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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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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어 비용은 당신이 만족한 만큼만

사전 준비도 환전도 못하고 떠난 프라하…현지에서 번개팅처럼 만난 가이드와 낯선 여행객들과의 ‘팁투어’
등록 2014-09-27 11:33 수정 2020-05-03 04:27
체코공화국 프라하에 거주하고 있는 ‘RuExp’ 팀원 이혜진씨가 팁투어에 참여한 여행객들에게 프라하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RuExp팀 제공

체코공화국 프라하에 거주하고 있는 ‘RuExp’ 팀원 이혜진씨가 팁투어에 참여한 여행객들에게 프라하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RuExp팀 제공

택시를 잡아타고 인천공항을 향해 내달렸다. 토요일 낮, 차로 빽빽한 도로 위에서 한참을 졸다보니 공항이다. 비행기 이륙 50분 전. 항공사 직원들의 따가운 눈총을 뒤로하고 탑승구로 돌진했다. 사전 준비는커녕, 환전도 못한 ‘묻지마 여행’의 시작이었다. 이건 다, 영화 탓이다.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파리로 향하는 기차에서 프랑스 처자는 미국인 꽃청년을 만나 오스트리아 빈을 배경으로 수다 로맨스를 펼친다. 17살 무렵, 어른이 되면 저 영화 속 기차를 타보리라 마음먹었다. 8월 초, 를 다시 보았다. 지금 아니면, 못 갈지도 모른다. 근거 없는 불안감이 치솟았다. 비행기표를 사버렸다. ‘부다페스트 인·빈 아웃’보다 ‘부다페스트 인·프라하 아웃’ 표값이 저렴했다. 프라하에 가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부다페스트와 빈·프라하를 거쳐 서울로 돌아오기로 했다.

오는 사람 안 막고 가는 사람 안 잡고

9월9일 오전 9시20분, 체코공화국 프라하 광장에 위치한 ‘오베츠니 둠(시민회관)’ 정문 앞으로 향했다. 여러 나라에서 온 여행객들로 북적이는 장소다. ‘RuExp’라고 쓰인 아이디 카드를 목에 맨 남자 주위로, 한국인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홀로 여행 중인 사람, 모녀, 신혼부부…. “혹시, 여기 팁투어인가요?” 조심스러운 질문에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거린다.

가이드 백승구(39)씨가 우렁차고 빠른 ‘생목소리’로 안내를 시작했다. 많은 여행객들이 와도 앰프나 수신기를 사용하지 않는다. 어제도 봤던 ‘오베츠니 둠’은 어떤 건물일까. 시민회관보다는 ‘공공의 집’으로 해석하는 쪽이 정확하단다. 프라하 지역은 16세기 이후 독일어를 쓰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를 받았다. 19세기 민족주의 바람이 불면서 체코인들을 위해 지어진 공공 건물이 ‘오베츠니 둠’이다. 이 건물의 발코니에서 191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지배에서 벗어난 뒤 체코슬로바키아 건국 선언문이 낭독됐다.

오베츠니 둠에서 시선을 돌리면 화약탑·체코국립은행이 있다. 현 프라하 대학인 카를대학 본관, 바츨라프 광장, 하벨 시장, 천문시계, 얀 후스 군상 앞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10여 명이던 투어 참여자는 어느새 30명 안팎으로 늘었다.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잡지 않는 투어다. 토·일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오전과 오후 같은 시각, 같은 장소에서 투어가 시작된다. 사전 예약은 당연히 필요 없다. 그저 정해진 장소에 시간 맞춰 가면 된다. 투어 비용도 정해져 있지 않다. 만족 정도에 따라 돈을 내면 된다. 그래서 ‘팁’투어다. 팁투어는 2011년 5월2일 오전 9시30분에 처음 시작됐다. 첫날 투어엔 참여자가 아무도 없었다. 한 명 두 명, 참여자가 생기면서 입소문이 났다. 지난 3년간 포털 사이트에 개설된 카페를 통해 수많은 인연들과 소통하고 있다.

