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가 없는 한국의 청년세대는 ‘88만원 세대’로 불린다. ‘3포 세대’라는 표현도 나왔다.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했다는 뜻이다. 무엇이라 불리건,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는 이 시대 청년들의 자화상이다. 불타오르는 영국 런던의 폭동 사태는 경제위기 속 세계 곳곳 ‘88만원 세대’의 절망을 담고 있다. 88만원 세대의 불만과 저항은 영국뿐 아니라 칠레, 이스라엘, 스페인, 그리스 등에서도 터져나오고 있다.
<font size="3"><font color="#006699">상대적 박탈감이 부른 폭동</font></font>
런던 폭동의 원인에 대한 분석은 엇갈린다. 폭동 참여자도 다양하다. 하지만 상점에 불을 지르고 물건을 약탈하는 폭동의 밑바닥에 폭동 주도 세력인 청년층의 들끓는 분노가 있다는 데 큰 이견은 없어 보인다. 사태가 벌어진 지역에서 짐작할 수 있다. 폭동이 시작된 토트넘은 아프리카 이민자 등 소외된 다수가 거주하는 지역으로 시위는 이런 빈곤지역을 중심으로 번져갔다. 영국 일간 는 8월9일 이번 폭동을 “사회·경제적으로 소외된 최하층의 공격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잃을 것 없는 주변부가 사회에 품었던 반감을 거리에서 표출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2008년 이후 악화된 세계적 경제위기로 실업률은 치솟고 정부 지원은 줄어들고 있다. 도전할 기회조차 빼앗긴 청년들의 좌절은 더 크다. 경찰과의 마찰이 자극제가 됐을지 몰라도 이런 좌절감과 그에 따른 사회적 불만이 폭동이 확산되는 계기로 작용했다. “아무도 나에게 기회를 주지 않는다. 나는 전체 시스템이 작동하는 방식에 화가 난다”는 19살 런던 청년 루이스 제임스의 한 언론 인터뷰는 이들의 심정을 잘 드러낸다. 범죄 전문가 피츤 교수는 “단지 폭력행위로만 치부할 게 아니라 청년 실업, 교육 기회 박탈과 소득 격차 등 젊은 층 사이에 늘어나는 불만의 배경을 짚어봐야 한다”고 주문했다.
실업 등의 고통 속에서 이들의 절망을 부추긴 것은 상대적 박탈감이다. 폴 바글리 영국 리즈대학 교수(사회학)는 “자신은 실업자이거나 저소득자인데 좋은 상품이 가득 찬 상점을 소개하는 광고가 쏟아지는 런던처럼 빈부격차가 큰 대도시에 살다 보면 사회적 반감이 더욱 커지게 된다”고 분석했다. 그동안 세계적으로 빈부격차는 갈수록 악화돼왔고 그 와중에 경제위기로 빈곤층의 고통은 더 심해져, 소외된 청년층의 박탈감에 따른 사회적 긴장과 그 폭발은 예고됐던 셈이다. 런던 폭동은 구체적 요구를 하기보다는 억눌린 분노를 약탈 등으로 폭발시키는 양상으로 전개됐다. 2005년 프랑스 파리 교외 지역의 이민 2~3세대 등 소외된 청년들을 중심으로 시위가 벌어졌던 것과 비슷하다. 교육·복지 등 사회예산 지출을 통한 사회 통합 노력은 경제위기와 이에 따른 긴축재정으로 크게 줄어들고 있다. 긴축재정의 여파는 지난해 11월 정부의 교육예산 삭감 및 등록금 인상에 항의하는 극렬한 시위로 이어진 바 있다.
영국의 경우만 봐도 재정적자는 국내총생산(GDP) 대비 15%에 이른다. 영국 정부는 재정적자를 줄이려고 2015년까지 800억파운드의 공공지출을 삭감할 예정이다. 영국의 전체 실업률은 지난 5월 현재 7.7%지만 16∼24살의 청년 실업률은 20.4%에 이른다. 특히 토트넘이 포함된 해링게이구는 어린이 빈곤율이 런던 평균보다 4배 높고 전국 평균보다 2배 높은 8.8%에 이른다.
