이들은 5명 이상 집회를 금한 군정 명령 3호 위반은 물론 선동죄 혐의로 연행됐다. 현재 방콕 리멘트 감옥과 여성중앙교도소에서 군사재판을 기다리고 있다.

지난해 5월 쁘라윳 짠오차 당시 육군참모총장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 뒤 타이 군정이 가장 주력한 건 시민과 언론의 입막음이다. 유례없이 외신기자클럽 포럼을 강제 취소하는가 하면, 비판적 언론사를 예고 없이 ‘방문’하는 만용도 부렸다. 최근엔 페이스북 글 하나를 빌미로 전직 장관을 소환하기도 했다. 14명의 학생들이 “침묵할 수 없다”고 선언한 것도 지난 5월22일 쿠데타 1주년 항의 시위에, 군중이 모이기도 전에 끌려나갔음에도 소환장이 날아들었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이날 소환에 응하지도, 보석 석방을 요구하지도, 그리고 (나라 밖으로) 피신하지도 않겠노라 선언했다. 이날은 마침 83년 전 절대왕정을 무너뜨리고 입헌군주제를 도입한 ‘시암 혁명 기념일’이기도 했다.

“1932년 혁명은 대중 항쟁이 아니라 엘리트 장교 중심으로 치러졌다. 지금 상황과 유사하다기보다는 일정한 연결 고리가 있다. ‘의제’가 사라진 건 아니니까.” 타이의 대표적 진보역사학자 통차이 위니차쿤 미국 위스콘신대학 교수가 말했다(상자 기사 참조).

혁명 뒤 첫 쿠데타였던 1947년, 쿠데타는 독재자 피분 송크람을 권좌에 앉혔고 군부의 영향력을 강화했다. 반면 시암 혁명은 가르치지도 배우지도 못하는 역사로 세월 아래 숨어들었다. 통차이 교수는 이 혁명이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건 불과 20년 전이라고 말했다. 5년 전 대중적 기반을 다져가던 레드셔츠 운동은 시암 혁명 정신을 강조했다. 시암 혁명이 무너뜨린 건 절대왕정이었고, 레드셔츠가 싸우겠다고 달려든 건 ‘암맛’, 즉 지배 엘리트였다. 그러나 암맛과 싸우겠다며 열변을 토하던 레드셔츠의 주류 정파, 반독재민주주의연합전선(UDD) 지도부는 쿠데타 이후 1년간 저항은커녕 ‘선거나 빨리 치르면 좋겠다’는 허망한 정치 속내만 반복했다.

저항은커녕 정치 계산에만 매몰된 UDD

“(친탁신계) 푸어타이당과 UDD는 권력 추구 정치인이다. 큰 기대는 없었지만 이렇게까지 아무 저항을 하지 않을 줄이야.” 택시 기사 출신 레드셔츠 운동가인 판삭 시텝(48)의 쓴소리다. 판삭은 2010년 5월 레드셔츠 유혈 진압 때 아들을 잃었다. 지난 1년간 반군정 피켓을 들고 이따금 거리에 섰던 ‘저항하는 시민들’(Resistance Citizen) 4인방 중 한 명이기도 하다.

학생들이 격문을 읽던 날에도 판삭은 어김없이 나타났다. “평범하지 않은 삶”이라 적힌 티셔츠를 입고 왔다. 최근 잉락 친나왓 전 총리가 “평범한 삶”이라 적힌 티셔츠를 입고 유기농 밭에서 버섯 따는 모습이 인터넷에서 인기몰이했던 게 판삭은 불편했다. 판삭은 현 시국이 평범하지 않다는 메시지까지 담아 잉락 셔츠에 응수하는 티셔츠라고 말했다. “얼마 전 잉락의 생일날 나타윳 사이꾸아(UDD 지도부 1인) 전 의원이 생일파티에 갔더라. 페이스북에 비판적 내용을 올렸는데 다른 포스팅과 달리 반응이 싸늘했다. 희망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히 희망을 찾기 힘든 시절이다. 억압에 눌린 시민사회는 침묵, 타협 그리고 패배주의에 빠져들었고 지난 1년간 저항은 말라갔다. 그 마른 땅에 단비를 선사하는 이들이 있다. 군정치 아래 인권문제를 끈질기게 파헤쳐온 타이인권변호사협회(TLHR), 판삭이 주도하는 ‘저항하는 시민들’, 그리고 타협을 거부하며 ‘오로지 민주주의’를 외치는 14명의 학생들이 그들이다.

학생 14명 중 7명은 동북부 콘깬 지방 ‘다오딘’ 그룹 소속이다. 다오딘은 ‘대지의 별’이라는 뜻이지만 별을 하늘로 확장해석하면 ‘하늘과 땅’이라는 의미도 된다. ‘천지 차이’ 없는 평등이 다오딘의 의도다.

다오딘 학생들이 군정에 반기를 든 건 처음이 아니다. 지난해 11월19일 콘깬 지방을 방문한 쁘라윳 짠오차 총리 앞에 기습적으로 나타나, “우리는 쿠데타에 반대합니다”라고 적힌 티셔츠를 내보였고 저항의 상징 세 손가락도 치켜들던 악동들이다. 다오딘 학생들은 6월8일 ‘네오민주주의운동’을 선포했다. 동북부, 북부, 중부 등 20개 지역단체들도 동참했다. 그리고 6월24일 다오딘은 네오민주주의운동의 지평을 방콕으로 넓혔다.

군정반대·시민운동 함께 하는 ‘다오딘’
지난 6월24일 ‘네오민주주의운동’ 학생들은 방콕 파툼완 경찰서 앞에서 “침묵하지 않겠다”고 외치며 밤늦게까지 시위를 벌였다. 소환 대상이던 14명의 학생들은 언론에 의해 연행 장면이 생생히 보도되는 상황까지 염두에 두었지만 경찰은 카메라를 의식해 학생들을 연행하지 않았다.

