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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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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검증 거쳐 무대에 오른 낯익은 얼굴들

50대 시진핑 주석·리커창 총리, 모두 60대인 5명의 상무위원 등 5세대 최고 지도부의 면면
등록 2012-11-20 22:38 수정 2020-05-03 04:27

중화인민공화국은 1949년 10월1일 수립됐다. 마오쩌둥을 중심으로 저우언라이·류사오치 등이 이끈 1세대 지도부는 1976년까지 신생국가의 초석을 닦았다. 토지개혁과 인민공사 설치 등 사회주의 경제체제의 기틀을 마련했지만,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문혁)으로 상징되는 ‘극좌적 오류’를 범하기도 했다.
중국 경제의 ‘지속 가능성’ 모색 이후
1976년 9월 마오의 사망과 함께 권력을 쥔 2세대 지도부는 덩샤오핑을 필두로 후야오방·자오쯔양 등이 주도했다. 이들은 문혁의 혼란을 수습하는 한편 ‘죽의 장막’으로 불리던 중국을 개혁·개방의 시대로 이끌었다. “흰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덩샤오핑의 ‘흑묘백묘론’은 ‘중국식 사회주의’를 내걸었던 당시 분위기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1989년 6월 톈안먼 광장 민주화 시위를 유혈 진압한 이후 사실상 2선으로 물러난 덩을 대신해 1992년 새로운 지도부가 출범했다. 장쩌민을 중심으로 리펑·주룽지 등이 이끈 3세대 지도부를 상징하는 구호는 ‘사회주의 시장경제’였다. 국유기업 개혁을 중심으로 고속성장의 발판을 마련한 이 시기는, 2002년 중국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과 함께 막을 내렸다.
개혁·개방 이후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어온 중국은 어느새 미국에 이어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 떠올랐다. ‘그늘’이 있을 수밖에 없다. 고도성장과 함께 빈부 격차와 부정부패가 갈수록 심각해졌다. 후진타오 주석과 원자바오 총리를 중심으로 꾸려진 4세대 지도부가 ‘화평·조화사회’를 기치로 내건 것도 이 때문이다. 이른바 ‘과학적 발전론’이란 이름으로 정립된 후 주석의 국가 지도이념은, 결국 중국 경제의 ‘지속 가능성’에 대한 모색이었다. 그리고….
11월15일 오전 11시53분께, 베이징 인민대회당에 시진핑을 선두로 리커창·장더장 등 중국 5세대 지도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전날 막을 내린 중국공산당 제18차 당대회에 이어, 2270명의 공산당 18기 중앙위원회 제1차 전체회의(18기 1중전회)를 열어 앞으로 중국 사회를 이끌어갈 7명의 정치국 상무위원을 선출한 게다. 예정 시각보다 1시간 남짓 늦게 무대에 오른 이들은 만면에 웃음을 띤 채 전세계와 첫 대면을 했다. 익히 예상했던, 오랜 검증과 훈련 기간을 거쳐 오늘에 이른 낯익은 얼굴들이었다.
시진핑(59) 신임 국가주석은 1953년 6월 산시성 푸핑에서 시중쉰 전 전국인민대표자회의 부위원장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혁명원로의 자녀를 뜻하는 ‘태자당’이란 수식이 그를 따라다니는 이유다. 문혁 기간 숙청된 부친이 1965년 급기야 구금되기에 이르자, 시진핑은 이듬해 ‘하방’의 고난 속으로 빨려들었다. 그는 2003년 <cctv>와 한 인터뷰에서 문혁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는데, 이 시절의 경험이 그를 ‘철저한 현실주의자’로 만들었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과거 신념을 말하던 때, 우리는 매우 추상적이었다. 내 세대 젊은이들은 홍위병의 달뜬 열정으로 기억될 것이다. 대단히 감정적이었고, 분위기에 휩싸인 시기였다. 문혁이란 이상이 실현 불가능하다는 점을 깨달았을 때, 환상도 여지없이 깨졌다.”
‘조선통’ 장더장, 전인대 상무위원장 유력
몇 차례의 도전 끝에 공산당 입당이 결정된 이듬해인 1975년 베이징의 명문 칭화대 화공과에 진학한 이후 시진핑의 정치 인생은 탄탄대로를 탔다. 1982년 허베이성 정딩현 당 부서기를 시작으로, 푸젠성 성장과 저장성 당서기 등 지방 요직을 두루 거쳤다. 그는 2007년 상하이시 당서기 겸 중앙당 정치국 상무위원(17기 1중전회)에 올라 일찌감치 차기 최고지도자로 물망에 올랐다. 이어 국가 부주석과 중앙군사위 부주석에 선임돼 5세대 지도부의 ‘1인자’ 자리를 굳혔다.
