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에서 폭풍이 발원했다. 시리자로 명명된 이 폭풍은 유럽 전역의 기성 정치·경제 질서를 위협할 에너지를 응축하고 있다.
지난 1월25일 그리스 총선에서 승리한 ‘급진좌파연합’(시리자)의 집권, 그리스의 대외 채무 탕감 등 그들의 공약을 두고 하는 말이다. 채무 탕감 등 채무 재협상은 유로존 붕괴의 에너지까지 응축하고 있다. 시리자는 과연 유럽의 질서를 바꾸는 척후병이 될 수 있을까?
=유럽의 기성 좌파 정당인 영국 노동당, 독일 사민당, 프랑스 사회당 등에 비하면 급진좌파다. 시리자(SYRIZA)라는 이름 자체가 ‘급진좌파연합’이란 뜻의 그리스어 약자다. 당의 창건자이자 초대 대표인 니코스 사마니디스의 사무실에 걸린 19세기 말~20세기 초 독일의 공산당 지도자 로자 룩셈부르크의 사진은 이들의 정체성을 잘 말해준다. 하지만 시리자는 사민주의자부터 트로츠키주의자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의 진보세력들이 뭉친 무지개 정당이다. 이념과 상관없이 유럽 통합에 회의를 보이는 세력도 가담했다.
시리자의 파괴력은 이념에 있지 않다. 시리자의 정당 성격을 나타내는 수식어는 ‘반기성정당’ ‘반긴축’ ‘포퓰리스트’다. 기존 질서에 대한 도전이 시리자의 힘이다. 정치적으로 기존 정치세력과 질서에 대한 거부, 경제적으로는 신자유주의에 입각한 경제 처방의 부정이다. 이번 선거에서 그들은 그리스에 구제금융을 해준 트로이카(유럽연합(EU), 유럽중앙은행(ECB), 국제통화기금(IMF))가 부과한 긴축정책을 주요 타격 방향으로 설정했다. 긴축 거부는 구제금융 자체를 무력화하는 것이고, 이는 EU의 정책 방향에 도전하는 것이다. 이런 모습의 시리자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비판의 대상이 됐으나 대안 부재로 여전히 주류 경제 이데올로기로 남아 있는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구체적으로 정치세력화한 것으로 평가된다.
-시리자가 주장한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정부 지출을 줄이는 긴축정책을 폐기하겠다는 것이 대표 공약이다. 구체적으로는 실업 및 빈민 구제책과 중·상류층을 위한 대책 등 광범위하다. 최저임금을 현재 월 580유로에서 751유로로 인상하고, 삭감된 연금을 원위치시키겠다고 약속했다. 30만 개의 새로운 일자리 창출도 약속했다. 시리자에는 중산층 이상도 표를 줬다. 시리자가 2011년 세수 확보를 위해 긴급 도입된 재산세인 ‘엔피아’ 철폐를 약속했기 때문이다. 시리자는 그 대신 호화주택 등에만 과세하겠다고 제안했다.
-시리자의 집권이 다른 유럽 국가들의 정치질서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나?=그렇다. 좌파인 범그리스사회주의운동당, 우파인 신민주주의당이 지배하던 그리스의 정치 구도가 시리자의 집권으로 깨졌다. 왼쪽에는 사민주의 정당, 오른쪽에는 중도우파 보수정당이 주류 정치세력인 유럽의 기존 정치 구도와 질서에 균열을 촉진할 것이다. 하지만 시리자의 집권이 유럽의 다른 나라에서 진보세력이나 좌파들의 집권에 반드시 긍정적 영향을 끼치는 것은 아니다. 정반대의 이념과 정책을 지향하는 극우정당의 부상을 촉진할 가능성도 크다.
-극좌정당 집권이 극우정당에 득 될 수도=시리자의 집권은 그 이념보다는 유럽 통합이 만들어낸 질서 등에 대한 거부의 표시다. 유럽에서는 이런 표심을 오히려 극우정당들이 흡수하고 있다. 프랑스의 국민전선, 네덜란드와 오스트리아의 자유당은 현재 지지율 1위를 달린다. 덴마크국민당, 영국독립당, 스웨덴민주당, 독일을 위한 연대, 이탈리아의 북부동맹 등도 지지율 2~4위를 달리며 약진하고 있다.
