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호등 빨간불에 차가 멈추면 공연은 시작된다. 광대 분장을 하고, 외발자전거를 탄다. 그 위에서 볼링공 4개를 돌린다. 두세 명이 짝이 돼, 공중돌기 묘기를 부리기도 한다. 축구공, 칼, 부메랑…. 각종 도구가 동원된다. 때로 놀라운 수준이다. 차들이 멈춘 잠시, 공연 시간은 30초 안팎이다. 신호가 바뀌기 약 10초 전, 공연을 멈추고 자동차 사이를 재빨리 걸으며 팁을 걷는다.
횡단보도에서만 공연이 벌어지는 건 아니다. 버스 안도 무대다. 대부분 기타 등을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지만, 음악을 틀어놓고 랩도 많이 한다. 버스가 복잡하든 말든, 노래는 울려퍼진다. 그리고 손바닥 위 동전을 짤랑거리며 팁을 받는다. 때로는 승객 4~5명이, 더러는 그저 1~2명이 보통 100페소(약 175원) 동전을 건넨다. 이렇게 하루하루 살아가는 사람들, 약 20년 전 멕시코에서 처음 봤고, 지난해 브라질에서도 봤다.
그들은 얼마나 벌까? 정류장에서 다음 무대가 될 버스를 기다리던 거리의 가수는 하루 2만페소를 버는 게 목표라고 했다. 버스에 타서 연주하면 300~400페소는 건지는 듯하다. 타면 3분 안팎을 연주하니, 다른 버스로 갈아타는 시간 등을 고려하면 10분에 한 번꼴로 무대가 선다. 그러니 1시간에 1800~2400페소를 버는 셈이다. 얼추 하루에 10시간, 60대의 버스에 올라야 약 2만페소를 번다. 거리공연은 한 번에 대충 200~300페소의 팁을 건지는 듯하다. 70~100번의 신호등이 바뀔 때마다 묘기를 부려야 약 2만페소를 번다. 어느 날, 딸이 물었다. “아빠, 저 사람들은 왜 길에서 저런 걸 해?” 나는 주섬주섬 설명을 했지만, 딸은 “어려워”라고 했다.
칠레에서 3년을 살았지만, 아직도 팁은 안 줘도 될 돈 같아 아깝다. 산티아고에서 식사 등을 한 뒤, “팁을 더해서 계산할까요?” 하고 물으면 양반이다. 아예 계산서에 10%를 포함시켜 총액으로 나오는 경우가 많다. 며칠 전에는 식당에서 밥값이 1만3500페소가 나와서 2만페소짜리 지폐를 건넸다. 잠시 뒤, 영수증을 건넨 종업원 아주머니가 살살 눈치를 보면서 연신 고맙다고 하더니, 잔돈을 주지 않고 슬슬 뒷걸음이다. 밥값에 팁 10%를 더하면 1만4850원이니 5150페소를 돌려줘야 하는데, 5천페소까지 꿀꺽하려는 셈이다. “노노노!”를 내뱉으며 손바닥을 내밀어 5천페소를 돌려받았다. 외국인이 많은 시내 식당에 동양 남자 2명이 들어갔더니, 봉으로 생각한 모양이다.
하루는 문구를 사러 대형 문구점에 간 적이 있다. 물건을 안내하던 사람들의 가슴에 이렇게 적혀 있었다. “당신의 팁이 나의 월급입니다.” 실제로 그렇다. 대형 슈퍼마켓에서 물건을 봉투에 담아주는 이들은 슈퍼마켓에서 한 푼도 받지 않는다고 했다. 슈퍼마켓에는 대학생이 대부분이지만, 거리의 예술가들 가운데는 30~60대도 많다. 그렇게 최저임금 수준의 소득자들이 살아간다. “물가가 한국보다 하나도 안 싸다”는 칠레의 최저임금은 4월 현재 22만5천페소, 약 39만4천원이다.
최저임금 수준으로 버는 이들은 아침 일찍 1시간30분 가까이 버스를 타고 시내로 온다. 그리고 일을 끝낸 뒤 다시 그 시간만큼 버스를 타고 돌아간다. 왕복 버스비만 하루 1300페소 정도 든다. 2300원이다. 수당을 받아도 한 달에 30만페소, 약 52만6천원을 벌면서 교통비로만 20일 기준 4만6천원을 쓴다. 수입의 9%다.
그러니 팁은 가욋돈이 아니라 그들의 본봉이다. 가슴의 명찰에 쓰여 있지 않을 뿐, 그 팁은 밥줄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100페소 동전과 식사비의 10%를 팁으로 척척 건네는 것일까? 줄까 말까, 나는 오늘도 망설인다. 팁이 아깝다. 그들의 삶은 아직 내게서 멀다.
산티아고(칠레)=김순배 유학생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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