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헌법위원회(CC)는 한국의 헌법재판소와 결이 다르다. 한국 헌법재판소는 위헌법률 심판과 탄핵 심판, 국가기관 간의 권한쟁의 심판, 헌법소원 등 다양한 역할을 수행한다. 반면 프랑스 헌법위원회는 위헌법률 심판과 대통령·의회 선거 관리를 두 가지 주요 업무로 삼고 있다.
행정(대통령)·입법(국회)·사법(대법원장)부에서 각 3명씩 임명하는 한국 헌법재판관과 달리, 프랑스 헌법위원회 위원은 대통령과 상하 양원 의장이 각 3명씩 임명한다. 국민이 선출한 권력(입법·행정부)이 만든 법률을, 그렇지 않은 권력(사법)이 무력화해선 안 된다는 ‘혁명’의 전통이 뿌리 깊게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란다. 그런데 이게, 딱히 의도한 대로 작동하는 건 아닌 모양이다.
국민배우 드파르디외 세금 피해 ‘망명’
지난해 12월29일 프랑스 헌법위원회가 뜬금없이 세계인의 관심을 모았다. 이날 위원회는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이 의욕적으로 추진해온 ‘부자증세’ 정책이 헌법에 반한다는 위헌 결정을 내렸다. 올랑드 대통령은 지난해 5월 대선에서 연간 100만유로(약 14억원) 이상을 버는 고소득자에 대한 세율을 최대 75%까지 올리는 것을 뼈대로 한 ‘부자증세’를 핵심 공약으로 내걸고 당선됐다.
취임 넉 달여 만인 지난해 9월 말 올랑드 대통령은 ‘75% 소득세율’을 포함한 포괄적인 재정개혁 법안을 하원에 제출했다. ‘부자증세’를 둘러싼 논쟁이 프랑스 사회에서 가열되기 시작하며 지구촌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프랑스 하원이 올랑드 정부가 제출한 법안을 통과시킨 것은 지난해 10월19일이다. 논란은 더욱 불을 뿜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프랑스 최고 갑부로 꼽히는 베르나르 아르노(63) ‘루이뷔통모에헤네시’(LVMH) 회장이다. 그는 지난해 9월 일찌감치 벨기에 국적을 신청해 ‘조세 회피용’이란 비난에 휩싸였다. 아르노 회장의 재산 총액은 무려 410억달러로, 경제전문지 가 선정한 ‘2012년 지구촌 갑부 500인’ 가운데 4위에 올랐다.
프랑스의 ‘국민배우’로 통하는 제라르 드파르디외도 벨기에로 ‘망명’길에 올랐다. 그는 지난해 12월 장마르크 에로 총리에게 보내는 공개 서한에서 “지난 40여 년 배우 생활 동안 납부한 세금이 1억7천만유로를 넘는다”며 “성공과 창의성, 재능을 ‘처벌’의 근거로 삼기에 이제 조국을 떠나려 한다”고 주장했다. 은 “드파르디외가 프랑스 여권을 정부에 반납했다”고 전했다.
논란이 계속되던 지난해 12월20일 프랑스 하원은 ‘75% 소득세율’ 신설을 통한 재정적자 축소 방안을 뼈대로 한 새해 예산안을 통과시켰다. 이에 따라 새 조세법은 올 1월1일부터 2년간 한시적으로 적용되게 됐다. 제1야당인 대중운동연합(UMP)을 비롯한 보수 진영은 격하게 반발했다. 논쟁은 자연스레 헌법위원회로 무대를 옮겨갔다.
제도 시행이 코앞이었다. 헌법위원회의 결정은 신속하게 이뤄졌다. <afp>은 지난해 12월29일 위원회의 결정문을 따 이렇게 보도했다. “다른 소득세는 가구별로 부과된다. 새로 도입된 (75%) 소득세율은 개인에게 적용된다. 이는 프랑스 세법의 적용 원칙에 어긋나며, 공적 부담을 고루 나눠 지도록 한 (헌법이 규정하고 있는) 평등의 원칙에 반한다.”