<font size="3"><font color="#006699">아랍과 유럽, 현실 저항이란 공통 분모</font></font>
이런 젊은 층의 좌절과 분노는 영국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2008년 경제위기 이후 긴축재정이 시행되자 유럽에서 청년층의 시위가 확산됐다. 포르투갈, 스페인, 프랑스, 그리스 등 유럽 각국에서 미래가 없는 청년층이 일자리와 경제개혁 등을 촉구하는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지난 3월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약 20만 명의 젊은이가 1974년 민주화 시위 이후 최대 시위를 벌였다. 이들 ‘잃어버린 세대’ ‘좌절세대’의 시위는 ‘68 학생혁명’을 떠오르게 한다는 분석도 나왔다.
그러고 보면, 이 시대 청년의 절망을 몸으로 절규한 것은 ‘재스민 혁명’을 불붙인 26살 튀니지 과일 노점상 청년 모하메드 부아지지다. 그는 불법으로 노점을 벌였다는 이유로 좌판 등을 빼앗기자 분신을 결행해서 희망 없는 세상에 죽음으로 저항했다. 부아지지는 대학을 졸업하고도 일자리를 찾지 못해 수레에 과일과 채소를 싣고 다니며 팔았고, 가족이 그의 벌이에 생계를 의존했다. 올해 1월 초 부아지지의 죽음이 아랍의 재스민 혁명으로 타오를 수 있었던 데는 억압 못지않게 빵값 등 곡물가 인상과 높은 실업률로 하루하루 살기 힘든 민중의 고달픈 삶이 불쏘시개 구실을 했다. 아랍의 재스민 혁명에 나섰던 청년들이 요구한 것은 민주주의지만, 유럽의 청년들이 갈수록 심화되는 빈부격차에 저항했다는 면에서 보면 넓게는 현실 저항과 정의에 대한 요구라는 점에서 유럽과 아랍 청년의 ‘거리투쟁’은 닿아 있다.
이런 면에서 영국의 런던 폭동이나 칠레와 이스라엘의 시위도 닮아 있다. ‘분노한 사람들’이라는 스페인의 시위대를 일컫던 이름은 지금 절망에 몰린 이들 세대의 고통을 잘 대변한다. 스페인 수도 마드리드 ‘푸에르타델솔’ 광장의 천막시위 현장에서는 청년들이 지난 5월15일 이후 40%에 이르는 청년 실업 등에 분노하며 광장에 텐트를 치고 일자리 창출과 개혁 등을 요구했다. 광장 한켠의 “직업도, 집도, 연금도 없다. 대신 두려움도 없다!”는 구호가 그들의 심정을 잘 보여준다. 최근 그리스에서는 라는 시트콤이 60% 가까운 시청률 속에 종영됐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최악의 경제위기로 국가부도 위기에 몰린 그리스에서 고용불안에 시달리는 젊은이들의 힘겨운 삶을 그려냈다. 25살 이하 그리스 법정 최저임금인 592유로(약 92만원)를 받으며 생활하는 ‘592유로 세대’는 곧 한국의 88만원 세대다. 그리스 아테네 신타그마 광장에서 시위를 이어가는 바로 그들이다.
8월6일 이스라엘에서는 예루살렘에 3만여 명이 모이는 등 30만여 명이 거리로 뛰쳐나와 물가 상승을 비난하는 시위를 벌여 ‘이스라엘의 봄’이라고 불렸다. 시위대는 교육과 복지 관련 예산 확대 등 팍팍해진 삶에 대한 대책을 요구했다. 칠레의 경우도 비슷하다. 8월9일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에서 대학생 등 1만 명이 공교육 지원 확대 등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여 경찰과 충돌을 빚었다. 2개월째 이어지는 학생들의 시위는 국민적 저항으로 확산되고 있다. 칠레는 중남미에서도 빈부격차가 극심해 불만이 억눌려온데다, 최저임금이 월 17만2천페소(약 40만원)인데 국립대 등록금이 한 해 800만원에 이르는 현실에 고등교육의 기회조차 빼앗기는 청년층의 불만이 폭발했다.
<font size="3"><font color="#006699">제2의 런던 폭동 언제 어디서든 가능</font></font>
런던의 폭동은 이제 경찰이 대규모 병력을 파견하자 진정세에 들어갔다. 하지만 힘으로 누르는 안정이 얼마나 지속될지는 미지수다. 요동치는 세계경제 속에서 청년세대에게 희망은 좀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제2, 제3의 런던 폭동이 세계 어디에서 언제 다시 터져나올지 모른다.
김순배 기자 marco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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