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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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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탄이 쏟아졌고 아기는 기형입니다

이라크 눈먼 전쟁은 끝났다지만, 팔루자 일대에서 14살 소아암 환자는 12배 늘고 바스라 병원에서 태어난 기형아는 17배 증가
등록 2012-11-03 12:30 수정 2020-05-03 04:27

다시, 전쟁은 끝났다. 지난해 12월18일, 마지막 미군이 이라크 남부 국경을 넘어 쿠웨이트로 향했다. 8년하고도 10개월여 만에 총성이 멈췄다. 포연도 이내 잦아들었다. 점령군이 떠난 빈자리를 차지하려는 이들의 아귀다툼은 여전하지만, 삶은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 그렇게 믿었다. 그런데….

‘치안 안정화’ 위한다며 쏟아붓다
바스라. 이라크 남부, 이란·쿠웨이트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고대의 항구도시다. 수메르 문명의 역사를 오롯이 간직한 그곳은 압바시드 왕조 시절 대양을 향해 항해에 나선 아라비아 소년 신드바드의 모험이 시작된 곳이기도 하다. 성서가 전하는 ‘에덴동산’의 무대가 그곳이라는 주장도 전해진다. 주민 절대다수가 시아파인 바스라의 2012년 현재 추정 인구는 약 200만 명, 수도 바그다드에 이어 이라크의 제2대 도시로 꼽힌다.
팔루자. 이라크 서부, 바그다드에서 서쪽으로 약 70km 떨어진 안바르주의 들머리에 자리한 고대도시다. 도시의 역사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탄생시킨 바빌로니아 왕국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모스크의 도시’로 불릴 정도로 200여 곳의 크고 작은 이슬람 사원이 도시 안팎에 밀집해 있다. 팔루자는 32만여 명(2010년 기준)의 수니파 주민들이 대대로 터전을 이루고 살아왔다.
2003년 3월20일 개전 초기부터, 미·영 연합군은 국경 지역에 교두보를 마련하려고 바스라에 맹폭을 퍼부어댔다. 이라크 남부 지역의 작전을 주도한 영국군 제7기갑여단이 도심을 장악한 것은 그해 4월6일이다. 쿠웨이트 국경을 넘어 병력과 무기가 쏟아져 들어왔고, 이내 저항이 시작됐다. 소수 수니파를 주축으로 한 후세인 정권에 갖은 박해를 당해온 바스라의 시아파 주민들은 애초 진주하는 미·영군에게 박수를 쳤었다.
그해 4월21일 바스라 도심을 가른 거대한 폭탄공격으로 74명이 한꺼번에 목숨을 잃었다. 점령군은 곧 ‘치안 안정화’ 작전에 돌입했다. 포탄이 춤을 췄고, 폭탄이 비처럼 퍼부어졌다. 그럼에도 상황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아니, 되레 나빠졌다. 다시 포탄과 폭탄이 동원됐다. 영국군이 이라크 당국에 바스라 지역 치안권을 넘겨준 것은 2007년 12월16일, 침공 4년9개월여 만의 일이다. 도시는 초토화된 터다.
팔루자의 운명은 이와는 조금 다르게 펼쳐졌다. 개전 초기만 해도 점령군은 그곳에 별반 눈길을 두지 않았다. 사담 후세인 정권의 공화국수비대는 침공이 시작된 직후 모습을 감췄다. 이들이 두고 간 각종 무기류는 고스란히 주민들 속으로 스며들었다. 바그다드 중심가에서 후세인의 동상이 끌어내려진 뒤 도시를 유린한 것도 미군이 아니었다. 팔루자에서 지척인 아부그라이브 교도소에 수감됐다가 막판으로 몰린 후세인 정권이 옥문을 열자 탈출한 범죄자들이 도시로 몰려와 약탈을 자행했다.
사달이 난 것은 지역 부족 원로들이 새 시장을 선출한 뒤부터다. 이윽고 미군이 도시에 모습을 드러냈다. 시 외곽에 자리한 버려진 바트당 본부 건물에 주둔한 점령군은 장기 주둔 채비를 갖추기 시작했다. 2003년 4월28일 점령군의 야간 통행금지령을 어기고, 주민 200여 명이 도시 한가운데에 자리한 중학교 건물로 모여들었다. ‘학기를 다시 시작하라’고 요구하기 위해서였다. 건물을 지키고 있던 미군 제82공정여단 병사들의 총구에서 불똥이 튀었다. 삽시간에 주민 17명이 목숨을 잃었고, 70여 명이 다쳤다.

