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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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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 문제는 핑계다”

북부 네덜란드어권, 남부 프랑스어권 대립해 1년4개월 무정부 세계기록 세운 벨기에…
현지인 목소리 들어보면 언어 갈등 넘어 세금·계급·이주 문제 중첩돼 있어
등록 2011-11-04 15:39 수정 2020-05-03 04:26

지난 10월13일 낮 12시께,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 중앙역. 중앙역 옆문에는 2개의 언어가 위아래로 적혀 있었다. ‘Entree de secours’(프랑스어), ‘Ingang hulpdiensten’(네덜란드어). 프랑스어든 네덜란드어든 ‘비상구’라는 뜻이다. 벨기에 인구 1100만 명 중 약 60%가 네덜란드어를 쓰고 나머진 프랑스어(약 39%)와 독일어(약 1%)를 쓴다. 북부 네덜란드어권(플레미시)과 남부 프랑스어권(왈로니아) 사이의 대립은 한때 전라도와 경상도 간의 갈등을 어른거리게 한다.
“수도 브뤼셀 사람들은 대부분 프랑스어와 네덜란드어를 모두 쓴다. 남부든 북부든 그 지역 사람들은 상대 언어를 배우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 이날 낮 1시께 중앙역 안에서 만난 승강장 안내원 마니퀘트 루디루디(50)의 말이다.

관리 내각도 한계에 이르러

벨기에는 스페인·오스트리아·프랑스공화국 등에 합병됐다가, 1815년 빈 조약의 결과로 네덜란드에 병합된 뒤 1830년 독립했다. 독립 당시부터 북부와 남부는 언어권별로 쪼개져 갈등을 일으켰고, 올해 들어 세계신기록인 1년4개월여의 무정부 상태로 치달았다. 지난해 총선에서 극우 성향의 ‘신플레미시동맹’(N-VA)이 27석을 차지하며 제1당이 된 게 화근이었다. 총 150석의 연방하원 의석이 언어권별로 나뉘는 벨기에의 정치 특성상 4~7개 정당이 연정 협상을 해야 하지만, 신플레미시동맹은 남부 지역 다수당인 사회당 등과의 협상 과정에서 “가난한 남부를 위해 더 이상 세금을 내선 안 된다”는 지역 정서에 기대어 북부 분리독립을 주장해 파행을 일으켰다. 과거를 떠올리면 말 그대로 새옹지마다. 1950년대 이후 북부가 상공업으로 방향을 틀며 경제적 부를 누리게 된 반면, 농업 중심지였던 남부 지방은 농업과 광산업에서 실패를 거듭하며 침체기를 걷고 있다. 독립 뒤 남부에는 고위 관료와 부유한 자본가 계층이 살았지만, 노동자 계층이 몰린 북부에서는 남부 부르주아 계층에 대항해 네덜란드어권의 권리 회복을 위해 10만 명의 서명을 받는 플레미시 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무정부 상태의 벨기에는 현재 전임 총리인 이브 르테름 총리를 수반으로 한 임시 관리 내각으로 운영되고 있다. 지방자치가 발달됐고 관리 내각의 융통성 있는 운영 덕에 무정부 상태에도 높은 경제성장률을 기록했지만,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는 경제위기가 덮친데다 르테름 전 총리가 공공연히 사퇴 의사를 밝히는 등 한계에 다다랐다. 이달 들어 벨기에 정부는 국정 불안 등을 이유로 신용평가사 무디스로부터 신용 강등 경고를 받았다.

남부와 북부를 모두 찾았다. 10월13일 낮 2시께, 벨기에 남부 왈로니아 지역 오티그니 기차역 정문에서 나온 스테판(27·가명)은 미국 공상과학 소설가 로버트 실버버그의 프랑스어 번역판 소설을 들고 있었다. 초등학교에서 프랑스어를 가르치는 그는 “네덜란드어는 익히기 어려운데다 유용하지 않다”며 “요즘 누가 네덜란드어를 쓰나? 프랑스어가 안 되면 차라리 영어로 소통하면 된다”고 말했다. 오티그니 주택가 인근의 허름한 술집에 들어가자, 여성 점원이 프랑스식 인사 ‘봉주르’를 하며 말을 건넸다.
주택가에서 만난 마사트 자크트(72)는 남부에 살지만 네덜란드어를 능숙하게 구사한다. 매월 연금 1300유로(약 203만원)를 받는 자크트는 은퇴하기 전 다니는 여행사에서 북부 사람들과 교류하려 노력했지만 지역 간 벽에 부딪혔다. “북부 사람들에게 언어는 핑계이고 그들은 출신지를 더 중요시한다. 과거 남부가 잘살 때는 우리 도움을 받았으면서 이제 와 세금을 내기 싫다고 총선에서 극우 세력인 신플레미시동맹을 선택한 걸 보고 기가 막혔다.” 이날 늦은 오후, 예레미야(25)는 좁은 도로에 택시를 세워둔 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택시기사인 예레미야는 무정부 상태 이전이나 지금이나 수익에는 별 차이가 없다고 했다. 문제는 정치인이라고 비판했다. “벨기에 국왕이 직접 나서서 중재를 하는데도 무능한 정치인들은 새 정부를 구성할 의지를 보이지 않는다. 무정부 상태인데도 벨기에가 그나마 굴러가는 것은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는 시민들의 성숙한 태도 덕이다.”

