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3월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떠올리면 될까? 거짓 정보에 기댄 주류 언론의 특종과 이를 둘러싼 음모, 때맞춰 울려퍼지는 전쟁의 북소리까지 고스란히 닮아 있다. 이란의 핵 프로그램을 둘러싼 한 편의 ‘소극’을 바라보는 마음이 편치 않은 이유다.
“아마추어의 사기극일 가능성 높다”
11월27일 <ap>이 ‘세계적인 특종’을 터뜨렸다. 기사가 작성된 장소는 국제원자력기구(IAEA) 본부가 있는 오스트리아 수도 빈이었다. “이란 핵과학자들이 핵폭탄 제조를 위한 컴퓨터 모의실험을 했으며, 그 결과로 폭발력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히로시마에 투하된 핵폭탄의 3배를 넘는다”는 내용이 뼈대였다. 증거는? 모의실험 결과를 담은 그래프를 <ap>이 ‘단독’ 입수했단다. 어디서 구했느냐고? “이란의 핵 프로그램에 비판적인 나라의 고위 관계자”란다. 흠.
취재원 보호를 위해 ‘익명’을 사용하는 것은 언론의 오랜 관행이다. 흔치 않은 것은, 기사에서 취재원의 신원은 물론 출신 국가까지 익명으로 처리했다는 점이다. <ap>은 “취재원은 이란의 핵 프로그램을 즉각 중단시켜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자료 공개를 결정했으며, (출신 국가를 포함해) 모든 것을 익명으로 처리해줄 것을 요청했다”고 밝혔다. <ap>이 ‘증거’로 공개한 그래프를 살펴보자.
좌우 종축으로 핵폭발 지속 시간에 따른 폭발력과 발산된 에너지양을 표시한 문제의 그래프는 이란의 공용어인 파르시어로 돼 있다. 그런데 단위를 나타내는 표식 등 주요한 내용이 영어로 함께 적혀 있다. 이를 두고 미 월간 의 로버트 라이트 기자는 트위터에 “사악하기 짝이 없는 비밀 핵폭탄 개발 실험에 대한 그래프까지 친절하게 영어를 병기한 걸 보니, 이란인들은 정말 남을 배려할 줄 아는 모양”이라고 적었다.
<ap>이 공개한 그래프의 진위는 아직까지 가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프에 담긴 ‘내용’에 대한 전문가들의 감식은 일치한다. 미국 핵과학자협회보는 <ap>의 보도 이튿날인 11월28일 인터넷판에서 “이른바 ‘이란 핵폭탄 실험’ 관련 그래프를 보면, 국가 단위에서 일하는 연구진이라면 도저히 범할 수 없는 심각한 오류가 있다”며 “이것만으론 이란이 핵무기 개발에 나섰다는 증거가 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이 매체의 지적을 좀더 들어보자.
“공개된 그래프에는 두 개의 곡선이 그려져 있다. 시간에 따른 에너지양 변화와 시간에 따른 폭발력 변화를 각각 나타낸다. 문제는 두 곡선의 결론이 들어맞지 않는다는 점이다. 에너지 곡선이 정확하다면, 그래프에 나오는 최대 폭발력은 제시된 것보다 무려 100만 배가량 낮게 나타나야 한다. …이 정도 그래프는 대학 고학년이나 대학원생 수준의 핵물리학 과목을 수강하면 누구나 그릴 수 있다. 인터넷만 뒤져도 찾아낼 수 있는 수준이다. 문제의 그래프는 엉터리로 분석한 것이거나, 아마추어의 사기극일 가능성이 높다.”
앞선 IAEA 폭로전의 배후에도…
남는 의문은 두 가지다. 누가, 그리고 왜 이런 짓을 벌였을까? 영국 일간지 은 12월10일치에서 “IAEA가 이란의 과거·현재의 핵 활동에 대한 조사를 벌이는 상황에서, 이란의 핵 위협을 부풀리려는 쪽에서 일부러 흘린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이 매체는 빈 외교가에서 만난 복수의 유럽연합(EU) 출신 외교관들의 말을 따 “앞선 IAEA 때도 ‘폭로전’이 잇따랐고, 그 배후에 이스라엘이 있었다. 이번에도 이스라엘 쪽이 무리수를 둔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현재까지 이란은 핵무기 개발 의혹을 사고 있는 파르친 핵시설에 대한 IAEA 사찰단의 접근을 차단하고 있다. 미국은 늦어도 내년 3월까지 IAEA 사찰단의 현지 조사를 허용하지 않으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를 다시 소집하겠다고 경고한 바 있다. 지난 몇 달 동안 ‘이란 핵시설 타격’을 들먹여온 이스라엘은 내년 1월22일 총선을 앞두고 있다. 대충, 그림이 그려진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ap></ap></ap></ap></ap></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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