지난 6월24일 ‘네오민주주의운동’ 학생들은 방콕 파툼완 경찰서 앞에서 “침묵하지 않겠다”고 외치며 밤늦게까지 시위를 벌였다. 소환 대상이던 14명의 학생들은 언론에 의해 연행 장면이 생생히 보도되는 상황까지 염두에 두었지만 경찰은 카메라를 의식해 학생들을 연행하지 않았다.

“정치인이 아니라 시민주도형 운동이다. (지방에서 심각한) 환경문제, 댐문제 등 커뮤니티가 직면한 공통의 이슈를 함께 들고 갈 것이다.” 다오딘 그룹 대표 차투팟 분야파트락사의 말이다. 6월24일 시위 현장에서 차투팟과 짬 날 때마다 장소를 옮겨가며 ‘메뚜기 인터뷰’를 하는 동안 사복경찰은 아예 기자 귓불 가까이에 서서 자신의 휴대전화 카메라를 들이밀었다. 작금의 타이 상황을 적나라게 반영한 그림이다. 그 ‘찍사’에 아랑곳없이 차투팟은 ‘메이꾸아’를 반복했다. “두렵지 않다”는 자신에 찬 말이다.

다오딘 그룹은 지난 10년간 동북부 로이에, 우돈타니, 칼라신 지방 등에서 개발이 야기한 환경문제에 적극 관여해왔다. 환경 보존 이슈는 옐로셔츠 성향의 비정부기구(NGO), 시민들도 관여해온 영역이기도 하다. 아이러니한 건 2년 전만 해도 로이에 지방의 광산 개발 문제에 참여했던 다오딘 학생들을 칭찬해 마지않던 커뮤니티 단체들이 지금 다오딘 학생들을 비난하고 있다. 군정과 같은 논리다. “학생들의 배후에 어떤 정치인이 있다”는 것.

반면 영국에 망명 중인 짜이 웅파콘 전 쭐랄롱꼰대학 교수는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다오딘 운동의 의미를 이렇게 평가했다. “그동안 타이 NGO 운동은 자기 이슈에만 골몰해왔다. 노동연대위원회(Labour Solidarity Committee)는 군정에 임금 인상 요구는 해도 군정 비판에는 입을 닫았다. 하지만 다오딘 학생들은 하나의 이슈를 넘어서고 있다. 주민들의 토지주권을 위해 싸우지만 군사독재에도 반대하고 있다. 이런 접근이 필요하다.” 짜이는 1973년 10월14일 민주화운동의 시발점이 당시 군정에 반대하는 학생들이 연행되면서 촉발됐던 것을 상기시켰다. 다만 대중조직이 모두 쥐 죽은 듯 잠자고 있는 현실은 치명적 결함이라고 지적했다.

야근하며 ‘군정 비판’ 학생 재판하는 군사법원

지난 6월25일, 학생들은 시암 혁명 기념탑인 ‘민주탑’ 아래 다시 모여들었다. 시민 100명가량이 “군정 물러가라”며 더 대범해진 구호에 동참했다. 그리고 6월26일, 학생들은 모두 연행됐다. 이날 군사법원이 학생들에게 구류 12일을 선고한 시각은 밤 10시52분이다. 법원이 야근까지 하며 5인 이상 집회 금지 위반 외에 서둘러 덧붙인 혐의는 하나 더 있다. 바로 최대 7년형까지 선고받을 수 있는 선동죄, 형법 제116조다. 자정 넘어 학생들은 감옥으로 이송, 수감됐다.

14명 중 홍일점인 촌티차 챙그루는 여성중앙교도소에 홀로 갇혔다. ‘옥바라지’를 시작한 남자친구는 기자와의 메신저 교신을 통해 촌티차가 건강이 좋지 않아 교도소 의무실에서 지내고 있다고 전했다. 그러나 본인도 촌티차도 강인하고 결연하다고 덧붙였다. 촌티차가 보석 석방을 신청하지 않을 거라는 입장도 재확인해주었다.

네오민주주의운동은 조용하지만 불편하던 타이 사회에 큰 파문을 던지고 있다. 대학강사네트워크 280명의 학자들이 네오운동 지지 선언을 한 건 타이 사회에서 좀체 보기 드문 규모다. 쭐랄롱꼰대의 한 교수는 “너희의 선생인 게 자랑스럽다”고 했고, 또 다른 교수는 “신 반란, 신 민주주의 영웅”이라 칭했다. 북부 치앙마이의 학생들은 쁘라윳 총리가 방문한 월요일 14명의 얼굴을 그린 가면을 쓰고 반짝 시위를 벌였다. 미국, 유럽연합(EU), 유엔인권기구, 아세안광산워치(ASEAN Mining Watch)는 물론 미국의 위스콘신대학 학생들까지 피켓을 들고 인증샷을 올리며 지지를 표명하고 있다.

그러나 돌을 던지는 이도 있다. 친군정임을 자처한 ‘나라를 염려하는 직업학교학생들’은 페이스북에서 역캠페인을 시작했다. “국가를 파멸하는 이기적인 학생들은 정치활동을 중단하라”며. 이들은 쁘라윳의 쿠데타를 불러들인 옐로셔츠 마지막 버전 인민민주주의개혁위원회(PDRC) 참가 단체다. 혁명의 역사도, 민주화의 교훈도, 정치 분쟁의 기억도 조금씩 살아나고 있다. 83년간 방황을 거듭해온 타이 민주주의는 출발 지점을 다시 기억해야 할지도 모른다.

방콕(타이)=글·사진 이유경 Lee@Penseur2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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