쉽게 풀어보자. 맞벌이를 하는 부부가 있다고 하자. 이들이 각각 99만유로씩 연간 198만유로를 번다면 ‘75% 세율’을 피해갈 수 있다. 반면 부부 중 한 명이 101만유로 이상을 버는 경우엔 그럴 수 없다. 그러니 최고세율 적용 과정이 ‘공평’하지 않다는 논리다. 헌법위원회는 ‘75% 세율’ 자체에 대해선 문제 삼지 않았다. 핵심 정책이었음에도, 추진하는 과정에서 올랑드 정부가 세밀하지 못했던 게다.
위헌 결정 명분, 혁명 이념인 ‘평등’
“(올랑드 대통령이 이끄는) 사회당 정부의 조세정책은 기업가의 사기를 꺾고 부자를 처벌해 프랑스를 떠나게 만든다. 결국 중산층이 막대한 세금 부담을 질 수밖에 없다.” <afp>은 지난해 12월29일 위헌소송을 주도했던 장프랑수아 코페 UMP 대표의 말을 따 이렇게 전했다. 그는 이어 “올랑드 대통령은 ‘부자증세’로 프랑스의 모든 어려움이 해결될 수 있을 것처럼 국민을 속였다”며 “헌법위원회의 위헌 결정으로 정부의 ‘도덕적 오류’가 오늘에야 바로잡혔다”고 강조했다. 대선 패배 이후 내분 사태까지 휩싸였던 UMP로선 오랜만에 맛보는 ‘정치적 승리’였을 터다.
현 프랑스 헌법위원회는 모두 12명의 위원으로 구성돼 있다. 하원의장 출신인 장루이 드브레 위원장 등 2명은 자크 시라크 전 대통령이 2004년과 2007년 2월에, 상원의원 출신인 미셸 샤하스 위원은 니콜라 사르코지 전 대통령이 2010년 2월에 각각 임명했다. 자클린 드 귈렌슈미트 위원 등 3명은 2004~2010년 사이에 상원의장이 임명했고, 기 카니베 위원 등 3명은 2007년과 2010년 각각 하원의장이 임명했다. 여기에 발레리 지스카르데스탱, 자크 시라크, 니콜라 사르코지 등 3명의 전직 대통령이 당연직 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시라크 전 대통령이 우파 정당의 연합체로 UMP를 창당한 2002년과 2007년 치러진 하원 선거에선 우파가 압도적 다수를 점했다. 1997년 선거 이후 두 차례 선거에서 참패한 사회당은 2012년 선거에서 약진하며 10년 만에 하원을 장악했다. 사회당은 2011년 선거에서 1958년 제5공화국이 들어선 이래 사상 처음으로 상원 다수당이 됐다. 지스카르데스탱을 포함한 3명의 전직 대통령은 모두 우파인 UMP 계열이다. 결국 헌법위원회 위원 12명이 모두 우파 인사로 채워져 있다는 얘기다. 헌법위원회가 위헌 결정의 명분으로 내건 것은 혁명의 이념인 ‘평등’이었다.
도입 시기에 차질이 빚어지긴 했지만, 올랑드 정부는 선선히 물러날 뜻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에로 총리는 헌법위원회 결정 당일 성명을 내어 “고소득자를 대상으로 한 75% 소득세율 도입은 공평한 분배를 추구하는 정부의 노력을 상징한다”며 “헌법위원회의 지적에 맞춰 개정한 법안을 조만간 다시 의회에 제출할 것”이라고 밝혔다. 올랑드 대통령도 1월1일 텔레비전을 통해 발표한 신년사에서 “(‘75% 소득세율’ 신설은) 가장 많이 가진 이들에게, 사회를 위해 조금 더 많이 기여할 것을 요청하는 것”이라며 “목표를 바꾸지 않는 선에서 조정해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전체 세수 1% 해당, ‘상징적 조처’
등의 보도를 종합하면, ‘75% 소득세율’의 적용을 받게 될 고소득자는 2천 명 남짓이다. 새 소득세율에 따라 거둬들일 수 있는 세금은 약 2억유로, 전체 세수의 단 1%에 불과하다. ‘상징적인 조처’란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올랑드 정부가 헌법위원회의 ‘지적’을 받아들여 연간 소득이 100만유로 이상인 개인이 아닌 가구를 대상으로 세금을 부과하면, 적용 대상이 1만5천 명 남짓으로 늘어난단다. 지난해 말을 기준으로 프랑스 인구는 약 6535만 명이다. 프랑스의 현행 최고 소득세율은 46.7%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afp></af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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