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스니 무바라크는 1981년 10월14일 이집트 대통령에 취임했다. 전임자인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이 암살된 직후다. 2011년 2월11일 민주혁명으로 권좌에서 물러나기까지, 그가 집권한 세월은 옹근 29년4개월이다. 1975년 4월15일부터 사다트 정권에서 부통령 노릇을 시작했으니, 실제 권세를 누린 것은, 말하자면 일본 제국주의의 한반도 식민지배 기간과 맞먹는다.
독재에 예외 없다. 무바라크는 권력의 끈을 놓지 않기 위해 반대 세력을 무참히 짓밟았다. 가장 거센 탄압을 당한 것은 이른바 ‘이슬람주의 세력’이다. 풀뿌리 자선단체를 중심으로 세력을 키운 무슬림형제단(이하 형제단)과 초기 이슬람으로 돌아가자는 주장을 하는 근본주의 성향의 살라피스트 운동, 그리고 무바라크 정권에 정면으로 맞섰던 알가마 알이슬라미야 같은 무장단체 등이 대표적이다.
군, 시위대 발포 51명 숨지고 435명 다쳐
많이들 끌려갔고, 여럿 죽었다. 이집트 언론인 파테마 파라그는 7월10일 외교안보 전문매체 인터넷판에 올린 글에서 법률가와 반정부 활동가, 대학생 등 무바라크 정권 시절 ‘의문의 죽음’을 당한 이들의 사연을 새삼 거론했다. 그는 “반무바라크 활동가가 고문을 당했다는 점을 증명하기 위해 재판정에서 옷을 벗고 상처투성이 알몸을 내보여도, 판사가 ‘그리 심하지 않다’며 대수롭지 않게 넘기던 때”라고 적었다.
형제단 출신 무함마드 무르시 대통령이 지난 7월3일 쿠데타로 쫓겨난 이후, 이집트에서 낯익은 살풍경이 재연되고 있다. 지난 7월8일 이른 아침 카이로 외곽 나스르시티에 자리한 공화국수비대 본부 앞에서 무르시 대통령의 복권을 요구하는 시위대에게 군이 실탄을 퍼부어 51명이 숨지고, 435명이 다쳤다. 무르시 대통령은 쿠데타 직후부터 공화국수비대의 ‘보호’를 받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무장한 테러범들이 공화국수비대 본부 진입을 시도하며, 경비를 서고 있던 병사들을 공격했다. 실탄을 발사하고, 새총을 쏘기도 했다.” 시민에게 총질을 하고도, 군부는 당당했다. 아메를 알리 군 대변인은 성명을 내어 “(무르시 대통령 지지자들이) 먼저 ‘도발’했고, (이를 막는 과정에서) 병사들도 40여 명이나 다쳤다”고 주장했다. 병영을 지키기 위한 불가피한 발포였다는 게다.
“평화로운 밤샘 시위를 벌인 이들이 파즈르(새벽) 기도를 올리던 참이었다. 군이 최루탄을 퍼붓더니, 갑자기 총알이 날아들었다. 하루를 여는 새벽 기도를 하고 있는 이들에게 말이다.” 자유정의당(FJP) 쪽은 전혀 다른 주장을 내놓았다. 숱한 목숨이 스러졌으니, 문제가 커질 수밖에 없었다. 아들리 만수르 임시대통령은 즉각 무스타파 하테르 카이로 동부 지방검찰청장을 단장으로 하는 조사단을 꾸리고, 진상 파악에 나섰다. 본격적인 진상조사는 아직 시작도 되지 않은 터다. 그런데….
사건 발생 이틀 만인 7월10일, 이집트 검찰은 최고지도자 무함마드 바데이를 비롯한 형제단 지도부 10명에 대한 체포영장을 청구했다. 이들에게는 공화국수비대 앞 ‘유혈사태’를 배후 조종했다는 혐의가 씌워졌다. 체포 대상자에는 이집트 의회의 과반의석을 확보한 FJP의 에삼 엘에리안 부대표와 알가마 알이슬라미야의 지도자 사프와트 헤가지 등도 포함됐다.
