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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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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희망이 없다는 절규

영국 런던 폭동 그 후, 분노의 진원지 토트넘과 빈민가에서 만난 청년들… “정부와 어른들은 우리와 대화하려 하지 않았다”
등록 2011-08-18 15:21 수정 2020-05-03 04:26
지난 8월9일 저녁 7시께, 폭동이 시작된 런던 북부 토트넘 지역에서 청년 10여 명이 모여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승환 통신원

지난 8월9일 저녁 7시께, 폭동이 시작된 런던 북부 토트넘 지역에서 청년 10여 명이 모여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승환 통신원

8월11일 오후 3시께 영국 런던 남동부 빈민가 루이샴. 버스정류장에서 10여 명이 장바구니를 바닥에 내려놓은 채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 청년이 크게 틀어놓은 힙합음악은 4차선을 모두 달리는 경찰차 사이렌과 함께 울렸다. 8월10일 쇼핑센터에서 습격이 벌어졌던 이곳에서 ‘절규’가 쏟아졌다.

“정부가 10대를 빚쟁이로 몰아세워”

“우리는 살기가 팍팍한데 총리라는 사람이 한가하게 휴가나 가니 열받는 거죠. 폭동이 일어나니까 그제야 돌아왔다죠. 어른들은 우리와 대화하려 하지 않았어요.” 인디아(15)는 대학 입학을 포기했다고 말했다. “아버지가 고정 수입이 없는 음악가여서 손을 벌릴 수 없잖아요.” 지난해 대학에 입학한 라이언(20)은 정부가 공공 분야 일자리를 줄이는 것을 보고 가뜩이나 없는 취업 기회가 더 줄어드는 데 절망했다. “우리더러 계속 굶으라는 것처럼 보이더군요. 물론 폭동을 일으킨 것을 잘했다고 할 순 없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 지역 젊은이들은 늘 무관심의 대상이었을 거예요.” 또래 여성과 손잡고 루이샴역을 지나가던 대니(17·가명)는 폭동에 직접 참여했다. “정부가 이 지역 10대를 모두 빚쟁이로 만들려는 거냐. 은행에서 수업료를 대출받아야 하는데 어느 세월에 다 갚나. 그냥 우리보고 대학에 가지 말란 얘기다.” 조(17·가명)는 “여기는 평생 가난한 지역이다. 런던 남동부 일대는 평생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며 “정부가 파키스탄이나 인도 등에 교육비를 지원하면서 이 나라 학생들에게는 교육비를 지원하지 않는다”고 비난했다. 인근 공원을 지나던 잭(16·가명)은 이렇게 말했다. “옷가게를 가도 구경만 하다 나온다. 아르마니 등 명품 브랜드를 원하는 것도 아닌데 중심가 브랜드 매장에서 옷 한 벌 사기 어렵다.”

흰색 보풀이 일어난 모직 점퍼를 입고 공원 입구를 지나던 토미(16·가명)에게선 이곳 소외된 계층의 삶이 배어났다. 그는 지난해 어머니를 여읜 뒤 아버지·형과 함께 살고 있다. 그의 아버지는 아침 6시에 나가 오후 4시께 들어오지만 정확한 직업은 모른다. 아버지는 주말에도 일하고 끼니는 집에서 각자 알아서 때운다. 그는 아버지한테서 일주일 용돈으로 20파운드(약 3만5천원)를 받아 형과 나눠쓴다. 런던에서 맥도널드 햄버거 세트는 보통 5파운드 안팎이다. “성인이 아니라 버스 등을 공짜로 탈 수 있고 잘 아껴쓰면 생활할 수 있어요. 너무 배고프면 참을지언정 길에 버려진 음식은 입에 대지 않아요.” 그는 장래 희망이 전자제품 수리공이다. 그는 “보일러가 고장나 겨울에 추위에 떠는 사람을 위해 일하고 싶다”고 말했다.