‘최전선’ 팔루자, 사살된 ‘저항세력’ 1350명
분노가 들끓었다. 사건 발생 이틀 뒤 대규모 항의시위가 벌어졌다. 미군은 다시 발포했다. 주민 2명이 추가로 목숨을 잃었다. 불만의 한숨이 저항의 결기로 모아지기 시작했다. 곳곳에서 크고 작은 저항 공격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2004년 3월31일 미국 민간 용병업체 ‘블랙워터’ 직원 4명이 팔루자 들머리에서 기습공격을 당했다. 저항세력은 이들의 주검을 불살라 도시 외곽의 교량에 매달았다. 미 점령 기간 내내 ‘저항의 심장부’로 불렸던, 팔루자는 이렇게 다시 태어났다.
‘확고한 결심’ ‘유령의 분노’, 대규모 군사작전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도시를 ‘점령했다’고 말하는 순간, 여지없이 저항세력의 반격이 가해졌다. 2004년 11월7일 시작돼 12월23일 막을 내린 작전명 ‘유령의 분노’ 과정에서 미군이 사살했다고 주장한 저항세력만도 1350명을 헤아린다. 이 작전으로 미군이 입은 인명 피해도 사망 95명, 부상 560명 등으로 적지 않았다. 당시의 상황은 이탈리아 출신 지그프리도 라누치 감독이 제작한 다큐멘터리 영화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제목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 ‘팔루자, 감춰진 학살.’
이후에도 오랫동안 팔루자는 ‘최전선’과 동의어였다. 알카에다를 비롯한 ‘다국적 저항세력’이 뿌리를 내린 지역도 바로 그곳이었다. 팔루자 지역의 ‘군사작전권’이 새로 구성된 이라크 육군 제1사단으로 넘어간 것은 2006년 12월이지만, 이후에도 점령군은 도시를 길들이려고 무진 애를 써야 했다. 도시는, 더 이상 도시랄 것도 없게 됐다. 영국 일간 은 2005년 11월10일치에서 “팔루자의 주택 5만 채 가운데 3만6천여 채가 파괴됐다”고 전했다.
흉흉한 소식은 미군 철수 이전부터 심심찮게 들려왔다. 영국 얼스터대학 분자생물학과 크리스 버스비 교수 연구팀은 2010년 7월 에 기고한 논문에서 “2004년 이후 팔루자 일대에서 14살 이하 소아암 환자가 12배나 증가했다”고 썼다. 연구팀은 특히 “발생한 암의 종류를 분석해보니, 폭탄이 방출한 전리방사선과 우라늄 낙진에 노출됐던 일본 히로시마 원폭 생존자들과 유사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지적했다. 참담한 일이었다.
고발은 이어진다. 영국 일간 는 지난 10월14일치에서 이라크·이란·미국 등 3개국 연구팀이 공동작업해 에 기고한 논문 내용을 따 “(이라크 전쟁 당시 집중 포화를 당한) 바스라와 팔루자 일대에서 조사를 벌인 결과, 유산과 기형아 출산율이 급증하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고 전했다.
연구팀이 바스라산부인과병원 기록을 분석한 결과, 전투가 가장 치열했던 2003년 이 병원에서 태어난 기형아는 1천 명당 20명꼴이었다. 이는 전쟁 10년 전에 견줘 17배나 늘어난 수치란다. 이후 2010년까지 7년 동안에도 기형아 출산율은 60% 이상 폭증했다. 지난해 이 병원에선 신생아 1천 명 가운데 37명이 심장기형·뇌기능장애·사지기형 등 선천적 기형을 안고 태어났다.

2007~2010년 유아 절반 선천성 기형
팔루자에선 2007~2010년 조사 대상 유아 가운데 절반가량이 선천성 기형을 안고 태어났다. 미국의 침공 이전까지만 해도 팔루자의 기형아 출산율은 2% 남짓에 그쳤단다. 2004년 미군의 집중 공세 이후 2년 동안 무려 45%에 이르렀던 유산율은 군사작전이 잦아든 이후인 2007~2010년에도 평균 15%를 넘어선 것으로 확인됐다.
연구팀을 이끈 모즈간 사바비에아스파하니 미 미시간대 교수(공중보건학)는 “장기간 지속된 무차별 폭격으로 납·수은·열화우라늄 등 중금속 오염이 치명적 수준에 이르러 기형아 출산율과 유산율이 급증한 것으로 나타났다”며 “이라크 공중보건이 위기로 치닫고 있다”고 지적했다. 눈먼 전쟁이 남긴 치명적 유산이다. 오염은 계속된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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