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그래도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

밤잠이 수월해지려던 5월12일 다시 찾아온 강진으로 천막생활 9일째… NGO 활동가 최근정씨가 전하는 네팔의 일상
등록 2015-05-28 17:06 수정 2020-05-03 04:28
네팔에서 지진을 겪고 있는 최근정씨가 두 번째 편지를 보내왔다. 최씨는 지난해 8월부터 네팔인 남편 커겐드라, 아들 최 린 구릉과 함께 네팔 카트만두 푸라노바네수워에서 살고 있다. 그는 현지에서 비정부기구(NGO) 활동을 하고 있다. 편집자

이스라엘 소설 에서 아직도 기억나는 문장이 있습니다. 정확하진 않지만, 내용은 이랬던 것 같습니다.

“그때 ‘나’는 아파트에서 아래 정원을 내려다보고 있었을 겁니다. 새해 아침이었고 ‘내’가 정원을 내려다본 그 순간, 나무에 걸려 있던 양은 냄비가 파지직 두 조각이 났지요. 그리고 ‘나’는 계속 말합니다. 그 순간이 이루어지기까지 끊임없는 준비가 있었을 거라고. 바람이 불고 비가 왔고 햇볕이 내리 쬐었고 밤이었다가 날이 밝아 아침이 되고 다시 저녁이 되는 그 시간을 지나 양은 냄비는 그 순간, 파지직 부서졌다는 말을 ‘내’가 합니다.”

간식을 입에 막 넣는 순간 지진이…
2차 강진이 오기 전인 5월4일, 네팔 카트만두 푸라노바네수워에 사는 청년들이 구호품을 들고 카트만두 동남쪽에 위치한 카브레 마을을 찾았다. 주식인 말린 옥수수가 무너진 집 잔해 더미 위에 가득하다.

2차 강진이 오기 전인 5월4일, 네팔 카트만두 푸라노바네수워에 사는 청년들이 구호품을 들고 카트만두 동남쪽에 위치한 카브레 마을을 찾았다. 주식인 말린 옥수수가 무너진 집 잔해 더미 위에 가득하다.

여기는 새벽 4시58분입니다. 왼쪽 팔뚝을 내놓고 잔 모양입니다. 우두둑 나선 모양으로 모기에 물리는 바람에 일찍 깼습니다. 깬 김에 참았던 화장실에 갑니다. 잠은 밖에서 자고 대소변은 집에 가서 봅니다. 시동생 썬토스와 시아버지는 대문 밖 길에서 주무시고 앞집 현관 밖에선 러빈과 그의 친구들 셋이 얇은 요를 깔고 자고 있습니다. 다시 고빈다네 천막을 공터에 쳤습니다. 여성과 노인, 아이들은 천막 아래서 자고 남자들은 우리 시아버지처럼 대문 밖이나 마당에서 잡니다. 도둑이 든다는 이야기에 남자들까지 아예 집을 떠날 수도 없고 모두 잘 만큼 공터가 넓지도 않습니다.

지난 5월12일 강진이 다시 일어난 다음 다시 천막생활 아흐레째입니다. 이 와중에도 아침이면 참새며 까마귀 소리가 여전합니다. 참새는 더욱 맹렬한 아침을 시작했습니다. 그 세찬 지저귐이 짝짓기 놀이를 하느라 내는 소리라는 걸 오늘 아침에야 알았습니다. 조마조마한 마음에도 찌아는 마시고 싶어, 2층 부엌에 올라가 잽싸게 찌아를 끓여 나와 마당에 앉았습니다. 큰 지진이 두 번 왔고 여진도 숱하게 왔습니다. 오후 간식을 입에 막 넣는 순간, 비떼가 몸에 막 비누칠을 하려는 순간, 린이 막 낮잠에 든 순간, 앞집 할머니가 빨래를 널러 옥상에 막 올라가는 순간 지진이 왔고 여진도 옵니다. 언제, 어느 순간에 집이 흔들릴지 몰라 찌아 한 잔 끓이는 5분이 안 되는 시간도 숨이 찹니다.

참새 두 마리가 부산하게 짝짓기를 합니다. 어디선가 한 녀석이 날아와 방해하자 수놈이 거세게 쫓아버립니다. 그러기를 몇 번째, 모든 녀석들이 전깃줄에 올라 포르릉거립니다. 누군가가 사랑을 지진에 비유한 적이 있지요. 참새의 사랑이든 사람의 사랑이든 이제, 저는 그 무엇도 지진으로 비유할 수 없을 거 같습니다. 지진은 다만 지진으로, 네팔을 송두리째 흔들 만큼 위압적인 이 지진은 아무리 위대하고 힘있는 사랑이라 할지라도 지진 같은 사랑으로 비유할 수 없겠습니다. 사랑은 고통스럽지만 지진은 공포입니다.