시진핑과 ‘쌍두체제’를 이룰 리커창(57) 신임 총리는 1955년 안후이성 딩위안현에서 태어났다. 문혁 당시엔 부친 리펑싼이 현장을 지낸 안후이성 펑양현에서 ‘지식청년’으로 4년여 하방 생활을 경험했다. 1978년 베이징대 법학과에 진학한 그는 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 활동에 열심이었다. 대학 졸업 뒤 유학 기회조차 마다하고 당 활동에 매진한 그는 1993년 38살의 젊은 나이로 공청단 중앙 제1서기(장관급)에 오른다. 이후 허난성 성장과 당서기, 랴오닝성 당서기 등으로 승승장구한 그의 ‘배경’엔 같은 안후이성 출신으로 공청단 선배인 후진타오 국가주석이 있다.
나머지 상무위원 5명은 모두 60대다. 5세대 지도부의 하반기가 시작될 5년 뒤 19기 당대회에서 이들 5명은 ‘나이 제한 규정’에 따라 일선에서 물러나게 된다. 서열 3위로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상무위원장이 유력한 장더장(66)은 옌볜대학 조선어과와 김일성종합대학 경제학과에서 공부한 대표적인 ‘조선통’이다. 장쩌민 전 주석의 후광으로 이미 15기 때부터 당 중앙위원으로 활동한 그는 보시라이 전 충칭시 당서기가 축출된 이후 후임으로 기용됐다.
전인대와 함께 이른바 ‘양회’로 불리는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정협) 주석이 유력한 위정성(67)은 하얼빈군사공정학원 미사일학과를 졸업한 엔지니어 출신이다. 산둥성 칭다오 시장·당서기, 후베이성 당서기를 거쳐 2007년부터 상하이시 당서기와 중앙정치국 위원으로 활동해왔다. 혁명원로인 그의 부친 위치웨이는 톈진시 당서기와 제1기계공업부 부장(장관)을 지냈고, 중국의 문호 루쉰의 스승으로 잘 알려진 증조부 위밍전은 국민당 총통 장제스와 사돈 사이다.
류윈산(64) 신임 중앙서기처 제1서기는 네이멍구 자치구에서 잔뼈가 굵은 인물이다. 1975~82년 신화통신 네이멍구 지사에서 기자 생활을 한 경력을 바탕으로 1993년 중앙 정치무대로 자리를 옮긴 뒤 주로 선전 분야에서 일했다. 중앙선전부 부부장을 거쳐, 2002년부터 중앙정치국 위원과 선전부장으로 활동해왔다.
왕치산(64) 신임 중앙기율검사위 서기는 7명의 상무위원 가운데 입당(1983년)이 가장 늦다. 역사학도 출신으로 사회과학원 연구원 생활을 했던 그는, 당적 취득과 함께 경제 분야로 무대를 옮겼다. 이후 농업신탁주자공사 총경리, 인민은행 부행장 등 경제 분야 요직을 두루 거친 그는 2004년 베이징 시장을 거쳐 2007년부터 국무원 부총리를 맡아왔다.
전역의 크고 작은 ‘톈진’이 당면 과제
경제 담당 상무부총리 선임이 예상되는 장가오리(65)는 1970년 석유부에 딸린 정유공장 노동자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이래 15년가량 국영 석유회사에서 일했다. 이어 1985년 광둥성 경제위 주임과 당서기를 거쳐, 2002년 산둥성 성장과 당서기에 올랐다. 2007년부터는 중앙정치국 위원 겸 톈진시 당서기를 맡아왔다. 막대한 공적 투자를 통한 초고속 성장을 추구하는 이른바 ‘톈진 모델’이 그의 ‘작품’이다. 실제 지난해 톈진시는 무려 16.4%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했다.
고도성장은 ‘그늘’을 남기기 마련이다. 는 11월5일치에서 “장가오리가 톈진시를 맡은 이후 지역총생산 대비 부채비율이 136%까지 치솟았다”고 전했다. 이미 톈진의 지역총생산에서 고정자산 투자 비율이 60%를 넘어섰다. 공공부채는 갈수록 쌓이고 있다. 하긴 개혁·개방 이후 중국 전역에 크고 작은 ‘톈진’이 만들어졌다. 내년 3월부터 중국을 책임질 5세대 지도부의 ‘당면 과제’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cc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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