‘권력 독점’ 현상 전혀 바뀌지 않아
이집트 일간 의 보도를 종합하면, 7월8일 유혈사태로 군 당국에 체포된 형제단 활동가는 모두 650여 명에 이른다. 이 가운데 7월10일까지 보석으로 풀려난 440여 명을 뺀 나머지 200여 명은 여전히 군 당국에 구금된 채 조사를 받고 있단다. 이를 두고 파라그는 “이슬람주의 세력은 무조건 철저히 짓밟아야 한다는 무바라크 정권 시절의 논리가 (쿠데타 이후) 고스란히 되살아났다”고 지적했다.
유혈의 혼란이 이어지고 있는 새, 군부가 임명한 만수르 임시대통령은 7월9일 새 헌법선언을 내놓고 향후 정치 일정의 대강을 밝혔다. 경제학자 출신 하젬 엘베블라위와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무총장 출신인 무함마드 엘바라데이를 각각 총리와 부통령에 임명하는 등 내각 인선 작업도 시작했다.
엘베블라위와 엘바라데이 등용에 대해 딴말이 없는 것은 아니다. 무르시 정권 축출에 동참했던 살라피스트 계열의 누르당은 “엘베블라위는 정파성이 강해서 독립적인 정부 운영이 불가능하고, 엘바라데이는 서방에 아첨하기 위해 임명한 것”이라고 내놓고 반발했다. 하지만 논란의 핵심은 모두 33개 조항으로 이뤄진 새 헌법선언이다.
지난해 12월 제헌 국민투표에서 63.83%의 찬성으로 통과된 이집트 헌법은 7월3일 쿠데타로 무용지물이 됐다. 이집트 야권은 투표로 통과된 헌법에 대해 “대통령에게 지나치게 많은 권한이 집중됐다”며 반발해왔다. 무르시 대통령 축출의 가장 중요한 근거가 바로 헌법의 ‘독소조항’이었다. 새 헌법선언은 얼마나 다를까? 형제단에서 축출된 뒤 구국전선(NSF)에 참여하는 등 독자 노선을 걷고 있는 압둘 포투가 이끄는 ‘강한 이집트당’은 7월10일 내놓은 성명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임시대통령에게 행정권과 입법권은 물론 새 헌법 제정 과정을 주도할 수 있는 권한까지 부여했다. 애초 선거를 통해 집권한 (무르시) 정권에 반대한 것도, 대통령에게 독점적 권한이 몰렸기 때문 아니던가?”
‘강한 이집트당’의 지적이 아니어도, 새 헌법선언은 쿠데타로 ‘용도 폐기’된 헌법과 여러 면에서 흡사해 보인다. 행정부의 수반으로 정책과 예산 결정권을 가진 임시대통령은 새 의회가 선출될 때까지 입법권을 행사하도록 돼 있다. 내각의 동의 절차를 거치도록 돼 있지만,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독자적으로 비상계엄도 선포할 수 있다. 무르시 대통령 비난의 근거였던 ‘권력 독점’ 현상은 전혀 바뀌지 않은 채다.
“소수파에 대한 배려, 사회적 다양성 존중이란 혁명의 구호는 대체 어디로 간 것인가?” 역시 반무르시 운동에 적극 가담했던 소수 기독교 종파인 콥틱교의 마스페로청년연맹도 같은 날 성명을 내어 새 헌법선언에 대한 반대 의견을 밝혔다. 헌법선언 제1조는 “이집트는 민주국가이며, 이슬람은 국교, 아랍어는 공식 언어다. 수니파 이슬람주의에 바탕한 샤리아는 입법의 근원이다”라고 규정했다. 무르시 정권의 헌법 제1조와 2조, 219조를 ‘합성’한 꼴이다.
