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23일 아르헨티나의 대통령 선거는 전직 대통령들의 부인과 아들 간 대결이자, 아르헨티나 최초의 선출직 여성 대통령의 재선이라는 측면에서 흥미롭다. 그런데도 아르헨티나 거리는 너무도 조용하다. 선거 홍보 전단지를 뿌리는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지나치다 싶을 만큼 시민들은 선거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아파트 관리인 마르틴 곤살레스는 “이미 승자는 결정났고, 2명 중 1명이 여당을 지지하는데 선거가 시끄러울 필요가 있겠느냐? 난 이미 누굴 찍을지 정했다”고 말했다. 과거와 같이 떠들썩한 선거 유세도, 치열한 논쟁도, 선거 동원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다만 가끔씩 눈에 띄는 선거 포스터와 대선 후보자의 TV 광고가 선거가 있음을 알려줄 뿐이다. 조용하다 못해 냉담하기까지 한 선거 분위기는 지난 8월14일 치러진 예비선거에서 이미 승패가 가려졌고, 10월23일 선거는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현 대통령의 재선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절차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 남은 관심은 크리스티나의 득표율이다. 디텔라대학 정치학과 카를로스 헤르바소니 교수는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선거는 결과의 불확실성이 있을 때 더 재미있어지는데, 결과가 명확히 드러나서 분위기가 냉랭하다”고 말했다.
2007년의 크리스티나를 이겨
아르헨티나에서 2009년 처음 실시된 예비선거는 정당과 정당세력의 난립을 막으려고 도입된 제도로, 만 18살 이상 유권자들은 의무적으로 투표를 하기 때문에 실질적인 1차 선거의 의미를 갖는다. 예비선거 결과 집권당의 페르난데스가 50.7%를 획득해 12.2%를 얻은 2위 급진당(UCR)의 리카르도 알폰신(라울 알폰신 전 대통령의 아들)보다 무려 38.5% 앞섰다. 최근 유력한 여론조사기관 폴리아르키아 등이 실시한 조사에서도 크리스티나가 50~56%를 득표하고, 그 뒤를 추격하는 사회당의 에르메스 비네르 후보가 15%를 득표할 것으로 예상됐다. 아르헨티나 선거법상 1위가 45% 이상 득표하거나 40% 이상을 획득하고 2위와의 격차가 10% 이상 날 경우 결선투표를 치르지 않고 1차 투표에서 승부가 가려진다. 따라서 이변이 일어나지 않는 한, 크리스티나가 50% 넘는 득표율로 10월23일 1차 투표에서 당선을 확정지을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다. 이런 상황에서 극심한 무기력 증세와 분열 양상을 보이는 야권 대선 후보자들은 자신에게 표를 달라고 호소하는 대신 크리스티나에게 표를 던지지 말라고 요청한다. 그리고 자신을 지지하지 않아도 좋으니 동시에 치러지는 의회선거에서 제발 자신의 정당 후보를 지지해달라고 호소한다.
지난 8월 예비선거에서 크리스티나가 획득한 50.7%의 지지율은 2007년 대선에서 득표한 45.3%보다 5.4%포인트 늘어난 수치다. 많은 정치 전문가들은 크리스티나에 대한 높은 지지율의 비결을 연평균 7~8%의 높은 경제성장률, 야권 분열로 인한 대안 부재, 사회 분배를 강조하는 포퓰리즘 정책에서 찾고 있다. 내가 인터뷰한 아르헨티나 정치 전문가인 에르네스토 칼보 미국 휴스턴대학 교수(정치학)는 “이번 선거에서는 페론주의자가 아닌 유권자들조차 여당의 실적에 높은 점수를 주었고, 반면 야당은 지지자들조차 야당에 형편없는 점수를 주었다”고 설명했다. 미국 컬럼비아대학 정치학과 교수인 빅토리아 무리요는 “어느 때보다 성장하고 있는 아르헨티나 경제가 그 답이다”라고 말했다. 이런 배경에서 전통적으로 페론주의 지지층인 하층 부문의 지지를 유지하면서 페론주의에 비판적이던 도시 부문과 농촌 부문의 표를 확보해, 2007년보다 약 180만 표를 더 얻음으로써 ‘2011년의 크리스티나’가 ‘2007년의 크리스티나’에게 완벽하게 승리했다고 볼 수 있다.