다만 시리자의 집권이 좌파 대안정당들의 성장에 도움을 줄 것임은 분명하다. 유럽의 다문화주의와 관용주의를 위협하는 극우 포퓰리즘 운동의 에너지를 좌파 대안정당으로 돌리는 데 긍정적 역할을 할 것이다. 스페인에서는 시리자와 유사한 노선인 반긴축 좌파정당 포데모스가 현재 지지율 1위 정당으로 나섰다. 올해 총선에서 포데모스가 1위를 한다면 유럽의 기존 정치질서는 걷잡을 수 없이 와해의 길로 접어들 가능성이 있다.
-시리자가 주장하는 부채 탕감과 반긴축은 ‘배째라’식의 도덕적 해이가 아닌가?=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부채 탕감과 반긴축 주장이 나오게 된 배경을 봐야 한다. 트로이카는 그리스에 모두 2400억유로의 구제금융을 제공하면서 긴축과 개혁을 조건으로 걸었다. 이 처방을 따르면, 처음에는 단기간의 경기 수축이 있겠지만 2012년부터는 회복 국면으로 들어간다는 거였다. 2009년 9.4%인 실업률은 2012년 15% 안팎으로 정점에 오른 뒤 떨어질 것으로 예측했다. 하지만 그리스의 경기는 2014년까지 계속 하락했고 실업률은 28%, 청년실업률은 60%까지 치솟았다. 어느 구석에서도 경기 회복 조짐은 안 보인다.
그리스 정부가 지출 삭감 약속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그리스 정부는 2010년에 비해 예산을 20%나 감축하는 등 당초의 구제금융안보다 더 많은 지출 삭감을 했다. 오히려 이런 지출 삭감이 그리스의 국내총생산(GDP) 감축을 불렀다는 지적이 정당하다. 그리스의 GDP 대비 세수 비율은 늘었으나 그 총액은 감소했다. 1유로짜리 커피를 팔면 무려 41센트를 세금으로 냈다. 그리스에 대한 구제금융안이 허황된 동화라고 비판했던 폴 크루그먼 미국 프린스턴대학 교수는 오히려, 시리자의 공약이 충분히 급진적이지 않다고 지적할 정도다. 부채 경감과 긴축 완화가 경제적 고통을 줄이겠지만, 강력한 회복을 만들어낼지는 불투명하다고 예측했다. 크루그먼 교수는 그리스가 유로화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어떤 그리스 정부라도 더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는 불투명하다고 지적했다.
EU 안팎에서도 그리스 긴축안이 실패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독일의 IFO 경제연구소장 한스 베르너 신은 “구제금융안이 채권자만 보호했고 새로운 부채를 발생시키며 상황을 악화시켰다”고 평가했다. 그는 그리스가 유로화를 포기하고 자국 통화인 드라크마로 복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드라크마로 복귀해 평가절하하는 한편 대외 채무를 일부 경감하는 조처를 취해야 한다는 처방을 내렸다.
유로화냐 드라크마냐-시리자의 부채 재협상이 실제 받아들여질 수 있나?=그럴 수 있다. 독일이 이끄는 트로이카는 시리자의 요구를 마냥 무시할 처지가 못 된다. 시리자의 요구를 마냥 거부한다면, 시리자와 그리스를 유로화 포기와 EU 탈퇴로까지 모는 것이다. 이는 유로존 균열로 이어진다. 독일 쪽도 시리자가 약속을 존중해야 한다고 하면서도, 시리자를 선택한 그리스 국민의 선택을 존중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스의 새로운 정치 현실과 협상 가능성을 시사하면서도 직접적인 부채경감안은 거부하고 있다.
