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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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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끝까지 ‘메이드 인 로뚜뚜’

동티모르의 알프스 해발고도 1200m의 공정무역 커피 생산지 로뚜뚜 마을…
재배하고 수확하고 껍질 벗기고 말리는 여든여덟 번의 손길
“이제 커피 남기는 일 있으면 성을 바꾸리”
등록 2013-08-10 09:53 수정 2020-05-03 04:27
뻬드로 할아버지와 한국YMCA의 양동화 간사가 갓 수확한 커피콩을 보여주고 있다. 뻬드로 할아버지의 커피 경력은 50년, 양동화 간사의 로뚜뚜 생활은 7년에 이른다.

뻬드로 할아버지와 한국YMCA의 양동화 간사가 갓 수확한 커피콩을 보여주고 있다. 뻬드로 할아버지의 커피 경력은 50년, 양동화 간사의 로뚜뚜 생활은 7년에 이른다.

무모한 여행이다, ‘커피로드’라니. ‘싸구려 입맛’인 필자는 자판기 커피만 즐기다 이즈음 자판기의 위생 문제를 발견하곤 뜨악해서 편의점 ‘원플러스원’ 캔커피로 입맛을 달래기 시작했다. 별다방·콩다방 등의 대형 커피점은 약속 시간이 애매하게 남았을 때 커피는 안 시킨 채 시원한 바람을 쏘이며 시간 보내는 곳으로 이용할 뿐이다. 원가의 10배 이상을 이익으로 남긴다고 하니 비싸기도 하거니와, 특히 별다방 커피는 팔레스타인 취재에서 들은바 상당 부분 이스라엘로 후원된다기에 마음도 가지 않았다.

그런 필자가 동티모르 커피 생산지 로뚜뚜 마을을 향해 9박10일의 일정을 감행했다. 7월9일 인도네시아 발리 도착이 여행의 첫 단추였다. 늦은 밤 도착해 1박을 한 뒤 다음날 오전 동티모르 수도 딜리행 비행기를 타러 갔다. 문득 뒤에 선 동티모르 청년의 손에 들린 한국의 병원 이름이 적힌 손주머니가 눈에 들어온다. 경기도 성남의 한 지하철 윈도스크린 제작업체에서 일한다는 코르넬리오 사비오. 10일간의 휴가를 받아 딜리의 집으로 가는 길이라고 했다. 한국 생활 5년차, 동티모르에서 약학을 공부하고 한국국제협력단(KOICA) 장학생으로 한국에서 정보기술(IT)을 전공한 뒤 취업한 그는 평균 이상의 성공 사례인 듯했다.

빈 위장이 다행인 산악도로

그가 인도네시아 직원과 그 언어로 얘기를 나누는 것이 괜스레 긴장감을 일으킨다. 동티모르는 2002년 인도네시아로부터 독립했다. 그러니 26살인 그는 사춘기 시절 인도네시아의 험악한 식민지배를 겪었을 것이다. 비유하자면 일제 식민지가 끝난 지 10년 뒤인 1955년, 일본의 어느 공항에서 일본인 직원과 일본어로 비행기표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한국의 한 청년을 보았달까. 유독 그가 말하는 인도네시아어가 힘차고 도전적으로 들렸다.

딜리에서 사메의 로뚜뚜 마을로 향하는 길은 평균 고도 1천m의 산악도로였다. 130여km, 한국이라면 2시간이면 넉넉했을 거리를 7시간여 운전을 해야 했다. 말이 도로다. 비포장도로에 곳곳마다 크고 작은 웅덩이가 파였고 도로 폭은 타고 있는 스포츠실용차(SUV) 한 대로 꽉 찼다. 딜리에서 만나 동행한 한국YMCA 사회적 기업 ‘피스커피’의 양동화 간사가 차멀미를 걱정했던 이유를 알 것 같다. 그나마 빈 위장이 차멀미를 막아준다. 게다가 건기인데도 비바람이 몰 아쳤다. 기온이 20℃ 전후인데, 잠시 쉬었던 산 정상에서는 장마철 설악산 능선 종주할 때처럼 몰아치는 비바람에 소름이 돋는다. 양 간사가 말한다. “곧 만날 뻬드로 할아버 지가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잘사는 나라 사 람들이 자연을 망가뜨리니 우리 마을의 커 피농사까지 피해를 입는다고요. 하하.”

