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합중국 헌법은 표현의 자유를 보장한다. …정부는, 기업이 특정 후보를 지지하기 위해 정치자금을 사용하는 것을 막아서는 안 된다.’
2010년 1월21일 미국 대법원은 이른바 ‘시티즌 유나이티드 대 연방 선거관리위원회’ 사건에 대한 판결을 내렸다. 수정헌법 제1조(표현의 자유)의 수혜 대상을 기업까지 넓힌 이날의 결정은 미 대법원의 ‘색깔’을 극명히 드러냈다. 대법관 9명 가운데 공화당 행정부 시절 임명된 5명이 다수 의견을 낸 반면, 민주당 행정부가 임명한 4명은 소수 의견을 냈다. 이날 미 대법원이 내놓은 판결문은 모두 180쪽, 이 가운데 소수 의견이 90쪽 분량이었을 정도다.
공화당 다수의 대법원, 판례 뒤집어
앤서니 케네디 대법관은 다수 의견에서 “수정헌법 제1조가 조금이라도 효력을 발휘하고 있다면, 의회는 어떤 경우라도 시민 또는 시민들의 결사체가 정치적 의사표현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벌금을 부과하거나 투옥하는 내용을 담은 법률을 만들어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기업이 특정 후보를 지지하기 위해, 해당 후보와 조율을 거치지 않은 상태에서, 독립적으로 선거자금을 사용하는 것은 정치적 의사표현에 해당한다”고 덧붙였다.
반면 반대 의견 집필을 맡은 존 폴 스티븐스 대법관은 “기업에 인간과 똑같은 표현의 자유를 허용하는 것은 중대한 오류”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기업의 자금이 자유롭게 정치권으로 흘러든다면, 정치마저 시장 논리에 휘둘려 민주주의 자체가 위협을 받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앞서 미 대법원은 1990년 ‘오스틴 대 미시간 상공회의소’ 사건 판결에서 특정 후보에 대한 지지 또는 반대를 위해 기업이 정치자금을 사용하는 것을 금지한 선거법에 대해 합헌 결정을 내렸다. 또 2002년 민주-공화 양당의 합의에 따라 의회를 통과한 개정 정치자금법(매케인-파인골드법)의 위헌 여부를 다툰 ‘매코넬 대 연방 선거관리위원회’ 사건에서도 같은 취지의 결정을 내렸다. ‘시티즌 유나이티드 대 연방 선거관리위원회’ 사건이 판례를 뒤집은 게다. 당시 는 “대법원의 이번 판결로 미국 선거판 자체가 바뀌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 것도 이 때문이다. ‘경고’는 쉽사리 현실이 됐다.
경제전문지 는 해마다 ‘미국 400대 부자’ 순위를 발표한다. 이 매체가 지난 9월 발표한 올해 순위표를 보자. 자산총액 310억달러로, 공동 4위에 나란히 이름을 올린 이들이 있다. 바로 찰스 코크(76), 데이비드 코크(72) 형제다. 부친 프레드 코크가 1925년 창업한 회사를 물려받아, 정유·화학 부문을 뼈대로 소비재까지 사업 영역을 넓히며 형제가 운영하고 있는 ‘코크 인더스트리스’는 지난해 매출 규모만도 150억달러에 이른다. 형제가 지난해 벌어들인 돈만도 각각 60억달러에 이른단다. ‘코크 인더스트리스’는 다국적 곡물 메이저 업체인 ‘카길’에 이어 미국에서 두 번째 큰 ‘비상장 기업’으로 꼽힌다. 말하자면, 개인이 소유한 회사란 뜻이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보자.
오바마 비난글, 롬니 지지글 동봉
미 진보매체 는 지난 10월14일 인터넷판에 흥미로운 기사를 올렸다. ‘코크 인더스트리스’ 계열사인 ‘조지아 퍼시픽’의 임직원 4만5천여 명 전원에게 최근 회사 쪽이 보낸 ‘선거정보’ 우편물이 배달됐다는 게다. ‘코크 인더스트리스’ 전문 경영인인 데이비드 로버트슨 회장이 쓴 ‘임직원들에게 드리는 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그간 치러진 모든 대통령 선거가 중요하고 역사적이라고 말해왔지만, 다가오는 대선이야말로 미국의 미래 세대가 어떤 세상을 물려받을 것인가를 결정하게 될 중요한 선거입니다. 수천억달러의 자금을 빌어다 일부 우호적인 기업에 보조금을 주려는 후보가 당선돼선 안 됩니다. 기업에 전례가 없을 정도의 규제 부담을 지우려는 후보가 당선돼선 안 됩니다. 중요한 신규 토목공사를 가로막거나 늦추려는 후보도 안 됩니다. 자유무역을 방해하는 후보도 마찬가집니다. 이런 후보가 당선된다면, 우리는 물론 협력업체 임직원들까지 고통을 받게 될 것입니다. 기름값은 치솟고, 물가는 급등할 것이며….”
