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들의 도둑질을 계속 참는다면, 우리는 언제까지고 배가 고플 것으로 생각했다. 손에 넣을 수 없는 새하얀 빵도, 유리창을 부수면 손에 넣을 수 있을지 어떨지, 확인해보고 싶어졌다.”(베르톨트 브레히트, 장 지글러의 에서 재인용)
2007~2008년 지구촌 식량값 유례없이 폭등
인간이 생존하는 데 가장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은 뭘까? 쉽다. ‘먹고 산다’지 않나. 그러니 식량일 것이다. 그럼, 인류가 만들어 낸 가장 위험한 경제행위는 뭘까? ‘기회를 틈타 큰 이익을 보려고 하는 일’, 곧 ‘투기’일 것이다. 이제 이 두 가지, 식량과 투기를 묶어서 보자. 21세기에도 여전한 ‘굶주림의 세계화’란 기이한 현상을 이해할 실마리가 거기에 숨어 있다.
미국 통계청(USCB)이 운영하는 ‘세계 인구시계’란 게 있다. 협정 세계시(UTC)를 기준으로 2013년 1월31일 낮 12시 현재, 지구촌에는 모두 70억6318만여 명이 살고 있다. 자세히 볼까? 인류의 60%가 넘는 약 42억 명이 아시아에, 약 15%인 10억 명가량이 아프리카에 살고 있다. 그 뒤를 유럽(약 7억3300만 명)과 라틴아메리카·카리브해 연안국가(약 6억 명), 미국을 위시한 북아메리카(약 3억5200만 명) 대륙이 잇고 있다. 오세아니아주 전체의 인구는 지구촌 전체의 0.5%에 해당하는 약 3500만 명에 그친다.
자료를 하나 더 들여다보자. 유엔 식량농업기구(FAO)가 지난해 10월 펴낸 ‘세계 식량불안 현황-2012년’ 보고서다. FAO는 보고서에서 “2010~2012년 지구촌에서 만성적으로 굶주림에 시달리는 인구는 전체의 12.5%가량인 약 8억7천만 명에 이른다”고 지적했다. 쉽게 말해, 인류 8명 가운데 1명이 배고픔에 허덕이고 있다는 얘기다. 21세기에도 말이다.
1996년 11월 이탈리아 로마에서 FAO 회원국이 모두 참석한 가운데 이른바 ‘세계식량정상회담’(WFS)이 열렸다. FAO 창설 50돌을 기념해 열린 당시 회의에선, 개발도상국의 식량 부족과 기아, 식량 수급 불균형 등에 대처하기 위한 국제사회의 다짐을 담아 ‘세계 식량 안보에 관한 로마 선언’이 채택됐다. 뼈대만 추리자면, “늦어도 2015년까지는 지구촌의 굶주리는 인구를 절반으로 줄이겠다”는 게다.
로마 선언 채택 당시 각국 대표단이 ‘절반으로 줄이겠다’며 기준점으로 잡은 시점은 1990년이다. FAO가 2012년 현황 보고서에서 밝힌 굶주리는 인류의 비율은 1990년의 상황과 엇비슷하다. FAO는 “(로마 선언 이후) 굶주림을 줄이려는 노력이 꾸준한 성과를 거뒀지만, 2007~2008년을 거치며 주춤해졌다”고 지적했다. 시계를 조금만 거꾸로 돌려보자.
2007년 초부터 2008년 중반까지 지구촌 식량값이 유례없이 폭등했다. 국제통화기금(IMF)이 내놓은 ‘세계 식량값 지수’(FPI)는 이 기간에 무려 80%나 치솟았다. 지구촌 전역이 식량값 폭등에 따른 물가 인상(애그로플레이션)으로 몸살을 앓아야 했다.
1990년대부터 금융자본 투기 열 올려
IMF의 자료를 보면, 선진개발국에선 가구 소득의 10~15%를 식비로 쓴다. 반면 개발도상국에선 가구 소득의 50%에서 많게는 90%를 먹는 데 쓴다. 식량값 폭등으로 부자 나라에선 생활비 가운데 식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졌다. 그뿐이었다. 가난한 나라에선 사정이 달랐다. 갑자기 돈을 더 벌 수는 없을 터, 먹을거리를 줄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2007년에만 7500만 명, 2008년엔 4천만 명이 각각 새롭게 ‘만성적인 영양실조에 시달리는 인류’의 대열에 합류했다.
