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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사능은 국경이 없다”

요시오카 데쓰야 일본 ‘탈원전 세계회의’ 집행위원장… “3·11 한 돌 맞아 한·중·일 311명 인사로 탈원전 네트워크 만들 것”
등록 2012-02-03 11:30 수정 2020-05-03 04:26
강태호 한겨레평화연구소장

강태호 한겨레평화연구소장

“방사능 오염은 계속되고 있다. 지역적이면서 지구적인 차원의 긴급사태다.”

지난 1월14~15일 일본 요코하마 국제회의장(퍼시피코)에서 열린 ‘탈원전 세계회의 요코하마 2012’는 후쿠시마의 재앙이 ‘여전히 긴박한 현재진행형’이라는 인식에서 출발했다. 일본의 주요 평화·반핵·환경 운동단체들과 세계 30여 개국 100여 명의 전문가·학자·정치인들이 모였다. 이들이 이틀간의 회의를 마치고 채택한 ‘원전 없는 세계를 위한 요코하마 선언’에는 그런 절박함이 그대로 배어 있다. 특히 이들이 선언에서 요구한 8개 항 가운데 첫 번째로 강조한 것은 도쿄전력 후쿠시마 원전사고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권리’였다. 지난해 3월11일 일어난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전 수준의 생활을 요구할 권리가 있고, 그 권리는 보장돼야 한다는 것이다.

탈원전, 일본 민주화운동 시험대

이틀간 1만명 넘게 다녀간 이번 회의는 지난해 9월 도쿄 메이지공원에서 6만여 명이 참가해 주최 쪽을 놀라게 한 원전 반대 시위 이래 최대 규모로 꼽힌다. 회의의 집행위원장을 맡은 요시오카 데쓰야 피스보트 공동대표를 만나 이번 회의를 결산하고,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인터뷰는 지난 1월15일 탈원전 세계회의가 열린 요코하마 퍼시피코 소회의실에서 30분 남짓 진행했다.

이번 회의에서 가장 인상적인 점을 꼽는다면.
준비 기간이 1개월이라는 점에서 참가자 규모가 경이적이었다. 이틀 동안 모두 1만 명 넘게 다녀갔다. 후쿠시마 원전사고가 발생한 지 10개월여가 흐른 지금, 모두가 이대로 있을 때가 아니라는 점에 공감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후쿠시마 주민들에 대한 일본 정부와 도쿄전력의 태도를 보며 이것이 결국 ‘인권 문제’임을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한국을 비롯해 세계 30개국에서 관련 분야의 ‘1급 전문가’가 100명 넘게 참여했다. 후쿠시마 문제는 이미 ‘국제 문제’가 됐기 때문이다. 일본 사회는 후쿠시마 문제를 홀로 해결할 수 없다. 체르노빌과 마찬가지로 국제적 압력과 연대를 통해 해결해야 한다. 특히 한국·중국·대만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문제다. 방사능은 국경이 없다.

일본 사회 내부에서도 ‘탈원전’이 가능한지에 부정적 견해가 많다.
민심은 탈원전으로 기울었는데, 정부는 그렇지 않다. 일본이 진정한 의미에서 민주국가가 아니고, 일본 정치가 민의를 반영하지 않고 있다는 방증이다. 일본에는 1970∼80년대 일-미 안보조약 반대투쟁을 겪으면서 학생운동이나 시민운동이 일본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꾸지 못했다는 패배감이 있다. 다시 이대로 패배할 것이냐, 아니면 이번에야말로 후쿠시마의 희생 위에 새로운 민주주의를 구축할 수 있느냐의 기로에 서 있다. 탈원전 운동은 일본 민주화 운동의 시험대가 될 것이다. 이번 회의에 독일 대표로 참가한 레베카 해름스 유럽의회 의원은 “일본의 시장·지사·국회의원들에게 원전의 단계적 폐기를 요구해야 하고, 그들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정치인 당신들이 단계적으로 폐기될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고 했다.

그럼에도 세계 각국 정부가 탈원전 쪽으로 정책 전환을 못한 채 주저하고 있다.
국제적 금융 시스템에 꽁꽁 묶여 꼼짝 못하는 상황이다. 경제전문가들은 ‘상당한 빚을 지고 원전을 지었으므로 국가 재정 차원에서도 원전을 유지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를 내놓고 있다. 그 이면에는 국가의 (원전 사업자에 대한) 보조금 지급과 그에 따른 기득권이 있다. 국가의 에너지 문제를 생각할 때 이제는 더 지역화된 관점이 필요하다. 일본에는 ‘지산지소’(地産地消)란 말이 있다. 지역에서 생산한 걸 그 지역에서 쓴다는 것이다. 자연에너지에 기반을 둔 에너지 전략이란 관점에서는, 중앙정부가 아닌 지방자치단체의 정책 결정이 중요하다. 결국 에너지 정책도 아래로부터, 대중에게서 의사결정이 이뤄져야 한다는 민주주의의 기본과 분리될 수 없다.