‘쿠데타’라 부르지 않는 미국
무르시 정권의 헌법에 견줘, 뒷걸음질친 조항도 눈에 띈다. 새 헌법선언 제19조에는 “군의 사법권은 그 독립성을 인정받으며, 군과 관련된 모든 사안은 군사법정에서 다뤄져야 한다”고 규정돼 있다. 효력이 중단된 기존 헌법 제198조와 엇비슷하지만, 한 가지 빠진 게 있다. 기존 헌법에는 “군에 직접적인 위해를 가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어떤 민간인도 군사재판에 회부할 수 없다”는 명시적 금지 조항이 붙어 있었다. 이 단서 조항이 빠짐으로써, ‘군과 관련된 사안’이란 군부의 판단만으로 민간인을 군사법정에 세울 수 있는 길이 열렸다.
‘표현의 자유’에도 일정한 ‘재갈’이 물려지게 될 것으로 보인다. 헌법선언 제7조는 “표현의 자유는 보장된다”면서도, “누구든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말하고, 쓰고, 영상에 담는 등 어떤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표현할 수 있다. 다만 표현의 자유는 법의 테두리 안에서만 허용된다”고 규정돼 있다. 무르시 정권의 헌법에는 ‘법의 테두리’란 단서 조항이 없었다. ‘결사의 자유’ 역시 “사회적 체제에 도전하지 않는 한”이란 전제가 내걸렸다.
그럼에도 반무르시 진영의 구심점 노릇을 하는 NSF는 사실상 이를 묵인하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애초 새 헌법선언에 비판적이던 이 단체는 7월11일 기자회견을 열어 “새 헌법선언 가운데 일부 받아들일 수 없는 조항에 대해 개정이 필요하다는 점을 임시정부 쪽에 전달했다”며 “새 내각에 믿을 만한 혁명세력 출신 인사들이 참여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앞서 이 단체 칼레드 다우드 대변인은 7월10일 “일부 조항에 석연찮은 구석이 있긴 하지만, 새 헌법선언 자체를 반대하지는 않는다. 전날 내놓은 (비판적인) 성명은 (내부 논의 과정에서) 잘못 나간 것”이라고 밝혔다. 이른바 ‘반무르시’ 진영이 벌써부터 ‘분화’를 시작한 모양새다.
2012년 6월 이집트 대통령 선거에 대해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는 ‘민주적 절차에 따라 치러졌다’고 평가했다. 그렇게 당선된 대통령을, 군이 무력을 동원해 권좌에서 끌어내렸다. 축출된 대통령은 병영의 막사에 구금된 상태다. 반대 세력은 여지없이 체포됐고, 방송사 등 언론기관이 잇따라 폐쇄됐다. 도심의 주요 길목마다 중무장한 병사들이 장갑차 곁을 지키고 섰다. 그럼에도 미국은 지금껏 ‘쿠데타’를 ‘쿠데타’라 부르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어렵잖게 짐작할 수 있다.
오바마 행정부는 이집트에 대한 군사원조 13억달러와 경제원조 2억5천만달러를 2014 회계연도 예산에 반영해달라고 의회에 요청해놓은 상태다. 하지만 미 국내법은 군사 쿠데타로 헌정질서가 유린된 국가에 대한 원조를 철저히 금하고 있다. 이집트의 쿠데타를 쿠데타로 부르는 순간, 이집트에 대한 미국의 원조는 중단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이스라엘 “이집트에 미국 지원 계속돼야”
‘길’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이집트 일간 은 7월11일 인터넷판에서 미 의회 관계자들의 말을 따 “국가안보와 관련된 중대한 상황에 직면한 경우, (의회의 판단에 따라 원조와 관련된) 법적 제한을 풀 수 있다”고 전했다. 선례도 있다. 미국은 1999년 10월 페르베즈 무샤라프가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이후 파키스탄에 대한 원조를 중단했다. 하지만 2001년 9·11 동시테러 직후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파키스탄의 지원이 필요하다는 조지 부시 행정부의 요청에 따라, 미 의회는 원조 재개를 결정했다.