괜찮아지나 싶어 밤잠이 수월해지려던 지난 5월12일, 다시 강진이 왔고 사람들은 더 놀랐습니다. 말짱해 뵈던 창틀이나 문틀에도 금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도대체 지진은 무슨 힘을 가졌기에 이 많은 집과 사람과 동물과 나무를 흔들고 자빠뜨릴 수 있을까요? 저는 무서워서라도 ‘지진’을 검색하고 싶지 않습니다.

무너지고 금이 가고 기울어진 학교

지난주에는 우리 NGO 센터 사람들과 함께 다딩에 갔습니다. 25kg짜리 쌀 400포를 싣고 카트만두에서 90km 거리에 있는 다딩을 가는 데 무려 3시간30분이 걸렸습니다. 한국이었다면 1시간 만에 갈 거리입니다. 콧속과 귓속에 흙먼지가 들어가는 가파른 언덕을 올라 닿은 다딩 마을엔 돌과 흙과 물을 섞어 지은 집에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가져간 쌀을 부려놓은 스리시데숄 공립학교는 12학년까지 공부를 할 수 있는 제법 큰 학교였습니다.

11학년인 우매스는 매일 새벽 2시에 일어납니다. 세수하고 찌아를 한 잔 마시고 채소 커리에 밥을 먹곤 3시부터 걸어 6시에 학교에 닿습니다. 하루에 4시간씩 학교에서 공부하고 다시 3시간을 걸어 집으로 돌아가면 오후 1시가 된다고 했습니다. 우매스에게 공부할 기회를 준 이 학교도 무너지고 금이 가고 기울어져 있었습니다.

2400가구가 넘는 다딩 마을 사람들이 구호품을 받으려고 학교에 모여 있었습니다. 첫 지진에 용케 금만 갔던 다딩의 많은 집들이 두 번째 지진에 거의 다 내려앉았을 겁니다. 흙이, 돌이 무슨 힘이 있겠나요. 강물에 짐승들도 둥둥 떠내려오는 마당인데요. 지진은 사람만 집만 겪은 것이 아니라 산에 들에 살던 숱한 짐승들도 함께 겪었던 것입니다.

다딩으로 가는 길, 다딩에서 돌아오는 길 무너진 집들을 보았습니다. 더 참담한 건, 무너지려는 집들이었습니다. 기우뚱, 기대듯 쓰러져 있는 건물을 본 뒤론 내내 모든 건물이 왼쪽으로 기울어 보였어요. 기우뚱, 쓰러질 듯 기대어 있는 그 건물을 보는 마음이 참으로 참담했습니다. 순간, 양은 냄비가 파지직 소리를 내며 두 조각 났지요. 순간, 순간, 순간. 얼마나 자주, 얼마나 가볍게 나는 이 말을 썼던가요! 여러 사람들이 걱정해 안부를 묻는 글을 보냈는데 지난 한 주는 너무 참담해 글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 근심 없이 린을 어린이집에 보냈던 날들, 썬토스가 태워주는 오토바이에 앉아 버스 뒤꽁무니에 적힌 재미있는 문장이나 보던 그 아침. ‘아, 어쩜 이리 많을까. 지리산 정상보다 더해’ 하면서 바라보았던 별들. 우리 집 1층에다 동네 녀석들을 위한 도서관을 만들자며 커겐, 라진과 함께 즐거워했던 밤들! 카트만두를 떠나 평야 지역인 치트완으로 갔던 한 사람은 신발 속에 웅크리고 있던 뱀에 물려 죽었습니다. 뱀이 산속에 그대로 살고 치트완으로 갔던 그 사람이 카트만두에 그대로 살았더라면 얼마나 좋을까요.

신문을 읽을 수는 없지만 소문을 듣습니다. 아직 우리 동네에 크게 도둑이 든 집은 없지만 도둑이 들 뻔했다는 집이 있었습니다. 칠순의 노모는 천막에서 지내지만 줄줄이 있는 아들들은 흩어져 잠을 잡니다. 그 집 셋째아들 샘이 잠결에 문고리가 딸그락거리는 소리를 듣고는 무서워서 나가보진 못하고 고함만 쳤는데, 다행히 도둑이 도망갔다는 이야기를 천막에 와서 합니다. 시집보낼 딸을 둔 거누 언니는 1층짜리 집 주인에게만 딸을 시집보내겠다고 너스레를 떱니다. 두르벅 형님은 화장실에 가면서 한술 더 뜹니다. “지진 양반, 나 지금 화장실에 가도 되겠소?”