사메의 피스커피 사무실에서 하룻밤을 보 낸 뒤 로뚜뚜 마을로 향했다. 어제 달려왔 던 딜리~사메 산악도로보다 더 험하고 경사 가 급한 산악길을 1시간여 올라갔다. 드디어 250여 가구가 넓게 흩어져 사는 해발고도 1200m의 로뚜뚜 마을이다.

어느 곳이나 산마을은 고즈넉하다. 숲에 서 나오는 특유의 피톤치드 향기, 완만한 산 줄기에 여유 있게 위치한 집들, 그 너머 몽환 적인 구름바다와 그 사이로 얼핏얼핏 보이는 산줄기, 우리네 시골에서 이제는 찾기 힘든 구멍가게와 그 앞에 모인 동네 꼬마 손님들. 그리고 집집마다 따스한 한 끼를 만들기 위 한 모닥불 연기가 피어오른다. 농업에 이어 관광산업을 2위의 국가 성장동력으로 삼았 다는 동티모르에서 이 거대한 산줄기는 ‘동 티모르의 알프스’로 부른다.

가공장에서 끈적끈적한 점액질을 제거하기 위해 커피콩을 씻고 있다(왼쪽). 로뚜뚜 마을에 주어진 하늘의 선물 바람과 햇볕에 커피콩을 말리고 있다.

가공장에서 끈적끈적한 점액질을 제거하기 위해 커피콩을 씻고 있다(왼쪽). 로뚜뚜 마을에 주어진 하늘의 선물 바람과 햇볕에 커피콩을 말리고 있다.

딜리 공장에서 되가져오는 이유

하지만 고즈넉함은 그때뿐이었다. 비가 진 저리 칠 만큼 계속 쏟아진다. 귀가 따가울 만큼 내리는 빗소리에 잠을 깨고 ‘이 정도면 뒷산에서 산사태가 일어나지 않을까’ 염려해 새벽 무렵 숙소 밖을 나와 둘러보았다. 아니 나 다를까 다음날 아침 숙소 건너편 학교 뒷 산 일부분이 무너져내렸다.

후배 중에 농민운동가 출신의 벼농사 달 인이 있어 물었다. “여든여덟 차례나 손길이 간다 하여 쌀 미(米)자를 이루는데 커피농사 도 그에 못지않더군.” 후배 이르기를, “아녀 요 성님. 요즘은 쌀도 다 기계로 짓잖여. 모 르긴 몰라도 커피농사가 더 고될 거인데”.

실제 그랬다. 6개 그룹으로 나뉘고 각 그 룹당 10~15가구로 이뤄진 협동조합원들은 잘 익은 커피콩(red cherry)을 따서 가슴 에 찬 망태에 담아 세찬 비를 뚫고 각자 집 으로 가져간다. 집에서 덜 여문 콩을 골라낸 뒤 공동 가공장으로 가져와 무게를 달고 장 부에 적는다. 가공장에서는 곧 기계로 껍질 을 벗긴다. 커피콩은 48시간 내에 껍질, 즉 과육을 벗겨내지 않으면 상한다. 이어서 커 피콩 특유의 끈적끈적한 점액질을 제거하기 위해 24~72시간 정도 물에 담가 발효시킨 다. 그리고 일일이 손으로 씻으면서 덜 여문 콩, 속이 빈 콩 등을 골라낸다. ‘양심’과 ‘자부 심’으로 해내는 과정이다. 이런 콩들이 섞인 다고 웬만한 전문가가 알 만큼 맛과 향이 떨 어지지 않는다. 품질 역시 마찬가지다. 수만 km 떨어진 곳에서 ‘한 잔의 여유’를 즐기는 우리도 알 리 만무다.