이미 결심을 굳힌 걸까? 제니퍼 사키 미 국무부 대변인은 7월10일 정례 브리핑에서 “무르시 정권은 민주적으로 국정을 운영하지 않았다. …민주주의는 선거에서 이기는 것만을 뜻하는 게 아니다”라고 생뚱맞게 강조했다. 이를 두고 바르드 압델라티 이집트 외교부 대변인은 “최근 이집트에서 벌어지고 있는 정치 상황에 대한 이해와 인식을 제대로 반영한 발언”이라고 추어올렸다.
흥미로운 건 이스라엘의 반응이다.
지미 카터 행정부의 중재로 체결한 1979년 평화협정으로, 이집트는 이스라엘의 ‘존재’를 공식 인정한 최초의 아랍국가가 됐다. 사다트가 비명에 간 것도 이 때문이다. 평화협정 체결 이래 미국은 해마다 막대한 자금을 이집트에 지원해왔다. 그 최대 수혜자는 사다트의 후임자인 무바라크였다. 무바라크는 아랍권의 대표적 친미 독재자였다.
우연일까? 때를 같이해 무바라크 정권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해온 페르시아만 일대 친미 왕정국가들의 움직임도 부산하다. 형제단 집권 이후 자국 내 이슬람주의 정치세력의 급부상을 우려해온 사우디아라비아·아랍에미리트·쿠웨이트 등 3개국이 쿠데타 직후 일제히 대이집트 원조를 약속하고 나선 게다. 공히 미군에 기지를 내주고 있는 이들 3개국이 약속한 원조자금은 무려 130억달러에 이른다.
그리고 7월10일 이슬람권의 성스러운 축제의 달인 라마단이 시작됐다. 파즈르부터 마그립(해 질 녘)까지 금식의 의무를 다하면, 나눔의 성찬을 새벽까지 즐기는 무슬림의 최대 명절이다. 은 7월11일 무르시 대통령의 복권을 촉구하는 농성장에서 만난 무르시 정권 고위 인사들의 말을 따 “정부가 확보하고 있는 수입밀 재고량이 50만t에 불과하다”고 전했다.
식량 부족 현실화라는 불씨 여전
이집트는 세계 최대 밀 수입국 가운데 하나다. 한 해 수입하는 양만 무려 1천만t에 이른단다. 이렇게 수입한 밀 가운데 절반가량을 이집트 정부가 서민층에게 헐값에 공급해왔다. 하지만 정정 불안과 외환 부족 사태가 겹치면서 지난 2월 이후 밀 수입이 사실상 중단된 상태란다. 식량 부족 사태가 현실화하면, 배고픈 이들은 다시 거리로 몰려나올 터다.
올 라마단의 첫 금요성일을 맞은 7월12일 카이로에선 대규모 집회가 벌어졌다. 무르시 대통령 축출을 기념하는 이들은 혁명의 성지인 타흐리르 광장을 메웠다. 무르시 대통령의 지지자들은 카이로 나스르시티에 자리한 라바 알아다위야 사원 앞에서 연좌농성을 이어갔다. 공화국수비대 본부가 지척이다. 위태위태해 보인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헌재, 5 대 3 선고 못 하는 이유…‘이진숙 판례’에 적시
오세훈 부인 강의실 들어갔다가 기소…‘더탐사’ 전 대표 무죄 확정
“마은혁 불임명 직무유기”…비상행동, 한덕수 공수처 고발
[단독] 이진숙 ‘4억 예금’ 재산신고 또 누락…“도덕성 문제”
윤석열 변론 종결 38일 만에 마침표…법조계 ‘탄핵 인용’에 무게
다이소 고속성장의 이면…납품업체들 “남는 건 인건비뿐”
‘65살’ 노인 연령 기준, 44년 만에 손보나…논의 본격화
“8대 0으로 파면하라!”…시민들, 헌재 향한 ‘집중 투쟁’ 돌입
세상의 적대에도 우아한 68살 배우 “트랜스젠더인 내가 좋다”
보수 가치 외면하는 ‘보수 여전사’ 이진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