그리스 GDP의 175%인 부채 3190억유로의 일부를 탕감하기를 시리자는 원한다. 나머지 부채 상환도 일시 중지하는 한편, 경제성장에 연동해서 갚는 방안도 주장한다. 현재는 정부 예산에 연계해 갚고 있는데 이는 정부 지출을 줄이려는 의도다. ECB가 시작하는 매월 600억유로 규모의 양적완화 프로그램으로 그리스 국채도 매입해주길 원하고 있다.
시리자는 독일의 전후 부채를 탕감해준 1953년 런던부채회의를 원용하려 한다. 독일은 이 부채 탕감을 통해 급격한 경제성장을 이루었다. 시리자는 또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의 그리스 점령 기간 동안 그리스은행에 강요했던 부채상환액을 독일이 배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약 110억유로에 달한다. 그리스에서는 독일이 전쟁 피해를 배상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어떤 타협안이 가능한가?=서로의 체면을 우선 살리는 타협안이 도출될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시리자가 주장하는 구제금융안 프로그램을 6개월간 유예하는 방안 등이다. 상환기간을 연장하는 것도 방법이다. 이자율 삭감도 거론된다. 부채 상환을 그리스의 수출액에 연동하는 방안도 서로의 체면을 살리는 것이다.
하지만 본질적인 문제를 다툴 시간은 많지 않다. 그리스는 당장 향후 두 달 동안 40억유로를 상환해야 하고, 8월 말에는 60억유로의 채권 만기가 돌아온다. 올해 상환해야 할 돈이 모두 200억유로나 된다.
2월28일에는 유럽금융안정화기구가 주관하는 그리스에 대한 대여 프로그램이 종료된다. 프로그램 종료 전에 그리스에 마지막으로 18억유로가 대여된다. 물론 그리스가 구제금융안 의무를 지켰는지가 조건이다. 그리스는 올해 상반기 부채를 상환하려면 42억유로를 다시 꿔야 한다. 2월 중으로 그리스의 부채 경감에 대한 근본적인 타협안이 나오지 않는다면 상황은 비관적으로 흐를 수 있다.
트로이카에 본질적인 문제는 그리스에 양보할 경우 다른 나라들도 이를 요구할 것이라는 점이다. 이럴 경우 EU의 재정 운용이 흔들리고 이는 EU의 위기로 발전할 것이다.
=그렇다. 기존 친미·친서유럽 일변도의 외교가 수정될 수 있다. 러시아와의 관계 확대가 예상된다. 이는 우크라이나 내전으로 서방과 완전히 관계가 틀어진 러시아에 큰 활로를 내줄 것이다. 알렉시스 치프라스 시리자 대표가 총리로서 처음으로 만난 쪽이 러시아 특사였다. 치프라스는 서방의 러시아 제재를 강력히 비난해왔다. 러시아는 그리스의 주요 교역국이다. 러시아도 서방의 제재로 경제적 곤경을 겪고 있으나, 그리스에 대한 경제적 지원을 고려할 가능성이 있다. 석유 현물 지원 등이 방안이다. 시리자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서 탈퇴하고 미 해군의 크레타해 운항을 금지하겠다는 공약을 철회했다. 하지만 이스라엘과의 군사협력은 이제 재고될 것이 분명하다.
정의길 국제부 선임기자 Egil@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최상목, 위헌 논란 자초하나…헌재 결정 나와도 “법무부와 논의”
체감 -21도 ‘코끝 매운’ 입춘 한파 온다…6일 다다를수록 추워
덕유산 ‘눈꽃 명소’ 상제루…2시간 만에 잿더미로
‘주 52시간 예외 추진’에…삼성·하이닉스 개발자들 “안일한 발상”
윤석열 ‘헌재 흔들기’ 점입가경…탄핵 심판 가속에 장외 선동전
관세 송곳니 트럼프에 “설마가 현실로”…반도체·철강도 사정권
미국 경제에도 ‘부메랑’…트럼프는 ‘관세 폭탄’ 왜 밀어붙이나
도올 “윤석열 계엄에 감사하다” 말한 까닭은
법치 근간 흔드는 윤석열·국힘…헌재 협공해 ‘불복 판짜기’
캐나다·멕시코, 미국에 보복 관세 맞불…‘관세 전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