“지진 양반, 화장실 가도 되겠소?”
카브레 마을에 가서 나눠준 구호품은 오스트레일리아에 있는 친구들이 모아 보내준 돈으로 산 깔개다. 깔개를 받고 환하게 웃는 마을 주민.

카브레 마을에 가서 나눠준 구호품은 오스트레일리아에 있는 친구들이 모아 보내준 돈으로 산 깔개다. 깔개를 받고 환하게 웃는 마을 주민.

천막을 돌아가며 지키고 오후 카자(간식)를 먹을 시간이 되면 오이를 썰어오고 감자를 볶아와 함께 먹습니다. 지진은 어느덧 일상이 돼버렸습니다. 언제 한 번 오려나 기다리는 심정은 정말 기가 막히게 조마조마합니다. 큰 여진이 오면 무섭지만 작은 여진은 웬만해선 이미 다들 느끼지도 못할 정도로 일상입니다. 아직도 계단이 자꾸 저를 향해 올라오고 도로가 스펀지처럼 꺼지고 고개를 돌리는 순간은 휘청, 넘어질 것처럼 균형을 잃어 걱정이 됩니다. 화장실에선 수도꼭지를 꼭 붙잡고 앉고 고무줄 바지를 입어 입고 벗는 데 시간이 안 들게 합니다.

어제도 강도 4 이상의 여진이 한 번, 짧게, 흔들, 공포를 주고 갔습니다. 지진 가운데, 참 온순하고 따듯한 네팔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다시 합니다. 비난이나 지탄을 찾아보기 힘든 네팔 사람들인 줄 알았지만 이런 큰 재난 앞에서도 이유를 따져묻거나 왜 하필 네팔이냐는 원망도 없습니다.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천막생활에서도 지진을 놀리는 우스갯소리를 잃지 않습니다.

지금 카트만두는 한산합니다. 인도에서 왔던 사람들은 일을 놓고 인도로 돌아갔고 시골에서 왔던 사람들은 고향으로 많이들 돌아갔습니다. 약 70%가 빠져나갔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채소가 아직 동나지 않았으나 시어머니는 이제 매일 먹는 시금치 냄새가 싫다고 하십니다. 다른 채소가 많지 않거든요. 1kg에 100루피 하던 쌀이 125루피로 올랐습니다. 한 달 사이에 25%나 오른 셈입니다. 지난주 화요일에 큰 지진이 한 번 더 온 뒤, 구호품을 전하는 길은 더 험난해졌습니다. 산허리를 파서 길을 만든 네팔에는 길이 단 하나밖에 없습니다. 한국처럼 이 길이 막히면 저 길로 운전대를 틀 수 있는 방법이 여긴 없습니다.

다시 일어서야만 하는 네팔

신두팔촉이나 고르카로 가는 길엔 두 번의 강진과 여진으로 낙석이 계속되고 있어 돌라카에 텐트와 쌀과 기름, 소금, 홍찻가루, 설탕을 가져가려는 우리 집 식구들은 그제부터 계속 모여 길을 알아보고 있습니다. 자동차로 가는 것이 가능할지, 돈이 조금 더 들더라도 헬리콥터로 가는 것이 나을지 알아보면서 구호품을 확보하고 있습니다. 하루 한 끼를 먹고 돌을 깨거나 농사를 지어 사는 돌라카 지역 2100집에 쌀 30kg, 달(콩) 2kg, 소금 1kg, 식용유 한 봉지를 나누기로 했습니다. 한 집당 우리 돈으로 7500원 정도입니다. 그 마을 사람들, 네다섯 식구씩 일주일도 안 돼 끝날 쌀 10kg을 나누는 데 1500만원이 넘게 들어갑니다. 시아버지, 남편, 시동생 라진, 동네 청년 버럿이 월요일에 돌라카로 가려고 합니다.

여진도 있고 큰 지진이 오던 날처럼 음습한 날입니다. 그러나 기운을 차려야겠지요. 재건(再建), 다시 일어선다, 다시 일어서야만 하는 네팔입니다.

글·사진 최근정 비정부기구(NGO) 활동가 moong70@hanmail.net도움 주실 계좌번호: 우리은행 1002 336 336349(최근정). 보내주신 성금은 푸라노바네수워 청년들을 중심으로 한 구호활동에 쓰이게 된다. 최근정씨는 지난 편지를 보고 성금을 보내주신 분들께 감사를 전했다.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