일상적 몸수색에 치욕감 느껴

넓은 공터 같았다. 8월9일 오후 1시께, 런던 북부 토트넘 헤일 지하철역을 등지고 섰을 때 첫 느낌이 그랬다. 휑한 공간이 이어졌고 새 건물이랄 게 없었다. 주황색과 빨간색이 선명한 낙서가 지하철 벽면에 그려져 있었다. 목 뒤편에 별 모양의 문신을 새긴 한 10대 남성이 또래 여성의 손을 잡고 역 출구에서 나왔다. 토트넘은 폭동의 진원지다. 지난 8월4일, 29살 흑인 남성 마크 더건이 경찰의 총에 맞아 숨진 뒤 이 지역 10대들이 중심이 돼 경찰서를 부수고 불을 붙였고, 이후 폭동은 런던 빈민가로 번졌다. 이날 영국 일간 등 모든 신문 1면은 화마에 휩싸인 건물 사진으로 뒤덮였다. 쇼핑센터 안 벤치에 앉아 있던 한 부랑자는 “사방에서 아이들이 몰려왔어. 쇼핑센터 건물 유리창을 깨고 들어가 물건을 가지고 달아났다”고 말했다.

역 뒤쪽으로 걷자 곧바로 대형 쇼핑센터가 나왔다. 쇼핑센터 내 전자제품 매장과 휴대전화 매장 정문이 나무판자들로 봉해진 채 막혀 있었다. “쇼핑센터를 한번 둘러봐라. 역이 코앞에 있는데도 은행 하나 없다. 소외감을 느끼던 어린 녀석들이 건수가 생기자 일거에 폭발한 것이다.” 토트넘에서 태어나고 자란 서니(22·가명)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이 지역 10대들이 습격한 패스트푸드점에서 햄버거를 먹고 있었다. 경찰 3~4명이 무전기를 입에 대고 돌아다녔다. 쇼핑센터를 등지고 10분 남짓 걷자, ‘교육예산 삭감 정책에서 저희를 보호해주세요’라는 글자판이 담장에 붙은 초등학교에 이르렀다. 초등학교 건너편에서 한 10대 남성이 휴대전화기를 귀에 대고 어슬렁거렸다. “경찰은 처자식이 있는 무고한 사람을 죽여놓고 사과 한마디 제대로 하지 않았다. 경찰은 쓰레기다.”

헤일역 근처 주택가에서 만난 에이드리언(17)은 폭동에 참여하지 않은 것이 아쉬운 듯했다. “마음 같아선 건물들 때려부술 때 함께 뛰어들어 다 박살내고 싶었다. 구속됐다가 전과 기록 때문에 평생 고생할까봐 참았다.” 그는 런던 북부의 한 식스폼칼리지(한국의 고등학교)에 다닌다. 에이드리언은 “이곳 토트넘에서 경찰들이 가방을 열고 소지품 검사를 하는 건 일상이다. 참을 수 없는 건 느닷없이 순찰차를 타고 나타난 경찰들이 몸수색을 할 때다. 흉기 등 아무것도 나오지 않아도 경찰들은 진심 어린 사과 없이 돌아갔다.”

저녁 무렵, 토트넘 경찰서로 향했지만 닿을 수는 없었다. 도로 한복판에 폴리스 라인을 치고 경찰 4~5명이 차량과 통행을 통제하는 등 경찰서 진입을 막았다. 폴리스 라인에서 몇십m 떨어진 주택가 난간에 앉은 남성 10여 명이 상황을 지켜봤다. 쓰레기통은 가득 차 주변 바닥에 음식물 찌꺼기가 널렸다. 거리에 나뒹구는 신문에서 화마에 타버린 건물들이 스쳐갔다. 경찰들은 어떤 질문을 해도 “할 말 없다”고 잘라 말했다. 하지만 ‘주민들이 치안 불안을 호소한다’고 하자, “폭도들이 먼저 위협을 가하지 않는 이상 물리적 완력을 쓰지 말라며 윗선에서 인권을 강조하다 보니 현장 진압이 어렵다”고 불만을 털어놨다.

“전쟁 치르느라 청년 실업 외면”

이날 밤 9시께, 폭동이 일어난 패컴 지역까지 걸어서 10분 정도 거리의 런던 남동부 뉴크로스. 경찰차와 앰뷸런스가 10분에 한 번꼴로 사이렌 소리를 내며 달려갔고, 거리에는 화약 냄새가 진동했다. 상점은 거의 문을 닫았고, 술집은 텅 비었다. 거리는 죽은 것 같았다. 슈퍼마켓 앞에 10대 무리가 모여 있었다. 슈퍼마켓 건너편에서 짐(34·가명)을 만났다. “지금 이게 나라 돌아가는 꼴이다. 정부가 뿌린 대로 거둔 거지.” 뒤늦게 대학에 간 짐은 청년들의 좌절을 이해하는 듯했다. 의류매장과 슈퍼마켓 점원으로 일하던 짐은 4년 전 대학에서 디자인 관련 졸업장을 취득했을 때만 해도 자신의 미적 재능을 살릴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졸업 뒤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한창이었다. 당시 영국 정부는 파병을 결행했다. “정부는 전쟁 비용으로 국가 예산을 다 날려버렸고 정작 경제위기가 닥쳤을 때 아무런 대응을 하지 못했다. 당시 거리에 실업자들이 넘쳐났고 어느 누구도 직장을 구할 수 없었다.” 결국 졸업 뒤 그는 런던 중심가에 있는 의류매장에서 일했지만, 한 달 수입은 한 달 방세와 맞먹었다. 현재 짐은 런던의 한 미술 마케팅 회사에서 무보수로 인턴 일을 한다. “10대 폭도들을 보면 철딱서니 없는 것 같지만, 마음이 편치 않다. 나처럼 살까봐 가슴이 아프다.”

