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t.’ 청소노동자 75명이 동원돼도 열흘이 걸리는 양이란다. ‘쓰레기’의 정체는 선거 벽보다. 그리스가 한 달여 만에 두 번째 총선을 치른 다음날인 지난 6월18일 현지 영자지 는 기오르고스 카미니스 아테네 시장의 말을 따 “각 정당이 시내 전역의 가로등과 가로수 등에 불법 선거 벽보를 엄청나게 내붙였다”며 “떼면 또 붙이고 떼면 또 붙여대는 통에 선거가 끝나고도 사흘은 더 청소 작업을 해야 할 지경”이라고 전했다. 선거가 끝나고도 산처럼 쌓인 것은 쓰레기뿐이 아니라는 데 그리스의 고민이 있다.
정부가 구성되면 혼란이 수습되나
지난 6월17일 치른 그리스 재선거의 결과는 안팎의 예상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구제금융에 딸린 긴축정책에 대한 찬반을 놓고 팽팽하게 맞섰던 신민주당(ND)과 급진좌파연합(SYRIZA·이하 시리자)이 각각 29.66%와 26.89%의 지지율로 1위와 2위를 차지했다. 두 당에 이어 △사회당(PASOK) 12.28% △독립당(ANEL) 7.51% △황금새벽당(XA) 6.92% △민주좌파당(DIMAR) 6.26% △공산당(KKE) 4.5%를 각각 기록했다.
그리스 선거법은 연립정부 구성에 힘을 실어주려고 제1당(또는 연정 협상 주도 정당)에 의회 300석 가운데 50석을 ‘보너스’로 내주도록 정하고 있다. 나머지 250석은 지지율에 따라 배분된다. 이에 따라 두 당의 지지율 격차는 2.77%에 그쳤지만, 신민주당은 129석을 얻는 반면 시리자는 71석에 그쳤다. 앞서 지난 5월6일 치른 1차 총선 때는 신민주당이 108석(18.85%), 시리자가 52석(16.78%)을 차지했다. 두 당 모두 ‘약진’을 한 셈이다.
“시리자가 참여하지 않는 연립정부 구성은 의미가 없다. 시리자가 불참한다면, 우리도 참여하지 않겠다.” 에반겔로스 베니젤로스 사회당 대표는 개표가 중반을 넘긴 6월18일 밤 기자회견을 열어 이렇게 밝혔다. 지난 5월 선거에서 13.18%(41석)의 지지율을 얻은 사회당은 이번에도 12.28%(33석)를 얻는 데 그쳤다. 사회당은 2009년 4월 총선 당시 42.92%의 지지율로 단독 과반을 훌쩍 넘긴 160석을 차지한 바 있다. 이쯤되면 ‘몰락’이다. 생각이 복잡할 수밖에 없었을 터다.
하지만 사회당은 쉽게 말을 바꿨다. “시리자의 연정 참여를 적극 독려하겠다”고 한발 물러서는가 싶더니, 결국 민주좌파당과 함께 ‘시리자 없는 연정’에 참여했다. 연정 협상 사흘 만인 6월20일 안도니스 사마라스 신민주당 대표를 총리로 하는 연립정부가 출범해, 지난해 11월 게오르기오스 파판드레우 총리 정부가 물러난 이래 223일 만에 그리스에 ‘선출된 정부’가 들어서게 된 게다. 혼란은 이렇게 수습되는 건가? 시원스런 대답이 없다.
따져보면, 그리스 연립정부에 참여한 3개 정당은 이념적으로 닮은 점이 없다. 신민주당은 중도 우파로 분류된다. 민주좌파당은 온건 좌파, 사회당은 전형적인 좌파 정당이다. 유로존 잔류에 대한 의지를 빼곤, 정책적으로 공통분모를 찾기 어렵다. 이번 재선거를 통해 세 당이 장악한 의석은 모두 179석이다. 지난 5월 선거에서 세 당이 얻은 의석은 168석이었다. 그때도 지금처럼, 연정 구성이 가능했다는 얘기다. 달라진 건 뭔가?
구제금융 트로이카, 재협상 의지 약해
“연정 파트너로 참여는 하겠지만, 사회당 출신 의원들이 내각에 등용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베니젤로스 사회당 대표는 6월20일 연정 구성 협상 타결 직후 등과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혔다. 그는 “그리스에 마침내 정부가 들어섰고, 지금으로선 그 점이 가장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제3당’으로 연정에 참여한 민주좌파당도 이날 새벽까지 이어진 마라톤 당내 회의 끝에, 사회당과 마찬가지로 소속 의원의 입각을 거부하기로 결정했다. 연정 파트너들이 출발부터 ‘정권’과 거리두기에 나선 셈이다. 신민주당으로선 곤혹스러울 터다.
사마라스 총리 정부의 최우선 과제는 구제금융 조건에 대한 재협상이다. 유럽연합(EU)·유럽중앙은행(ECB)·국제통화기금(IMF) 등 이른바 ‘트로이카’가 구제금융의 전제로 내세운 초긴축 정책을 완화해야 막혔던 경제성장의 숨통을 틔울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으로선, ‘바깥 사정’이 썩 좋아 보이지 않는다.
더욱 암울한 건 “긴축 기조가 누그러진다 해도, 큰 효과를 기대하기는 어렵다”는 분석이 나온다는 점이다. 재정적자를 줄이려고 긴축에 나섰는데, 그로 인해 내수가 줄어 경제성장의 발목이 잡혔다. 이에 따라 일자리가 줄어 다시 소비가 위축됐고, 이는 곧 세수 감소로 이어져 재정적자 부담을 가중시켰다. 쉽게 빠져나오기 어려운 ‘긴축의 역설’이다. 한때 ‘모범생’으로 꼽히던 아일랜드가 그 극명한 사례다.