“몇몇 농민은 귀찮으니까 대강 골라내고 가져온 적이 있어요. 뻬드로 할아버지가 단번에 잡아내서 다시 돌려보냈죠. 이제는 다들 제대로 골라내서 가져와요.” 중학생 나이의 자매 둘이 가져온 커피자루를 잠시 훑어보며 “잘했다”고 칭찬하는 뻬드로 할아버지 옆에서 양 간사가 말한다.

연이은 건조 과정도 만만치 않다. 콩을 말리는 2~3주간의 햇살과 바람이 농사를 결정한다. 자칫하면 곰팡이가 슬게 된다. 이렇게 건조된 콩의 얇은 껍질을 벗기고 초록색 콩(green bean)으로 만드는 일은 수도 딜리의 대형 공장에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 콩을 그 험한 산악도로를 9시간여 달려 다시 마을로 가져와서 골라낸다.

운반 비용을 왜 더 부담하는지 의아하다. “다른 비정부기구(NGO)들은 사람들을 임시로 고용해서 작업을 해요. 하지만 우리는 되가져오죠. 내 손에서 시작했으니 내 손으로 완성합니다. 한국의 카페에 진열된 제품 겉면에 ‘메이드 인 로뚜뚜’를 표기한 이유가 이것이죠. 일자리를 더 만들 수도 있고요. 자연스럽게 자부심도 더 생겨요. 다른 마을의 커피농민들은 자신이 만든 커피콩을 어느 나라로 수출하고 어떤 사람들이 마시는지 대부분 모르거든요.” 양 간사의 자랑이다.

커피로드를 거슬러 한국으로 가는 젊은이

양동화 간사는 햇수로 7년째 마을 사람들과 함께해오고 있다. 2005년 처음 한국 YMCA가 협동지역으로 이곳을 추천받았을 때 아는 정보라곤 치열한 독립항쟁이 있었고, 그 와중에 많은 이들이 숨졌고, 그래서 장애인이 많은 지역이라는 정도였다. 낯선 오지에 적응하고, 사람에 실망하고 곧 또 사람에게서 더 큰 희망을 발견하고, 수지타산을 맞추는 7년간의 긴 이야기는 구구절절이지만 생략한다. 끝이 좋으면 다 좋다. 지금은 한 해 평균 30여t의 로뚜뚜 커피를 한국에 수출하고 그 커피를 250여 곳의 카페에 공급하고 여러 곳의 대형 할인매장에도 납품한다. 안정적인 생산·공급 라인이 형성된 것이다. 함께 신뢰도 형성되었다.

“2009년에 싱가포르·미국 등의 거대 커피자본이 이곳 사메까지 들어와서는 돈을 더 줄 테니 콩을 팔라고 했죠. 이곳 커피가 워낙 명품이니까요. 실제로 카부라키 마을의 절반 정도는 거기에 넘어갔고요. 당시 한국 쪽 사정이 무척 안 좋았어요. 그런데 뻬드로 할아버지가 주민들에게 그러시는 거예요. 사람으로서 그러면 안 된다, 예의가 아니다. 어찌나 눈물이 나던지.”

신뢰 위에 커피 외의 것들도 세워졌다. KOICA와 한국YMCA는 전기가 안 들어오던 이 마을에 태양광발전소를 설치했다. 모든 자재는 댔으나 노동력은 마을 사람들이 무임금으로 제공했다. 태양광발전소에서 일할 몇몇 젊은이들이 마을로 돌아왔다.

수출이 몇 년째 꾸준히 이어지면서 부지런한 주민 중에는 진흙바닥을 타일로 바꾼 이도 있다. 하지만 로뚜뚜는 여전히 가난하고 벌 수 있는 젊은이들은 타지로 나간다. ‘커피로드’를 거슬러.

“남동생이 한국에 산업연수생으로 가 있어요. 한국 가면 만나서 내 모습을 보여주고 안부 좀 전해줘요.” 우중에 진행하던 주민들과의 모닥불 인터뷰 말미에 아주머니가 부탁을 한다. 빗물이 흘러든 카메라는 더 이상 작동되지 않았다. 양 간사의 말이 젖은 카메라 위로 웅웅거린다. “한국에 대략 1만5천여 명의 동티모르 사람들이 있어요. 저 아주머니 남동생은 어쩜 가두리 양식장이나 뱃일을 할 거예요.”

