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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승1패, 최후의 승자는?

대하드라마 같은 미국 대선의 클라이맥스 후보 TV 토론회, 오바마와 롬니 각각 한 차례씩 우세… 역사상 최다 시청자 지켜봤고 “가장 격렬했다” 평가받는 토론, 마지막 승부에 대선 당락 영향
등록 2012-10-23 20:46 수정 2020-05-03 04:27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초선 상원의원이던 2007년 2월10일 대권 도전을 선언했다. 2008년 11월4일 치러진 대선에서 존 매케인 공화당 후보를 제치고 당선될 때까지, 그는 1년11개월 동안 ‘후보자’ 신분이었다. 밋 롬니 공화당 대선 후보의 출마 선언은 이보다 늦은 편이다. 대선주자로 공식 등장한 것이 2011년 6월2일이니 말이다.

케네디와 부시, 토론회 역전승
미 대선은 한 편의 ‘대하드라마’다. 출마 선언과 당내 경선, 후보 지명을 위한 전당대회와 선거운동, 그리고 본선을 치르기까지 줄잡아 1년6개월 이상 걸린다. 그 길고도 지루한 드라마의 클라이맥스는, 본선을 한 달 남짓 앞두고 시작되는 대선 후보 초청 텔레비전 토론회다. 몇 차례 이어지는 토론을 통해 후보자들은 자신의 공약을 유권자에게 알리고, 상대의 약점을 파고들며 자신을 부각시킨다. 민주-공화 양당이 1987년 ‘대통령 텔레비전 토론 위원회’(CPD)란 비영리 법인을 따로 꾸려, 대선 토론을 독립적으로 진행·관리하도록 맡겼을 정도다.
사상 첫 대선 토론은 1960년 9월26일 의 시카고 지역 협력사인 스튜디오에서에서 열렸다. 민주당 후보로 나선 존 케네디 상원의원과 공화당 후보인 리처드 닉슨 부통령 간의 대결이었다. 방송용 분장마저 마다하고 맨얼굴로 카메라 앞에 앉은 닉슨 부통령은, 젊은 매력을 발산하며 열변을 토한 케네디 의원을 당해내지 못했다. 토론 직전까지 1%포인트 우위를 보이던 닉슨 부통령의 지지율은, 네 차례 토론이 마무리된 그해 10월 말 4%포인트 열세로 뒤집혔다. 두 후보의 본선 지지율 격차는 단 0.2%, 케네디 의원의 승리였다.
텔레비전 토론이 정례화한 것은 제럴드 포드 대통령(공화당)과 지미 카터 조지아주 주지사(민주당)가 맞붙은 1976년 대선 때부터다. 1964년 대선 때는 린든 존슨 민주당 후보가, 1968년과 1972년 대선에선 리처드 닉슨 공화당 후보가 각각 텔레비전 토론을 거부했다. 1960년 첫 토론까지 포함하면, 지금까지 모두 10차례 텔레비전 토론이 열린 게다.
토론은 유권자에게 얼마나 영향을 끼칠까? 여론조사 전문기관 갤럽이 2008년 9월25일 내놓은 자료를 보면 예상보다 크지 않다. 갤럽의 분석 결과, 1960~2004년 치러진 대선 토론 가운데 당락에 영향을 끼친 경우는 단 두 차례에 그쳤단다. 케네디-닉슨 짝이 맞붙은 1960년 첫 토론 때와 앨 고어 부통령(민주당)과 조지 부시 텍사스 주지사(공화당)가 격돌한 2000년 대선 때다. 두 차례 모두 격차가 크지 않던 두 후보의 지지율이 텔레비전 토론을 기점으로 뒤집혀, 결국 본선에선 후발 주자가 박빙의 승리를 거뒀다. 2008년 대선을 포함한 나머지 여덟 차례는 기존 판세가 그대로 유지됐다.
‘11번째’로 기록될 2012년엔 어떨까? 올 대선 토론은 △10월3일(국내정책) △10월16일(국내정책·외교정책) △10월22일(외교정책) 등 모두 세 차례다. 첫 번째와 세 번째는 사회자의 질문에 답한 뒤 서로 토론을 벌이는 방식을, 두 번째 토론은 방청에 나선 유권자의 질문에 후보자가 직접 답하고 토론하는 이른바 ‘타운홀미팅’ 방식을 채택했다.