극우 세력을 지지하는 이유

다음날인 14일 낮 1시께, 북부 안트베르펜 중앙역 인근 시장에서는 프랑스어를 발견하기 어려웠다. 시장 안 술집 야외에서 나디아(49)는 맥주를 마시며 네덜란드어로 쓰인 신문을 읽고 있었다. 건너편에서 히잡을 쓴 여성들이 유모차를 끌고 아프리카 전통 복장이 쇼윈도에 걸린 옷가게로 들어갔다. 나디아는 이민자 수를 제한하자는 신플레미시동맹을 심정적으로 지지한다. “여길 보라. 벨기에 같은가? 과도하게 많은 이민자들을 제재할 필요가 있다.” 주택가에서 요한센(35) 등 노동자 5명을 만났다. 이들에게 남부 왈로니아에 대해 묻자 “남부 새끼들 꺼져라”는 야유가 쏟아졌다. 요한센은 한 달에 1500유로 정도를 벌고 세금으로 수익의 절반 가까이 낸다. 월세는 650유로다. 그는 아내가 부업으로 유치원에서 주방일을 하며 생활을 근근이 이어간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월세 내기도 빠듯해 내일이라도 집에서 쫓겨날까 조마조마하다. 빈둥거리는 남부 사람들에게 뼈 빠지게 번 돈이 나간다니 치가 떨린다.” 철도청에서 일하는 반 군터(59)는 표현 수위는 약했지만 같은 생각을 했다. “신문을 펼쳐보라. 북부 사람들이 내는 세금은 남부를 압도한다. 세금이 아까운 게 아니라 우리 지역인들의 생활 향상을 위해 쓰고 싶을 뿐이다.” 반 군터는 향후 벨기에 정치권은 신플레미시동맹이 주도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적어도 신플레미시동맹은 현실의 삶을 외면하는 뜬구름 같은 정책을 내지 않는다”는 게 이유였다.
이 지역 사람들이 모두 극우 성향의 신플레미시동맹을 지지하는 건 아니었다. 주택가 인근 커피숍에서 만난 미술가 리벤(35)은 지난 총선에서 진보 성향의 녹색당에 투표했다. 그의 여자친구는 남부 지역 출신이고, 여자친구와 프랑스어와 영어를 섞어 소통한다. “신플레미시동맹은 북부 분리 외에도 감세정책 등 기본적으로 시장주의를 지향한다. 자칫 남부 빈민층뿐 아니라 벨기에 전역의 가난한 사람들을 벼랑으로 몰 것이다.” 주택가를 걷던 로렌트(65)는 북부 시민들이 극우당에 대거 표를 주었다는 사실이 부끄러운 듯했다. “과거에는 남부가 북부보다 부강했고, 북부 지역 사람들은 큰 혜택을 받았다. 신플레미시동맹의 주장대로 남부와 북부가 갈라서는 건 말이 안 된다.”

“다 미래가 불안해서 그런다”
역 인근에서 만난 지네프(36·가명)는 무정부 상태보다 닥쳐올 경제위기가 더 무섭다. “인근 유럽 국가들이 휘청거리는데 신경 쓰이지 않을 리 있나? 세금을 내기 싫다는 북부나 여기 사람들이 돈에 환장했다는 남부나 다 미래가 불안해서 그런 것이다.”
벨기에 언론은 10월8일 각 정당이 지방권력 이양 방안에 합의해 머잖아 연립정부가 구성될 것이라는 희망 섞인 전망을 내놓았다. 연정에 성공하더라도 벨기에 시민들은 어두운 터널에서 쉽게 빠져나오기 힘들 듯했다.

브뤼셀(벨기에)=이승환 통신원 stevelee05@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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