회장의 편지와 함께 배달된 ‘선거정보’에는 ‘코크 인더스트리스’가 지지하는 후보들의 명단이 포함돼 있었다. 로버트슨 회장은 “상당수 직원들의 요청에 따라, 코크 그룹 계열사와 코크 그룹 정치행동위원회(PAC)가 지지하기로 결정한 공직 후보자 명단을 통보한다”고 적었다. 그는 또 “언제나처럼, 어떤 후보를 지지할 것인지에 대한 판단은 오로지 여러분들의 몫”이라며 “회사는 정치 성향에 따라 지지 후보를 결정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여러분이 우리 사회의 경제와 미래에 대해 염려하고 있다면, 그리고 모든 미국인의 삶의 질이 나아지기를 바란다면, 후보자의 소속 정당이 아니라 원칙과 소신을 살핀 뒤 투표하시기 바란다”며 “우리의 미래가 거기에 달려 있다”고 강조했다.
코크 쪽이 지지 의사를 밝힌 후보자 명단의 맨 위쪽엔 ‘밋 롬니, 폴 라이언 공화당 정·부통령 후보’가 적혀 있었다. 그 아래로 적힌 연방 하원의원과 주 상·하원의원 후보자들도 모두 공화당 소속 일색이었다. 는 “이 밖에 찰스 코크가 쓴 오바마 대통령에 대한 비난 글과 데이비드 코크가 쓴 롬니 후보 지지 글도 동봉됐다”고 전했다.
코크 형제만 그런 것이 아니다
‘표현의 자유’는 하늘이 인간에게 내린 선물이다. 그 선물을 기업이 가로챘다. 어느새, 선거도 사고판다. 돈이 곧 민주주의인 세상이 됐다. 인터넷 매체 의 지난 10월9일치 보도를 보면, 임직원들과 ‘선거정보’를 공유한 것은 코크 형제뿐만이 아니다. 플로리다주에서 ‘웨스트게이트 리조트’란 업체를 운영하고 있는 억만장자 부동산 개발업자 데이비드 시걸도 최근 7천 명에 이르는 임직원 전원에게 선거 관련 전자우편을 보냈단다.
이 매체가 공개한 전자우편 전문에서 시걸은 “고용주로서 제가 여러분에게 누구를 찍으라고 말할 순 없으며, 여러분이 선택한 후보자에게 투표하는 것을 가로막을 권리도 없다”면서도 “똑같은 대통령과 4년을 더 보내야 한다는 점은 여러분의 고용 안전에 중대한 위협이 될 것”이라고 을러댔다. 시걸은 전자우편을 보낸 이유에 대해 “작금의 경제 상황에 대한 분석을 종업원들과 나누기 위해서”라고 답했단다. A4 용지 2쪽 분량이 넘는 긴 전자우편을 시걸은 이렇게 마무리했다.
“현 대통령이 밝힌 것처럼 저 개인이나 우리 회사에 추가 세금이 부과된다면, 회사 규모를 줄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저는 카리브의 해변으로 은퇴해 더 이상 종업원 걱정을 하지 않을 작정입니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다음 대통령, 이재명의 민주당 아닌 ‘민주당의 이재명’이라야 된다
서울 도심에 10만 촛불…“윤석열 거부, 민주주의 망가질 것 같아”
이 풍경이 한국이라니…초겨울 다음 여행 후보지 3곳
김영선 두 동생, 창원산단 발표 한달 전 인근 주택 ‘공동구입’
“못 판 걸 어쩌라고”…과일 도매 10년, 오늘도 사장님한테 돈을 떼였다 [.txt]
위성보다 정확한 바다거북…탄소 먹는 해초군락 찾아낸다
한동훈, 정년 연장이 청년 기회 뺏는다는 지적에 “굉장히 적확”
‘미친놈’ 소리 들으며 3대가 키우는 정원, 세계적 명소로
‘TV 수신료 통합징수법’ 국회 소위 통과에…KBS 직능단체 “환영”
어도어와 계약 해지한 뉴진스, 왜 소송은 안 한다 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