천장 높은 줄 모르고 치솟던 식량값은 2008년 하반기 들어 불과 몇 주 만에 큰 폭으로 떨어지며 안정세로 돌아섰다. 영국 시민단체 ‘세계개발운동’(WDM)은 2010년 7월 펴낸 ‘굶주림 복권’이란 제목의 보고서에서 “일반적인 식량값 상승은 (기후나 작황 등) 다양한 원인에 따른 것으로 설명할 수 있겠지만, 2007~2008년처럼 기록적인 폭등 사태는 금융자본의 투기를 빼고는 설명할 길이 없다”고 지적했다.
식량, 그러니까 농산물이 ‘투자’의 대상이 된 것은 이미 오래다. 19세기 중반 미국에서 시작된 농산물 선물거래가 그 시작이었다. 애초 ‘선물거래’는 파종 단계에서 작황과 관계없이 농민들에게 일정한 수입을 보장해준다는 점에서 매력적이었다. 문제는 거래의 규모였다. 20세기 초반부터 고삐 풀린 금융자본이 선물거래 시장을 장악해 들어갔다. 막대한 자본이 흘러들자, 수요와 공급의 경제 법칙은 무용지물이 됐다. 수확의 많고 적음이 아닌 자본의 흐름에 따라 농산물값이 춤을 춰댔다. 지구촌 차원에서 말이다.
1929년 대공황을 겪으며 금융자본의 위험성을 깨달은 프랭클린 루스벨트 행정부는 과감한 개혁입법에 나섰다. 1933년 유가증권법(SA)을 시작으로 유가증권거래법(SEA)과 상품거래법(CEA) 등을 잇따라 개정해 금융자본에 재갈을 물렸고, 농산물에 대한 과도한 투기 행위도 엄격히 규제했다.
금융자본이 농산물 시장에서 다시 투기에 열을 올리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초반부터다. 최첨단 금융기법을 동원해 수많은 파생상품을 만들어내며 규제의 허점을 파고들었다. 골드만삭스를 비롯한 거대 금융사들은 막대한 자본을 바탕으로 정치권을 압박했다. 규제의 장벽이 서서히 걷히기 시작했다. 그렇게 먹을거리는 ‘금융상품’으로 둔갑했다. 골드만삭스가 1991년 내놓은 ‘농산물 선물거래 지수펀드’가 대표적이다.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가 2009년 내놓은 자료를 보면, 농산물 선물거래 시장에서 투기자본이 휘두르는 위력의 실체를 어림잡을 수 있다. UNCTAD는 “2002~2008년 농산물 선물거래 시장에서 거래되는 파생금융상품(디리버티브)이 500%나 늘어났다”며 “장기 인도분 옥수수 선물거래의 65%, 콩의 68%, 밀의 80%를 투기자본이 장악한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올해 수익 전망, 대단히 좋다”
금융자본 역시 이런 현실을 부인하지 않는다. 식량값 폭등 사태가 예견되던 2006년 4월 는 거대 금융사 메릴린치 관계자의 말을 따 “투기성 자금이 유입되면, 수요와 공급의 원칙에 따르는 전통적 형태의 시장에서 거래되는 농산물값보다 50% 이상 가격이 높아진다”고 전했다. 도 비슷한 시기 이름을 밝히지 않은 헤지펀드 운용업자의 말을 따 “농산물 시장에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충분한 자금을 투입하면, 가격이 치솟는 것은 당연한 이치”라고 전했다.
FAO는 매달 곡물·유제품·육류 등 5개 분야에 걸쳐 세계 식량시장의 동향을 분석해 ‘식량값 지수’(FPI)를 내놓는다. 지난 1월10일 발표된 최신 FPI는 209포인트를 기록했다. 90.4포인트로 2000년대의 문을 연 FPI는 지속적인 상승세를 유지하다, 식량값 폭등 사태가 절정에 이르렀던 2008년 사상 최고치를 갈아치우며 199.8포인트를 기록했다.
이듬해인 2009년 156.9포인트까지 떨어지며 하향 안정세를 보이던 FPI는 2011년 227.6포인트를 기록한 이래 200포인트 아래로 단 한 차례도 떨어지지 않았다. 2012년 한 해 평균 FPI는 211.6포인트였다. 식량값 폭등 사태가 만성화하며, 턱없이 높은 식량값이 새로운 평균치(뉴 노멀)로 아예 자리를 잡은 모양새다.