토트넘과 같은 북부에 속하지만 ‘부촌’인 햄프스티드의 분위기는 달랐다. 8월10일 오후 3시께, 햄프스티드 인근 정원이 딸린 미술관 카페에는 30여 명이 있었고 일본인 5~6명을 제외하곤 모두 백인이었다. 전업주부인 알릭스(35)는 미술관 정원에서 8개월 된 아들을 실은 유모차를 옆에 두고 보수 일간지 를 읽었다. ‘10대들이 부자들에게 불만이 많은 것 같다’고 하자 알릭스는 이렇게 말했다. “그들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인생의 가치를 찾는 건 결국 본인이에요. 삶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면 성난 10대 아이들은 밝은 미래를 얻을 수 있을 거예요.”

드물긴 했지만 햄프스티드에서 흑인을 만날 수 있었다. 대학생 마크(20·가명)는 또래 친구와 공원을 걷고 있었다. 이곳에서 5년째 산다는 마크는 이 지역 사람들은 빈곤을 모른다고 잘라 말했다. “이곳 사람들은 토트넘 사람들이 어떤 환경에 있는지 알려고도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이날 오후 5시께, 런던 중심가 국회의사당을 찾았다. 의사당 시계탑이 구름에 닿을 듯 솟아 있었고 의사당 입구에서 관광객들이 사진을 찍고 있었다. 빈곤해 보이거나 껄렁해 보이는 10대는 없었다. 의사당 건너편에 있는 어학원 영어 강사인 캐서린(37·가명)은 정부가 안일하게 대처한다고 비판했다. “아이들은 지금 막가파 수준으로 행동하고 있어요. 정부가 강력한 처벌을 하든 회유책을 쓰든 적극적으로 대책을 마련해야 해요.” 유치원 교사 헤더(36)는 부유층이든 빈곤층이든 모두 책임이 있다고 말했다. “이번 사태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한 명도 없습니다. 나는 영국인으로서 부끄러운 마음이 들어요.”

폭동 끝나도 사라지지 않을 계층 갈등

사태는 쉽게 수그러들지 않을 듯했다. 영국 언론은 사태 초기 1985년 토트넘 흑인 폭동과 비교했지만 폭동이 확산될수록 경제위기와 정부의 긴축재정 속 심화된 빈부격차 등 사회 양극화를 지적하고 있다. 1985년 경찰의 가정 침입으로 한 흑인 여성이 사망하자 흑인들이 집단 폭동으로 대응했지만, 이번 사태는 빈민가 백인 청년들도 참여하고 있다. 폭동 이후 언론에는 날이 갈수록 10대 백인 청년들의 사진이 자주 등장했다. 팀 크룩 영국 골드스미스대 교수는 8월10일 “이번 사태는 1985년 토트넘 흑인 폭동보다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다. 기본적으로 빈자와 부자의 대결 구도인데 세대 간 갈등도 내재돼 있다. 사태의 핵심은 경제위기에서 찾을 수 있다”며 “폭동을 일으킨 10대들은 정부에 마치 우리는 희망이 없다고 절규하는 것 같다. 유일한 해결책은 계층과 세대 간의 소통인데 쉽지 않아 보인다”고 말했다.

이날 밤 10시께, 건물에 불을 밝힌 의사당은 왕관처럼 빛났다. 여전히 관광객은 의사당 입구에서 사진을 찍었고 10대는 보이지 않았다. 사이렌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부자와 빈자 사이에 갈라진 골 사이, 소외된 10~20대들의 좌절은 타오르는 불길보다 심각해 보였다. 폭동이 사라져도 영국이 갈 길은 먼 듯했다.

런던(영국)=이승환 통신원 stevelee05@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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