신자유주의 정책의 반사효과
2001년 경제위기로 심각한 트라우마를 경험한 유권자에게 투표를 결정하는 중요한 기준은 더 이상 페론주의니 반페론주의니 하는 구시대적 이념 대립이나 지도자에 대한 절대적 충성심이 아니다. 그보다는 자신의 호주머니가 얼마나 두둑해지는지가 지지 후보를 결정한다. 이런 변화는 이번 선거에서 지역과 계층, 세대와 성별을 가로질러 고른 지지를 받음으로써 더욱 자명해졌다. 2007년 크리스티나는 여성보다는 남성 유권자에게서 더 많은 지지를 받았으나, 2011년에는 여심을 잡는 각종 수혜 정책으로 여성 유권자들을 새롭게 확보했다. 2007년 선거에서는 부에노스아이레스와 산타페, 코르도바 그리고 멘도사주에서 열세였으나, 2011년에는 이들 지역에서 30~35%의 지지율을 획득했다. 또 120만 명의 청년층 유권자를 새롭게 확보해 지지층을 확대했다.
2009년 일시적 경제위기를 제외하고, 아르헨티나는 지난 4년간 평균 7~8%의 높은 경제성장을 이뤘으며 실업률과 빈곤율도 감소했다. 10월14일 여론조사기관 폴리아르키아가 실시한 조사에서 유권자 63%는 ‘경제적 이유 때문에 집권당을 지지한다’고 응답했다. 아르헨티나 일간 에 따르면, 69%가 크리스티나 정부의 집권 능력에 만족하고 있으며 부정적 견해는 11%에 불과하다. 예비선거 이후 크리스티나의 국정운영에 대한 만족도와 신뢰도는 상승 추세에 있다. 크리스티나는 정치인으로서의 자질을 평가받기보다는 남편인 전임 대통령 네스토르 키르치네르의 후광으로 대통령이 된 “운 좋은 여자”로 여겨지고, 심심치 않게 언론을 통해 “보톡스의 여왕” “명품 의류와 신발에 열광하는 사치의 여왕”으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이런 사정 탓에 세계경제 위기가 아르헨티나를 강타한 1년 전까지만 해도 크리스티나의 지지율은 10%에 불과했다.
2009년 말부터 경제가 회복되자 국정운영 능력과 성과가 긍정적으로 평가되기 시작하며 지지율이 상승했다. 대부분의 유권자들이 일상생활에 영향을 끼치는 세 가지 요인인 일자리, 임금 그리고 소비가 이전보다 안정됐다고 생각한다. 2008년 수출세 인상과 수출 규제로 첨예한 대립각을 세웠던 농업 부문조차 국제시장에서 높은 곡물 가격 덕으로 경제적 상황이 좋아지자 크리스티나 지지로 돌아섰다. 50%의 국민은 내년 경제상황을 올해보다 더 낙관적으로 전망하고, 변화보다는 안정을 원하고 있다. 보습학원 교사 헨리 셀라스니크는 ‘누구를 지지하느냐’고 묻자, 당연하다는 듯 크리스티나를 지지한다고 했다. 그는 “아르헨티나 사람들에겐 주머니 사정만 좋아진다면 다른 결점들은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며 “잘사는 사람들은 현 정부의 포퓰리즘 정책을 비판할지 모르지만, 나 같은 중산층은 신자유주의 정책하에서 너무 어려웠기 때문에 사회적 분배를 강조하는 현 정부의 정책을 지지한다”고 말했다.