2011년에 이어 2012년에도 지구촌은 이상기후로 몸살을 앓았다. 특히 미국과 우크라이나 등 대표적 곡물 생산 국가가 극심한 가뭄에 허덕이자 일찌감치 식량값 폭등 사태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실제 국제시장에서 거래되는 곡물값이 큰 폭으로 뛰었다. FAO 자료를 보면, 2008년 237.8포인트로 역대 최대치를 기록한 세계 곡물값 지수(FPI에서 곡물값만 따로 뽑아 지수화한 하위 항목)는 2011년 평균 246.8포인트까지 뛰었다. 이어 2012년 9월엔 262.6포인트를 기록하며 사상 최고 기록을 다시 갈아치웠다. 다시, 식량과 투기를 묶을 차례다.
“거대 금융기업 골드만삭스가 밀·콩·옥수수 등 이른바 ‘소프트 상품’으로 불리는 곡물시장에 투자해 벌어들인 돈이 지난해에만 약 4억달러에 이르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 업체의 2012년 수익이 68%나 급증한 것도 이 때문이다. 막대한 이득을 낸 골드만삭스의 임직원 평균 연봉도 39만6500달러(약 4억3200만원)까지 인상됐다.”
영국 는 지난 1월22일치에서 이렇게 전했다. 수많은 이들이 굶주림에 처할 위기가 닥쳤을 때, 탐욕에 눈먼 금융자본은 어김없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던 게다. 신문은 크리스틴 헤이그 세계개발운동(WDM) 사무총장의 말을 따 “10억 명에 가까운 인류가 주린 배를 부여잡고 잠자리에 드는 동안, 식량값을 두고 투기를 벌인 골드만삭스는 막대한 수익으로 배를 채웠다”며 “식량값 폭등세에 기름을 부은 것은 금융자본의 투기이며, 골드만삭스는 그 주범”이라고 전했다.
어디 골드만삭스뿐일까. 바클레이·모건스탠리 등 거대 다국적 금융기업들은 모두 예외 없이 ‘소프트 상품’ 투자에 열을 올리고 있다. 세계 최대 원자재 거래업체로 불리는 스위스의 ‘글렌코어’의 농산물 담당 이사 크리스 매허니는 곡물값 폭등세가 절정을 향해 가던 지난해 8월 “미국의 극심한 가뭄이 글렌코어엔 좋은 기회”라고 말하기도 했다. 은 지난해 8월11일 매허니의 말을 따 “올해 수익 전망을 놓고 보면, 여건이 대단히 좋다. 가격은 치솟고 있고, 시장의 휘발성도 대단히 높다. 막대한 매매차익을 남길 수 있는 기회가 많을 것”이라고 전했다.
“세계 농산물 시장이 농민들을 위한 시장이 아니라, 다국적 금융자본의 놀이터로 변질됐다. 거대 금융사들이 앞다퉈 식량값을 놓고 놀음판을 벌여, 이제 농산물은 완벽한 금융자산이 돼버렸다. 그 폐해는 고스란히 높아진 식량값으로 신음하는 가난한 이들의 굶주림으로 돌아간다.”
국제적 인도지원단체 옥스팸의 롭 내시 자문위원은 와 한 인터뷰에서 신문은 “금융자본의 농산물 시장 진입장벽이 무너진 이래, 골드만삭스 등 거대 금융기업이 이 분야에 쏟아부은 자금은 2천억달러를 넘어선다”며 “이들이 투자를 늘린 시점과 지구촌 차원의 식량값 폭등세가 시작된 시점은 정확히 일치한다”고 지적했다.
올해도 식량위기 재연될 듯
지난해 세계 최대 곡물 생산국인 미국은 1930년대 이후 사상 최악의 가뭄을 겪었다. 곡물 비축분 규모도 1974년 이후 최저치를 기록하고 있다. 골드만삭스가 자사 고객에게 ‘2013년 유망 투자상품’으로 옥수수를 비롯한 곡물값 선물거래 펀드를 추천하는 이유다. 유엔은 최근 “2013년 지구촌 차원에서 식량위기가 재연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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