양 간사의 소망은 하루라도 빨리 한국YMCA가 빠져나가고 이곳 로뚜뚜 마을 사람들이 모든 걸 결정하고 실행하는 것이다. 커피에서라면 로뚜뚜에서 가공까지 다 마친 완제품 커피를 대등하게 한국에 수출하는 그런 날.

“빨리 한국YMCA가 철수할 수 있었으면…”

돌아오는 발리 공항에서 코르넬리오를 다시 만났다. 비행기가 엔진 문제로 13시간쯤 지연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한국인 승객 120여 명의 통역을 자청해 인도네시아어와 영어를 섞어가며 이의 제기를 하고 있었다.

도착한 뒤 코르넬리오와 커피 한 잔을 나누기 위해 연락을 했다. “형, 저 지금 서현역에서 윈도스크린 설치 중이라 늦게 끝나요. 다음에 봐요.”

커피 취재를 다녀온 뒤 커피 한 잔을 앞에 둔 마음이 경건해졌다. 내 다짐은 이렇다. “앞으로 커피 마실 때 남기면 내가 성을 바꾼다.”

사메(동티모르)=사진·글 김상준 그란마TV PD



뻬드로 이장 인터뷰
“싸우지 말고 커피 드세요”
스무 살부터 짓기 시작했으니, 74살인 뻬드로 할아버지가 커피 농사를 지은 기간은 50년을 넘는다. 할아버지는 현재 마을의 이장 일을 하고 있다. 가족주의가 강한 이곳에서 인자하면서도 강력한 권위 를 지닌 어른이다.
할아버지에게 커피는 무엇입니까.
어려운데, 음, 우리 가족들, 마을 사람들 밥 먹여주고 아이들 학교 보내고 또 아이들이 커서 결혼시 킬 때 목돈이 되고. 그렇지만 가난했어, 커피회사들만 상대할 때는. 그런데 공정무역인가 하는 것 때 문에 안정적으로 돈을 더 벌게 되었어. 마을 젊은이들이 늘어나니 그게 더 좋더군. 흉·풍작에 상관 없이 항상 일정한 가격을 유지해주니 멀리 보며 농사를 지을 수 있어.
사메 지역, 특히 로뚜뚜 커피의 품질이 좋기로 유명하던데요.
포르투갈 사람들이 400여 년 전에 심은 커피나무가 거의 그대로 대를 이어 내려왔거든. 농약 살 돈이 없고 길도 험하고 하니 자연 그대로 커피를 만들어왔지. 지금은 농약 살 돈이야 있지만 안 쳐. 깨끗하 고 울창한 산속에서 자라는데다 바람이랑 볕이 좋고. 그리고 거의 사람 손으로 만드니까 말이야.
한국YMCA와의 협동작업은 어떤가요.
처음에는 마을 사람들이 한국YMCA를 귀찮아했어. 이렇게 합시다, 저렇게 해보죠, 우리보고 스스로 하라질 않나. 그런데 가만 보니까 귀찮지만 맞더라니까. 저 태양광발전소도 이젠 마치 우리가 만든 것처럼 생각돼. 협동조합 이익에서 일정한 돈을 떼내 학교에도 지원하고. 마을 공동 복지시설도 만 들 생각인데 기분이 좋아.
사람들이 어떤 마음으로 로뚜뚜 커피를 마시면 좋을까요.
글쎄, 뭐라고 해야 하나. 술보다는 낫지. 술 때문에 사람들이 싸우기도 하잖아. 그런데 내 평생 커피 마 시면서 싸우는 사람은 못 봤어. 나는 따뜻한 커피를 마시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게 참 좋거든. 한국 사람들은 어떤지 모르겠는데 그랬으면 좋겠어. 그저 평화롭게 좋은 커피를 마시면 좋잖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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