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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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쉿! 러시아에선 말조심

등록 2001-09-12 00:00 수정 2020-05-02 04:22

가격 싸고 성능 뛰어난 도청기 기승… 마음만 먹으면 타인의 사생활 쉽게 엿들을 수 있어

유난히 삼림이 많은 러시아에서 곤충, 특히 모기가 극성인 것은 이곳을 한번쯤 다녀온 사람이면 잘 안다. 그런데 한여름이 다 지나가고 서늘한 가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모기가 극성을 피워 문제가 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모기’란 도청기를 속칭으로 부르는 말이다.

모스크바의 ‘미틴스키 시장’,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유노나’ 등 러시아 주요 대도시에 위치한 전자제품 및 부품 중고판매시장을 중심으로 도청기와 관련된 기구들이 암암리에 판매되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잘 알려진 사실이다. “사람들은 대개 외부의 비밀을 알기 원하고 이를 위해서는 언제든지 돈을 지불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시장에서 만난 한 판매원이 손님들이 많냐는 질문에 자신있게 대답한 말이다.

경찰도 속수무책

도청기 가격은 대체로 얼마만큼 선명한 감도를 전달하는가를 나타내는 주파수의 강도와 충전장치의 크기와 성능, 그리고 도청기 자체의 크기에 따라 좌우된다. 시장의 판매원의 귀띔에 의하면 ‘콘투르’ 및 ‘클롭’이라 불리는 기종의 경우 35달러선이면 장만 가능하다. 이들 기종은 끽해야 작은 동전 하나 크기만한 것이 건물 뒤 주차장에 주차되어 있는 차에서 일어나는 얘기를 선명하게 엿들을 수 있는 정도의 성능을 발휘하고 있다. 그 밖에 효과적인 원거리 도청을 필요로 한다면 원거리도청보조장치를 별도로 구입해야 하는데, 이 장치를 이용할 경우 대략 2km 밖에서도 남의 얘기를 쉽게 엿들을 수 있다고 한다. 이 장치의 가격 또한 그리 비싸지 않은 편인데, 대략 싼 것은 33달러, 비싼 것은 100달러선에서 팔린다. 또한 도청된 말들을 자동으로 녹음기에 저장하는 자동녹음장치로 ‘마즈’라는 기기가 있는데 이 기구는 도청기를 설치해놓은 곳에서 얘기가 오고갈 때마다 자동으로 녹음해준다는 편리한 이점이 있다. 이 장치 또한 12달러 정도의 저렴한 가격으로 구입할 수 있다. 결국 비교적 간단히 남의 얘기를 도청하고 이를 자신의 휴대 녹음기에 저장할 수 있게 하는 용도의 도청기 세트는 전부 다 해서 100달러 정도면 쉽게 마련할 수 있다.

그러나 상품판매 자체가 비밀이기 때문에 이를 구하려고 시장에 가서 괜히 어설프게 “조그만 마이크 같은 것 있습니까?”라는 말로 접근한다면 초장부터 퇴짜를 맞게 마련이다. 하지만 “구하라, 그러면 얻으리라” 했던가. 아마추어 구매자들에겐 다른 방법의 경로도 있다. 단돈 몇 루블 하는, 혹은 아예 각 전철역 등지에서 공짜로 얻을 수 있는 생활정보신문의 전자제품 코너에서 ‘라디오부품 전문’, ‘라디오 상담’ 등의 미묘한 광고를 찾게 되면 일단 성공이다. 광고에 난 전화번호대로 전화를 걸어 “광고를 어디에서 봤느냐”는 등의 간단한 질문에 성실하게 답하면 만날 약속장소를 가르쳐주고 빠르면 거의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 상담원을 만날 수 있다. 그는 으레 007가방을 열어 다양한 기종의 도청기기를 설명해준다.

그렇다면 이같은 ‘탐정놀이’에 대해 법은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가. 현재 러시아 형법 제138조에 의하면 “동의하지 않은 정보의 획득을 위한 특수기술도구의 제작이나 판매 및 판매를 목적으로 한 취득”은 국가책정기본봉급수준(MROT)의 200∼500% 정도에 해당하는 금액의 벌금형 및 3년형에 처한다고 되어 있다. 하지만 실제 도청기 판매종사자를 현장에서 잡는다고 해도 유죄로 판결되는 경우는 굉장히 드물다는 것이 법률전문가들의 견해이다. 이를테면 모스크바 변호사협회 소속의 한 변호사 드미트리 멘쉬코프는 “내 경험에 비추어보건대 도청과 관련해 검찰에 기소된 사안에 대해 담당검사는 아예 사건수임을 거부하거나 혹은 떠맡겨진 사건을 책상서랍 깊이 처박아두는 게 상례”라고 말한다.

누구나 원한다면 도청기 및 관련기기를 쉽게 구할 수 있는 상황은 러시아에서 사생활침해 가능성이 그 위험수위를 넘고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그와 함께 현행 러시아 법률은 경찰, 연방안전국 및 관세청 등이 수사목적상 필요한 경우는 타인의 정보를 비밀리에 수집하는 것을 허가하고 있어 사생활을 완벽하게 수호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현실이다. 매사에 ‘웃돈거래’가 횡행하는 러시아사회에서 마음만 먹으면 법망을 교묘히 비껴가면서 남의 사생활을 엿듣는 즐거움을 만끽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상트페테르부르크=박현봉 parkhb_spb@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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