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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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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사할린 디아스포라

일제가 강제동원하고 한국·소련이 방치한 사할린 동포… 동포들 “잔류 1세, 귀국하는 2세 지원 등 담은 특별법 제정해달라”
등록 2012-02-24 15:57 수정 2020-05-03 04:26

“그러니까 이 특별법이 정말 필요해요.”
지난 1월 새로 러시아 사할린주 한인협회장에 당선된 임용군(58)씨가 지난 2월6일 한국을 찾았다. 그의 부친은 경상북도 출신으로 1942년께 일본에 의해 강제 동원돼 사할린으로 향했다. 이름이 이만남(1917년생)이었지만, 해방 이후 주둔한 러시아인들이 그의 성을 임으로 잘못 알아들어 성이 하루아침에 ‘임’으로 변했다. 그의 부친은 고향을 그리워하다 1984년에 숨졌고, 모친(1922년생)은 살아남아 1989년 일시 고국방문 사업 때 오랫동안 그리던 고향마을을 찾았다. 임씨는 “당시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의 고향마을도 찾았는데 지명을 잊어 지금은 기억하지 못한다”고 했다. 그의 모친은 1993년 숨졌다.

절대 다수 남한 출신, 고국행 불가
임씨는 윤상철 사할린주 한인노인협회장, 김홍지 사할린주 한인연합회장, 박순옥 사할린주 한인이산가족협회장, 김춘자 사할린주 한인여성협회장(우리말방송국 국장) 등 5명의 사할린 한인단체장과 함께 한국을 찾았다. 이들은 △사할린 현지에 남은 1세들에 대한 생활 지원 △부모를 따라 귀국을 원하는 2세들에 대한 정착 지원 △사할린 현지에 한인 추도시설 마련 △식민지 시기 강제 가입한 연금·보험금, 받지 못한 임금 등을 확인해 돌려받기 위한 한국 정부의 지원 등의 내용이 담긴 사할린 특별법 제정을 호소하려고 한명숙 민주통합당 대표 등을 방문했다. 오랫동안 사할린 조선인들에 대한 지원 사업을 벌여온 배덕호 지구촌동포연대(KIN) 운영위원장은 “현재 국회에도 여러 개의 사할린 특별법안이 발의돼 있지만 지금의 국회 상황 속에서는 통과가 어렵다”며 “오는 4월 총선에서 이 법의 취지를 이해하는 분들이 다수를 차지할 때를 대비해 한인 단체장들이 뜻을 한데 모아 한국을 찾은 것”이라고 했다.
많은 한국인들이 과거사 문제가 불거지면 으레 ‘일본의 책임’을 거론하지만 ‘사할린 문제’에서만은 사안이 그리 간단치 않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포츠머스조약을 통해 북위 50도 이하의 사할린을 손에 넣는다. 1945년 8월15일 쇼와 천황이 항복을 선언할 때까지 이 땅은 일본 국토의 일부였다. 석탄 등 천연자원이 풍부한 사할린 개발을 위해 해방 때까지 40만 명에 가까운 일본인과 4만3천 명으로 추정되는 조선인들이 이 땅으로 이주했다. 그중 상당수는 일제의 전쟁 수행을 위해 고향을 떠나 강제 동원된 이들이었다.
일본의 패전으로 남사할린과 지금도 일본과 러시아가 영토 분쟁을 벌이고 있는 쿠릴열도가 소련의 땅이 된다. 전후 혼란이 어느 정도 진정된 뒤 연합군최고사령부(GHQ)는 1946년 12월19일 소련과 ‘소련지구 인양(引揚)에 관한 미소 협정’(이하 협정)을 맺어 사할린에 남겨진 일본인들은 본국으로 귀환시키지만, ‘똑같은 천황의 적자’라며 강제 동원한 조선인들은 그 땅에 방치했다.
이후 냉전이 시작됐다. 사할린에 남겨진 조선인 4만3천여 명 가운데 절대다수는 남한 출신이었지만, 이들의 고국행은 허락되지 않았다. 소련 정부는 처음엔 오지인 사할린 개발을 위해, 이후엔 ‘지상의 천국’인 공산주의 사회에서 ‘악의 소굴’인 자본주의 사회로 인구 유출을 허용할 수 없다며 사할린 조선인들의 고향행을 허락하지 않는다.

지난 2월9일 오전 국회 귀빈식당에서 민주통합당과 사할린 한인단체 대표단의 간담회가 열렸다. 지구촌동포연대 제공

지난 2월9일 오전 국회 귀빈식당에서 민주통합당과 사할린 한인단체 대표단의 간담회가 열렸다. 지구촌동포연대 제공

‘제2의 이산’, 떠난 자와 남은 자

그러나 4만3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무작정 묶어둘 수는 없는 법이었다. 조선인의 귀국은 허락되지 않았지만, 일본인 아내와 결혼한 한국 남성과 자식들의 귀환은 협정에 따라 가능했다. 1968년 2월 일본인 아내와 함께 일본으로 돌아온 박노학은 ‘화태귀환 재일한국인회’를 결성해 사할린 조선인 귀환 문제 해결을 위한 본격적인 운동을 벌이게 된다.

