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10일, 중국 베이징 인민대회당에 쑨원의 대형 초상화가 걸렸다. 오전 10시. 후진타오 국가주석을 포함한 9명의 정치국 상무위원 전원과 한때 사망설로 세계 언론을 달군 장쩌민 전 주석이 참석한 가운데 엄숙하고 경건한 기념대회가 시작됐다. 뿌연 안개와 먼지가 뒤엉킨 최악의 연무가 베이징 하늘을 뒤덮은 가운데, 이날 오전 수많은 중국인들은 TV 앞에 모여 후진타오 주석의 ‘특별연설’을 경청했다.
경제발전 중심의 민족부흥 강조
“100년 전 손중산(쑨원) 선생이 대표로 있던 혁명당이 세계를 놀라게 한 신해혁명을 일으켰고, 중국은 역사상 유례없는 사회변혁을 시작했습니다. …중국 인민은 힘든 노력과 큰 희생을 통해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실현할 올바른 길과 핵심 역량을 찾아냈고, 그것은 바로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라는 길이며 그 핵심 역량은 중국 공산당입니다.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실현하기 위해, 반드시 애국주의의 위대한 깃발을 높이 들어야 합니다. 신해혁명 100년 이래의 역사가 보여주듯, 애국주의는 중화민족 정신의 핵심이고 전 민족을 응집·동원해 중화를 흥성시키고 투쟁의 강력한 정신적 힘이 됩니다. (후략)”
혁명의 의의와 투쟁 역사, 그리고 민족부흥과 양안관계라는 네 가지 주제로 행해진 후 주석의 기념사에서 핵심어는 ‘민족부흥’이다. 그는 기념사에서 ‘중화민족 부흥’이라는 말을 23번이나 사용했다. 같은 날, 대표적 관방매체인 도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위해 다 함께 분투하자’라는 제목의 사설로 신해혁명 100돌을 ‘기념’했다. 하지만 후 주석의 연설 전문이나 사설을 비롯해 관방매체 그 어디에서도 쑨원이 제창한 삼민주의(민족·민권·민생) 가운데 민권과 민생을 강조한 대목은 눈에 띄지 않았다. 대신 사설은 “우리는 아직 부강하고 민주적이며 문명화되고 조화로운 사회주의 현대화 국가의 목표와는 많은 차이를 갖고 있고, (지금은)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실현하는 것이 여전히 막중한 임무다”라고 언급해 지금 중국이 추구할 것은 민주나 민권문제 등이 아닌 오로지 경제발전 중심의 민족부흥이라고 강조했다.
2천 년 이상 지속된 전제정치의 고리를 끊고 아시아 최초로 공화제를 실현하고 더 나아가서는 사회주의 혁명의 도화선을 제공했다는 평을 받는 신해혁명이 올해로 100돌을 맞았다. 중국 정부는 10월10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전·현직 정치국 상무위원들과 중앙위원 등 주요 정치 인사들이 모인 가운데 성대한 기념행사를 치렀고, 중국 전역에서 다양한 기념행사와 공연이 진행됐다. 하지만 정부 중심의 성대한 기념행사와 달리 서민들 사이에서의 체감온도는 그리 높지 않았다. 특히 ‘혁명 정서’를 잘 모르는 1980년대 이후에 출생한 세대들에게 신해혁명은 교과서에서 배운 기억조차 희미한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얘기로 받아들여진다. 실제로 인터넷 관방매체인 에서 홍콩과 중국 대륙의 1990년대 이후에 태어난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인터뷰 조사를 보더라도 신해혁명을 제대로 이해하는 학생은 거의 없었다. 