돈과 목숨의 대립

을 비롯한 일부 지역매체를 빼면, 이번 회의에 일본의 주요 매체들이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탈원전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걸림돌 가운데 하나가 후쿠시마의 참사 규모가 워낙 크다는 점이다. 그래서 ‘지금은 정부를 비판할 때가 아니라, 일본 전체가 일치단결해 국난을 극복해야 한다’는 논리가 횡행하고 있다. 탈원전을 강하게 주장하는 이들에겐 “당신들, 지금이 그런 말을 할 때냐”고 비난한다. 이렇게 후쿠시마는 물론 일본 전체가 ‘분단’ ‘분단통치’되고 있다.

방사능 수치나 오염지역 등에 대해 얘기하면 한편에선 이를 감추려고만 한다. 기득권층과 해당 지역의 출신자들은 애향심을 앞세우기도 한다. 이들의 주장은 일본 정부나 도쿄전력과 똑같다. ‘방사능·방사선 수치를 따지면 수출은 어쩔 거냐. 국익에 반한다’는 거다. 다른 한편에선 ‘그럴 수는 없다. 낱낱이 모든 정보를 공개해 적절한 보상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시민들의 투쟁이 있다. 그 대립의 골은 깊다. ‘국익’이 우선이냐 ‘사람’이 우선이냐가 맞서고 있다. 말하자면 임산부나 아이들이 희생되더라도 일단 경제를 활성화해야 한다는 생각, 곧 돈과 목숨의 대립인 것이다.

회의 기간에 ‘탈원전 문제는 동아시아 전체의 시각에서 봐야 한다’고 강조했는데.
이이다 데쓰나리 소장이 이끄는 ‘환경에너지정책연구소’와 ‘피스보트’가 함께 ‘동아시아 탈원전 자연에너지 네트워크’를 3·11 후쿠시마 원전사고 1주년에 맞춰 만들기로 했다. 이를 위해 ‘311명 선언’을 추진하기로 했는데, 한국에선 벌써 100명을 모았다. 일본도 이번 세계회의를 결산하며 100명을 모을 예정이다. 중국 등 다른 아시아 국가들을 포함해 3·11 1주년에 311명이 연명한 동아시아 네트워크를 발족할 것이다.
이번 회의에서 세계 각국의 참가자들은 ‘탈원전 글로벌 네트워크’의 필요성을 얘기했다. 이를 위해 먼저 ‘탈원전 지방자치단체장 네트워크’ 결성을 추진해나갈 생각이다. 후쿠시마 시장이 참가하고, 극심한 피해지역인 미나미소우바시 시장이 중심이 돼 일본 전역, 그리고 세계로 나아가는 ‘탈원전 글로벌 단체’를 그리고 있다.

탈원전 정책 채택을 위한 국민투표를 추진하려고 (일본인) 1천만 명 서명운동을 진행하고 있다고 들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소설가 오에 겐자부로를 비롯해 많은 인사들이 참가하고 있는 ‘사요나라(안녕) 원전’ 사무국이 중심이 돼 활동하고 있다. 3월11일까지 일본의 각 지역에서 광범한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다. 3월11일 서명이 총집결될 것이다.

한-일 시민의 연대가 중요

탈원전을 위해 애쓰는 한국 시민·활동가 등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는가.
연대를 바탕으로 동아시아에서 먼저 원전을 없애나가자. 탈원전과 새로운 에너지 정책 추진을 통해 제2, 제3의 후쿠시마 원전사고를 막아야 한다. 일본만 원전을 없애는 건 의미 없다. 중국과 연대가 힘든 상황에서 한-일 연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일본에서 ‘원전 수출은 안 된다’고 할 때 ‘일본이 안 하면 한국이 하자’는 주장이 나오는 걸 막아야 한다. 서로 경쟁시키며 원전을 유지하는 쪽으로 가려는 논리를 꺾어야 한다. 두 나라가 함께 원전을 중단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게 관건이다.

요코하마(일본)=글 황자혜 통신원 jahyeh@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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