박노학은 얼마 뒤 당시 20대의 젊은 변호사였던 다카기 겐이치와 운명적인 만남을 갖는다. 다카기 변호사는 사할린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고 강제 동원 피해자 4명을 모아 일본 정부에 사할린 한인의 귀국 책임을 묻는 ‘사할린 잔류자 귀환 청구소송’을 낸다. 소송은 무려 64차례의 구두변론이 이어지는 진통 끝에 1989년 6월 원고들의 소 취하로 종결됐다. 원고 중 일부가 숨지거나 냉전이 해체돼 문제 해결의 길이 열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15년 소송’의 여파는 작지 않았다.

소송이 시작될 무렵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하던 일본 정부는 사할린 조선인 귀환 문제에서만은 나름대로 성의 있게 소련과 협상에 나선다. 그러나 미소 냉전체제에서 일본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처음엔 협상에 응하던 소련은 “이 문제는 일-소 간에 협의할 사안이 아니”라며 결국 대화의 문을 닫게 된다. 이 과정에서 남한과 체제 대결을 하던 북한의 맹렬한 반대가 있었다. 소련 정부는 “고향에 보내달라”고 끈질기게 주장하던 일부 사할린 조선인들을 북한으로 강제 송환하기도 했다. 혹한의 땅에서 고향을 그리며 이산의 고통에 신음한 1세들의 고통은 일일이 말로 옮겨 담을 수 없다.

결국 사할린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냉전이 끝나야 했다. 냉전 직후 일본 정부는 1989년 한·일 양국 적십자사로 구성된 ‘재사할린 한국인 지원공동사업체’를 통해 사할린 1세들의 친척 방문, 영주 귀국 등의 대책을 내놓는다. 사할린의 주도인 유즈노사할린스크에 가면 협소하기는 하지만 일본 정부의 지원으로 만들어진 사할린 문화센터가 있다. 일본 정부가 지금까지 사할린 조선인 문제 해결을 위해 쓴 돈은 72억엔(약 1034억원)가량이다. 하토야마 유키오 전 일본 총리는 의원 시절 이명박 대통령도 한 번도 안 간 사할린 동포들의 집단 정착지인 경기도 안산 고향마을을 두 번이나 방문하기도 했다.

처음 한·일 양국 정부가 생각한 사할린 문제의 해결책은 한인 1세들의 ‘귀국’이었다. 먼저 일본 정부가 안산 고향마을과 인천의 사할린동포 복지회관 등을 건립했고, 이 시설이 포화상태에 이르자 2007년부터는 한국 정부가 나서서 충북 청원, 충남 아산, 경기도 화성, 강원도 원주 등 13개 국민임대 아파트단지에 사할린 동포들을 입주시키고 있다.

그러나 이후 예상치 못한 문제가 발생했다. 귀국한 1세들과 생활 기반이 모두 사할린에 있어 귀국할 수 없던 2~3세들(대부분 한국어를 하지 못한다) 사이의 ‘제2의 이산’이었다. 또 일부 1세들이 자식들 때문에 귀국을 포기하면서, 귀국한 이들과의 형평성 문제가 불거졌다. 현재 사할린 현지에 남은 1세들은 1500명 정도다. 이들은 귀국하면 임대주택과 생활비를 지원받을 수 있지만 사할린에 남았기 때문에 이 모든 지원에서 소외돼 있다. 사할린 군데군데에 남은 조선인 묘지 문제도 있다.

한명숙, “특별법에 신경 쓰겠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던 이가 한명숙 민주통합당 대표다. 그는 2006년 1월 사할린 1세들과 동반 귀국한 2세 1가구에 정착 지원, 생활 지원을 하는 내용을 담은 ‘사할린 동포 귀국 촉진 및 정착 지원에 관한 특별법’을 여야 의원 93명의 서명을 받아 발의했다. 그러나 그해 4월 국무총리로 입각하는 바람에 이 법안에 신경 쓰는 이가 없어 17대 국회 회기 만료와 함께 자동 폐기됐다.

2월9일 국회 귀빈식당에서 한인단체장들을 따뜻하게 맞은 한명숙 대표는 “사할린 특별법안에 각별히 신경 쓰겠다”고 사할린 대표단에게 약속했다.

73년 동안 이어진 사할린 동포들의 비극은 이제 정리될 수 있을까.

길윤형 기자 한겨레 국제부문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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