대부분 “초등학교나 중학교 때 들어봤다”며 그저 중국 근대사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역사의 한 페이지로만 이해하는 수준이었다. 10월10일 신해혁명 100돌 기념을 전후해 중국 전역에서 개봉된 영화 도 예상과 달리 큰 재미를 보지 못했다. 청룽(성룡)이 감독을 맡고 중화권 최고의 스타들이 총출연해 화제를 모은 이 영화는 정부기관과 단체, 회사 등 ‘의무 관람객’을 제외하면 전체적으로 반응이 썰렁했다. 더군다나 대만에서는 대륙 영화 쿼터가 초과됐다는 핑계로 상영을 거부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민주와 법치는 인내심 가져야”
신해혁명 100돌 기념 열기가 가장 뜨겁게 나타난 곳은 의외로 신해혁명과 관련한 소장품 수집 시장과 백화점, 상점 등의 기획상품 코너였다. 신해혁명 당시의 사진이나 관련 물품, 자료 등 소장 가치가 있는 물건은 시가의 20배 이상으로 팔려나갔고 백화점 등의 신해혁명 기념 기획상품 및 특가 코너는 하루 종일 사람들로 붐볐다. 신해혁명 100돌 기념 열기가 뜻밖에도 상업화로 성공한 것이다. 이렇게 다소 썰렁한 민간 정서와 달리, 언론매체와 지식인 사이에서는 신해혁명의 유산과 교훈을 둘러싼 뜨거운 논쟁이 벌어졌다. 이 논쟁의 와중에 중국 내 유력 주간지인 은 신해혁명에 대해 기존 해석과 평가를 뒤집는 대담 기사를 내보냈다가 편집장이 직위해제되는 변을 당했다.
대만 정치대학 역사학과 탕치화 교수는 ‘편협한 민족주의와 외교정책’이라는 제목의 대담 기사에서 “신해혁명에 대한 기존 평가와 해석은 지나치게 이데올로기적이고 정치권력의 필요에 따라 자의적으로 해석된 측면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쑨원은 역사적으로 선한 존재이고 위안스카이는 악이라는 이분법적 평가 역시 다분히 ‘조작된 해석’”이라고 경계했다. 또한 “중국은 반드시 혁명외교와 고별해야 한다. 과거 근 100년 동안 (중국) 외교는 자주 내부 투쟁과 정치선전의 도구가 되었다. 인민에게 ‘열강이 중국을 괴롭혔기 때문에 반드시 복수해 설욕해야 한다’고 가르쳤다”며 “이런 주입은 균형 있는 세계관과 민족성을 형성할 수 없고, 민족주의는 애국심을 유발할 수 있지만 편협한 민족주의는 중국의 전진에 걸림돌이 될 것이다. 중국은 굴기(掘起)해야 하지만 반드시 혁명외교와는 고별해야 한다”고 일갈했다.
탕 교수의 이런 ‘고별론’이 중국 당국으로부터 된서리를 맞은 뒤, 10월10일 신해혁명 100돌 기념을 앞두고 발행된 관방매체 는 관련 사설을 통해 탕 교수의 어법을 흉내내기라도 하듯이 ‘혁명 감정과 고별하자’는 주장을 했다. 는 이 사설에서 “지난 100년 동안 중국의 주류 이데올로기는 바로 혁명이었다. 좌우를 막론하고 모두 혁명정신을 숭배했지만 우리가 간과하는 것은 어떤 변혁은 단지 혁명을 통해서만 완성할 수 있지만, 많은 진보는 혁명의 시대를 벗어나야지만 비로소 실현할 수 있다”며 “민주와 법치는 중국인의 장기적 이상이지만 그것은 한 차례의 혁명을 통해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반드시 인내심을 가져야 하고 스스로에게 몇십 년, 심지어 몇백 년의 시간을 주어서 느긋한 발전을 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요약하면, 지금 중국에서 민주와 법치는 당장 실행해야 할 중요한 과제가 아니라, 혁명 같은 방식으로 실현될 수 없고 장기적으로 느긋하게 추진해야 한다는 것이다. 후진타오 주석이 기념사에서 ‘중화민족 부흥’을 23번이나 강조하면서도 민권과 민생 문제는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던 논리적 이유를 이 사설이 대변하는 셈이다.