체코에서는 ‘팁’도 과세 대상

‘묻지마 여행’ 시작점인 부다페스트에서도 팁투어와 비슷한 방식의 프리워킹투어를 접했다. 그저, 여행 가이드북을 챙기지 못한 덕분이었다. 무엇인가 사연이 있을 것만 같은 다뉴브강 주위 풍경이 궁금했다. 여행정보 사이트 ‘트립어드바이저’를 뒤적이다 ‘프리부다페스트워킹투어’가 눈에 들어왔다. 2007년부터 시작된 프로그램이라고 했다. 비가 내리던 9월1일 오전 10시30분 뵈뢰슈마르티 광장엔 50여 명의 여행객들이 모였다. 프리워킹투어가 시작되는 곳이었다. 여행객 수가 많아 투어팀이 둘로 나뉘었다. 가이드는 헝가리 대학생들이었다. 함께 걸어다니며 ‘생목소리’ 설명을 들었다. 그리고 원하는 만큼 투어비를 주었다. 백승구씨는 “정확히 언제, 어디서부터 이러한 방식의 투어가 시작됐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어떤 지역 대학생들이 자신의 동네를 알리기 위해 무료로 투어를 진행했고 여행자들은 그 수고에 대해 팁을 주면서 이러한 투어 프로그램이 시작됐다고 들었다”고 설명했다. 부다페스트와 프라하뿐 아니라 마드리드·베를린·코펜하겐·더블린 등 유럽 대도시에선 프리워킹투어를 쉽게 찾을 수 있다. 한국에서도 비슷한 투어를 구상하는 젊은이들이 있다. ‘50만원 프로젝트’를 진행 중인 오늘공작소 청년(제1027호 표지이야기 참조)들이다. 신지예(25)씨는 지난해 가을 영국 스코틀랜드 에든버러로 여행을 갔다가 그 지역에서 자란 청년들이 진행하는 프리워킹투어에 참여했다. “동상이 언제 만들어졌는지, 누구의 무덤인지 등을 알려주었는데 그런 점이 흥미로웠다. 서울 망원동에선 20년 전에 물난리가 크게 났다.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한강도 보고, 그 기억을 간직한 어르신들 이야기도 들려주는 투어를 해보면 어떨까 한다.”

다른 프리워킹투어와 비교해 팁투어의 가장 큰 특징은 ‘한국어’로 진행된다는 점이다. 프라하 소재 기업에 채용되면서 생활 기반을 옮기게 된 한국인 백승구·이혜진(36)씨가 팁투어를 진행한다. 이들에겐, 원래 하고 있던 일에서 만족감을 느끼지 못한다는 공통적 고민이 있었다. 2011년 초 ‘자아실현’을 가능케 하는 일을 함께 하자며 ‘RuExp’(Are you experienced?·경험해보았는가?) 팀을 만들었다. RuExp팀이 가장 먼저 시작한 프로젝트가 팁투어다. “투어에 참여한 분들이 체코 고유의 역사와 문화, 중요한 인물을 알아가면서 결국 우리나라 역사와 문화에 관심을 가지면 좋겠다는 목적이 있었다. 주변 강대국을 끼고 있다는 점에서 체코는 우리나라와 흡사하다. 그러다보니 근현대사도 우리 역사와 중첩된다.” 남의 나라 역사와 문화를 공부하고 다른 이들에게 설명까지 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실타래처럼 얽힌 체코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어야 했다. 근현대사에 대해선 여러 가지 시각이 존재하므로, 중요한 사건이 벌어졌을 당시 신문을 수집해 현재 관점과 비교해보았다. 공산주의 체제를 실제 경험했던 지인들의 경험담을 듣기도 했다. 체코에서는 ‘팁’도 과세 대상이다. 백승구씨는 “협동조합이나 비영리단체로 팀을 꾸려나가고 싶었지만, 소득이 있는 등 사정이 여의치 않아 유한회사 법인을 만들어 매달 팁투어를 통해 번 돈을 체코 정부에 신고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로맨스 대신 호기심을 얻었다

9월11일 여행 말미, 바츨라프 광장을 다시 찾았다. 광장 끝 중앙박물관 앞 바닥에는 십자가가 있다. 누군가 그 위로 꽃다발을 놓아두었다. 1968년 ‘프라하의 봄’ 항쟁이 소련군을 비롯한 무력으로 진압된 뒤, 1969년 1월 얀 팔라흐라는 젊은이가 소련의 압제에 항거하며 분신을 시도한 자리다. “일부 관광객들이 이 십자가를 밟고 서서 V자를 그리며 사진을 찍는 경우를 본다. 그러지 말아달라.” 팁투어에서 들었던 당부의 말이 떠올랐다. 광장 주위로 카페, 쇼핑몰, 호텔 등이 즐비하다. 이름 모를 남자의 바이올린 연주 소리가 차 소리와 뒤섞여 울려퍼진다. 옷깃을 여미며 바쁜 발걸음을 옮기는 프라하 사람들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부다페스트에서 빈으로 향하는 기차칸에는 꽃청년은커녕 중년 남녀 몇 사람만이 있었다. 1등석을 탔기 때문이려나. 미처 예상하지 못한 로맨스 대신, 호기심을 얻었다.

프라하(체코)=박현정 기자 saram@hani.co.kr■ 참고 문헌: (혜지원·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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