인플레이션을 모르는 청년층
이번 선거에서 주목할 만한 특징은 1위와 2위의 격차가 40% 가까이 벌어질 만큼 야권이 심각하게 분열돼 대표성이 없다는 점이다. 야권에는 여당 후보와 대적할 만한 강력한 리더십도 새로운 인물도 없다. 경제적 요인이 집권 여당에 우호적인 상황에서 야권은 유권자의 표심을 잡으려면 새로운 것을 제시해야 하지만 인플레이션, 권위주의, 부패 스캔들, 치안 부재와 빈곤 등 집권당의 약점조차 효율적으로 이용하지 못했다. 야권 연대 실패와 대안 부재가 여당에 더욱 유리한 조건으로 작용했다.
크리스티나는 경제부 장관인 아마도 보우도우를 부통령 러닝메이트로 내세우며 현 정부의 정책인 경제에 대한 국가 개입을 강화하겠다는 뜻을 밝혀왔다. 크리스티나가 발표한 핵심 대선 공약에는 충성스러운 지지 기반인 소득 하위 50%를 겨냥한 사회구호 정책이 빠짐없이 들어 있다. 최저임금 25% 인상, 최저연금 수령액 17% 인상, 전기·가스·통신·수도·대중교통·농축산임업 분야에 대한 보조금 인상, 각종 복지수당 인상 및 수혜폭 확대, 국내 산업 보호, 수출 촉진 정책 등 심각한 재정 적자에도 불구하고 파격적인 사회정책을 약속했다. 강력한 반대세력인 농업 부문도 정부가 제시한 각종 생산보조금과 장기 저리 대출, 수출장려 정책을 대가로 크리스티나 지지로 돌아섰다. 수출산업 부문과 산업계, 그리고 외국 기업들은 정부의 포퓰리즘 정책에 볼멘소리를 하지만, 정부는 “성장 혜택을 사회화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일축한다.
건국 200주년 기념행사와 테마파크 테크노폴리스 오픈행사, 고등학생에게 노트북 제공, 공공기관 일자리 확대, 장학금제도 확대, 보편적 자녀실직수당, 실업자 프로그램 등 각종 수혜정책을 통해 모든 사회계층에 걸쳐 있는 청년 유권자와 실업자를 새 지지세력으로 확보했다. 이들은 세금, 인플레이션 혹은 왜곡된 시혜정책으로 인한 사회적 비용의 폐해를 경험하지 못한 세대며, 아르헨티나가 최악의 인플레이션으로 위기에 처했을 때 태어나지 않았거나 너무 어렸던 세대다. 이들은 정부가 주는 혜택은 즐기지만, 정부가 지출하는 비용이 어디서 나오는지는 문제 삼지 않는다. 전체 유권자의 50%가 40살 미만임을 고려할 때 젊은 지지층 확보가 크리스티나에 대한 지지율 증가에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최초의 여성 재선 대통령
높은 사회적 비용 지출에 따른 재정 적자, 인플레이션, 부패 등 부정적 요인에도 불구하고 50%가 넘는 크리스티나에 대한 지지율은 모든 사회계층과 지역에 걸쳐 고른 지지를 받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번 선거에서 승리함으로써 크리스티나는 아르헨티나 최초의 여성 선출직 재선 대통령으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아르헨티나에선 압도적인 승리로 의회를 장악하게 된 크리스티나가 취임 뒤 바로 2015년 3선을 위한 개헌 작업에 돌입할 것이라고 예상이 많다. 그러나 크리스티나에게 승리를 가져다준 경제모델과 보조금을 바탕으로 한 사회구호 정책이 언제까지 가능할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아르헨티나의 경제적 붐은 중국의 경제성장에 따른 곡물 수요와 브라질의 경제성장에 따른 제조품 수요 증가로 인한 수출 증가에 힘입고 있다. 그러나 수출이 감소한다면 경제적 번영도 정부의 사회정책도 함께 무너질 수 있다. 따라서 집권 2기를 맞는 크리스티나 정부의 앞날을 낙관적으로만 전망할 수는 없다.
부에노스아이레스(아르헨티나)=손혜현 한국외국어대 중남미연구소 초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