같은 역사가 되풀이되고 있다
하지만 인터넷과 ‘중국판 트위터’라 불리는 ‘웨이보’(마이크로블로그) 등에서는 정부와 관방매체가 애써 외면하는 신해혁명의 또 다른 정신인 민주제도와 법치, 민생 문제와 관련해 갖가지 풍자와 비판 글들이 올라온다. 그중에서도 몇 년 전 방영돼 장안의 화제를 모았던, 신해혁명 전후 시기를 다룬 드라마 에서 쑨원이 장쑤 지역의 한 마을 향장과 나눈 대화 내용이 인터넷과 웨이보 등에서 널리 회자되고 있다.
“샤오 향장, 만일 어떤 사람이 당신에게 당신 아이가 글을 모른다 하여 학교를 다닐 필요가 없다고 하면 어떻게 말하겠소?”
“말도 안 되지요. 글을 모르기 때문에 학교를 다녀야 하지 않겠습니까?”
“옳소! 어떤 사람들이 만일 백성의 수준이 낮아서 민권을 실행할 수 없다고 말한다면, 그건 아이가 글을 모르기 때문에 학교에 다닐 필요가 없다는 말처럼 황당하고 가소롭기 짝이 없는 논리지요.”
이뿐만 아니라 중국 정부를 더 곤혹스럽게 하는 것은 당국의 공식 해석에 대한 체제 내부 지식인들의 반론이 만만치 않다는 점이다. 중국의 유명한 역사학자인 위안스웨이는 10월9일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누가 신해혁명을 망쳤는가’라는 글을 통해 “현대사회에서 황제가 있고 없고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정말로 전제제도가 끝났는지다. 신해혁명이 이런 역사적 임무를 완성하지 못한 것만은 분명하다”며 은연중에 중국이 여전히 공산당 전제정치를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중국 사회과학원의 청조 연구가인 사학자 마용 역시 지난 5월 출간된 이라는 책을 통해 “청 정부가 당시 공정한 사회분배와 빈부 격차 확대 방지에 관심을 갖지 않았고, 하층 민중이 정치·경제 발전에 상응하는 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오히려 잃는 것이 더 많다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에 각지에서 민중 반란이 일어나 결국 망할 수밖에 없었다”는 논지를 펼쳤다. 그는 “지금 중국을 보면 당시와 같은 역사가 되풀이되고 있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는다”며 “전통을 유지하면서도 다른 나라의 좋은 제도를 받아들여 배운 메이지유신 때의 일본과는 달리, 중국은 민주제도 같은 다른 선진국의 좋은 것은 배우지 않고 독재와 전제제도만 배웠다”며 공산당과 정부를 겨냥해 강한 비판의 날을 세웠다. 그의 논지는 중국 정부를 향해 청 왕조 같은 몰락의 절차를 밟지 않아야 한다고 간접적으로 경고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1980년대 이후 세대이자 중국에서는 얼리어답터 부류에 속하고 지독한 ‘핑궈펀쓰’(애플 팬)로, 아이폰과 아이패드를 항상 갖고 다닌다는 젊은 직장인 리첸(28)은 신해혁명 100돌 소감을 묻자 “별다른 소감이 없다. 며칠 전 스티브 잡스의 죽음은 꽤나 충격적이었지만 신해혁명은 너무나 먼 과거 얘기라 별다른 느낌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변화 이끌지 못하면 몰락할 것”
“내가 애플 제품에 열광하는 이유는 매년 새롭게 변한다는 것이고 그 변화를 기다리고 상상하는 즐거움 때문이다. 세상은 스마트폰으로 손바닥 안에서 세계의 변화와 일상을 보고 듣고 읽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중국 공산당은 여전히 변화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아니면 그 변화가 가져올 수도 있는 자신들의 몰락을 두려워하는지도 모른다. 청 왕조뿐 아니라 모든 권력의 몰락과 타락은 변화를 주동적으로 받아들여 이끌지 못했기 때문이다. 신해혁명의 가장 중요한 교훈이다. 중국 지도자들은 이것을 알아야 한다.”
베이징(중국)=박현숙 통신원 phschin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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