1차 토론 뒤 갑자기 역전된 판세
‘오바마 대통령은 대체 어디에 있었던 건가?’ 지난 10월3일 1차 토론이 끝난 직후 이 인터넷판에 올린 기사의 제목이다. 방송은 “오바마 대통령이 불참한 채, 롬니 후보 혼자 토론을 벌이는 것처럼 보였다”고 꼬집었다. 실제 오바마 대통령은 이날 롬니 후보의 끝없는 공세에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았다. 불과 4년 전 보여줬던 격정적인 언변도, 상대 후보의 약점을 파고드는 저돌성도 찾아볼 수 없었다.
시청률 조사기관 닐슨이 집계한 자료를 보면, 미 전역에서 모두 6720만 명이 이날 토론을 지켜봤다. 1980년 지미 카터 대통령과 로널드 레이건 후보의 1차 토론(8060만 명) 이후 최대치란다. <뉴욕타임스>는 “여기에 인터넷 등을 통해 토론을 지켜본 이들까지 합산하면, 시청자 규모는 7천만 명을 훌쩍 뛰어넘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오바마 대통령 지지자들로선 아연할 일이었다.
여론의 흐름도 뒤집혔다. 1차 토론 직전까지 3~4%포인트 우위를 보였던 오바마 대통령의 지지율이 급격히 꺾이더니, 10월9일을 기점으로 롬니 후보가 1~2%포인트 차이로 박빙의 우위를 보이기 시작했다. 2차 토론 당일인 10월16일 갤럽이 내놓은 여론조사에선 롬니 후보가 51%의 지지율로, 45%에 그친 오바마 대통령을 6%포인트 차까지 따돌린 것으로 나타났다. 선거운동이 본격화한 이후 최대 격차다.
‘그가 돌아왔다.’ 10월16일 뉴욕주 햄스티드에서 열린 2차 토론 직후 인터넷 매체 <허핑턴포스트>가 올린 기사의 제목이다. 안팎의 비난 속에 무대에 오른 오바마 대통령은 이날 완연히 달라져 있었다. 4년 전 첫 대선 도전 당시의 모습이 여지없이 되살아났다. 90분 남짓 진행된 이날 토론을 두고, 등은 “역사상 가장 격렬했던 대선 토론으로 기록될 것”이라고 전했다.
실제 이날 토론에서 두 후보는 서로에게 손가락질을 해대며 목소리를 높였다. 쉼없이 무대를 가로지르며 상대방의 주장을 조목조목 비판했다. 롬니 후보는 “앞으로 4년을, 지난 4년처럼 살 순 없다”고 강조했고, 오바마 대통령은 “(경제를 파탄 낸) 부시 행정부 시절로 돌아가선 안 된다”고 맞불을 놨다. 롬니 후보가 리비아 벵가지 테러사건 등과 관련한 사실관계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는 등 ‘자충수’를 두긴 했지만 말 그대로 팽팽한 승부였다.
텔레비전 토론은 애초 현직 대통령에게 불리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4년 전 내놨던 공약을 얼마나 충실히 이행했는지도 알려야 하고, 이루지 못한 약속에 대한 이해도 구해야 한다. ‘집권 2기’의 청사진을 내놓으며, 왜 4년이 더 필요한지도 설명해야 한다. 반면 도전자는 현직 대통령의 문제점을 파고들며 “내가 더 잘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 그만이다. 10월6일 첫 번째 토론은 그런 식으로 흘러갔다. 두 번째 토론에서도 롬니 후보는 같은 전략을 구사했다. 그가 이날 가장 많이 사용한 표현은 “(내가) 그 ‘방법’을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대선까지 3주, 최대의 고비
여론의 반응은 어땠을까? 토론 직후 발표된 의 여론조사 결과, 오바마 대통령(46%)이 롬니 후보(39%)를 압도한 것으로 나타났다. 조사에서도 오바마 대통령(37%)이 롬니 후보(30%)를 따돌렸다. 이를 두고 <뉴욕타임스>는 10월17일치 사설에서 “첫 번째 토론 이후 민주당 지지자 상당수는 ‘과연 오바마 대통령이 4년 더 백악관 생활을 하고 싶은 마음이 있기나 한가’를 궁금해했다”며 “오바마 대통령은 두 번째 토론에서 이런 지지자들의 우려를 말끔히 씻어냈다”고 평했다.
대선까지 앞으로 남은 기간은 약 3주, 토론은 단 한 차례뿐이다. 여론조사 결과는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박빙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앞으로 4년이, 지난 4년보다 나을 것’이란 확신을 줘야 한다. 롬니 후보로선 부시 행정부와 ‘롬니 행정부’의 차이를 설명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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