“그리스의 역할모델이 있다. 바로 아일랜드다.” 장클로드 트리셰 전 ECB 총재는 2010년 3월 유럽의회에 출석해 이렇게 주장했다. 그는 “아일랜드는 극도로 심각한 위기에 직면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며 “이제 그 성과를 모두가 인정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지난해 11월엔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엔다 케니 아일랜드 총리를 만난 자리에서 “구제금융의 조건을 충실히 이행하는 탁월한 모범을 만들어냈다”고 치켜세웠다. 비슷한 시기 니콜라 사르코지 당시 프랑스 대통령은 아예 “아일랜드가 위기에서 거의 벗어났다”고 강조했다. 현실은 어떨까?
모범생, 체질은 달라지지 않았다
IMF는 지난 6월13일 아일랜드 구제금융 관련 정례 보고서를 내놨다. 2010년 11월 구제금융 지원 이후 벌써 여섯 번째 보고서다. 모두 88쪽으로 작성된 보고서에서 IMF는 “아일랜드는 구제금융의 전제조건을 모두 충족시켰으며, 재정·금융·구조 개혁도 일관되게 추진해왔다”면서도 “하지만 여전히 낮은 성장률과 높은 실업률에 허덕이고 있으며, 긴축재정에 대한 대중적 반발도 극심한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IMF가 언급한 지표만 놓고 봐도 상황의 위중함은 어렵잖게 가늠된다. 지난 4월 말 9년 만기 아일랜드 국채 금리는 약 7.4%였다. 구제금융을 받기 두 달 전인 2010년 9월 국채 발행 당시보다 높은 수준이다. 아일랜드 경제의 미래에 대한 ‘시장의 불신’이 여전하다는 뜻이다. IMF는 보고서에서 “최근 3년 새 아일랜드 경제는 사실상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며 “지난해 상반기 수출 호조로 실질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이 0.7%를 기록하긴 했지만, 하반기 들어 내수와 투자가 급속히 위축돼 실질 GDP는 되레 2.5% 줄었다”고 지적했다.
다른 지표도 잿빛이다. 2007년 이후 처음으로 지난해 4분기에 고용이 0.5% 늘었는데, 올 1분기 들어 실업률이 지난해 같은 기간과 마찬가지인 14.4%를 기록했다. 이를 두고 IMF는 “25살 이하 청년층 실업률이 지난해 평균 10%가량 줄어들어 평균 실업률이 안정세를 보였다”며 “이는 (일자리를 찾지 못한) 청년층이 지속적으로 취업을 위해 해외로 빠져나가는 현상과 관련 있을 수 있다”고 분석했다. 실제 는 지난해 12월5일치 기사에서 “2011년에만 아일랜드 청년 4만여 명이 일자리를 찾아 해외로 이주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전했다.
물가는 지난해 같은 기간에 견줘 1.75% 상승했지만, 집값은 지난 4월을 기준으로 전년 대비 16.4% 추락하는 등 폭락세가 이어지고 있다. 이미 부동산 거품이 절정에 이르렀던 2007년 9월의 절반 수준까지 내려갔단다. 눈에 띄는 경기회복 기미가 보이지 않는 한, 치솟는 이자를 감당하지 못한 투자자들의 투매는 계속될 터다. 아일랜드도, 그리스도, 스페인과 이탈리아 등도 마찬가지다.
“그리스 정부의 금고가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재선거를 열흘여 앞둔 지난 6월5일 는 이렇게 전했다. 신문은 “최근 1300억유로에 이르는 막대한 자금을 수혈받았는데도, 조세 수입이 급격히 줄어 그리스 재정이 파산 상태로 다가서고 있다”며 “이르면 7월부터 공무원 임금과 퇴직자 연금 지급이 불가능한 상황이 닥칠 수도 있다”고 내다봤다. 사마라스 총리 정부 출범 이전부터 그리스 안팎에서 ‘차기 총선’을 거론하는 것도 이런 상황 탓이다.
“‘캐메르코지 경제’ 해악 분명해졌다”
“경기가 충분히 회복되지 않은 상황에서 섣불리 긴축에 나섰다가, 결국 경기침체를 불황으로 번지게 만들었다.” 에드워드 볼스 영국 노동당 예비내각 재무장관은 6월19일치 에 쓴 칼럼에서 이렇게 비판했다. 그는 “지난 2년여 동안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니콜라 사르코지 전 프랑스 대통령이 주도한 (긴축재정을 뼈대로 한) 이른바 ‘캐메르코지 경제’의 해악은 이제 분명해졌다”며 이렇게 강조했다.
“경제위기는 허리케인과 흡사하다. 아주 느린 속도로 문제가 커지지만, 일단 움직이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진행된다. …단일통화를 쓰는 유로존 회원국 정부가 한 몸으로 움직여야 한다. ECB는 개별 국가의 중앙은행처럼 국적을 떠나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은행에 자금을 지원해야 한다. 이를 통해 시장의 신뢰를 회복하지 않으면 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 적절한 방화벽도 없는 상황에서 그리스가 무질서하게 유로존에서 탈퇴하면, 유럽뿐 아니라 전세계 경제에 재난적 상황이 닥칠 수밖에 없다. …시간이 많지 않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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