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2월27일 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을 받은 카를로스 안드레스 페레스 정부가 교통요금 2배 인상 등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에 나서자 빈민들의 대규모 시위와 약탈이 벌어졌다. 정부의 무력 진압으로 카라카스에서만 2천 명 이상 숨졌다. 이 사건은 1992년 우고 차베스의 쿠데타, 1998년 12월 차베스 집권의 배경이 됐다. 이후 최근 10여 년간 계속된 라틴아메리카 좌파 바람의 출발점이다. 지난 6월5일, 페루 대통령 선거 결선투표에서 오얀타 우말라(48)가 게이코 후지모리(36)를 약 3% 차이로 물리치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라틴아메리카에서 또 한 명의 좌파 지도자가 등장했다. 페루에서는 후안 벨라스코알바라도 군사정부(1968~75) 이후 36년 만이다.
<font size="3"><font color="#006699">공평한 부의 분배에 대한 열망</font></font>
우말라의 좌파 정부가 어떻게 탄생하게 됐는지 따지기 앞서 후지모리가 왜 패배했는지 짚어보자. 알레한드로 톨레도(2001~2006년 재임) 전 페루 대통령은 대선 결과에 대해 “국민과 민주주의, 국민의 기억이 승리했다”고 평가했다. 게이코 후지모리가 상징하는 아버지 알베르토 후지모리(1990~2000년 재임) 시절 ‘개발독재 모델’로의 복귀를 막았다는 의미다. 막판 결정적 이슈는 강제 불임수술에 따른 인권침해다. 아버지 후지모리 시절, 빈곤지역 원주민 25만여 명에게 강제 불임수술을 했다는 10년도 넘은 사실이 최대 쟁점으로 부각했다. 이 사건은 아버지 후지모리 시절 인권침해의 상징이 됐고, 결국 딸 후지모리에 대한 반대로 이어졌다. 딸 후지모리는 아버지 시절의 경제발전과 치안안정이 최대 자산이었지만, 그 시절 독재와 인권침해의 기억에 갇혔다.
좌파 우말라는 어디에서 왔는가? 거슬러 가보자. 1930년대 수입대체산업(ISI)에 의지하던 라틴아메리카는 1960년대 한계를 드러냈다. 갈수록 외채에 의존하던 라틴아메리카 경제는 1970년대 세계경제 위기 이후 금리 인상 등으로 위기에 빠진다. 1980~90년대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구했지만 남은 것은 심각한 외환위기에 따른 경제불안과 불평등 심화였다. 1994년 1월1일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이 발효된 날, 멕시코 사파티스타민족해방군(EZLN)은 그래서 이렇게 외쳤다. “이제 그만!”(Ya basta!) 멕시코 테킬라 위기(1994), 브라질 헤알화 위기(1998), 아르헨티나 디폴트 사태(2001) 등의 연쇄 위기로 빈부 격차는 가속화됐다.
페루의 빈곤율은 2001년 55%에서 34%로 줄어들었다. 하지만 전체 인구의 62%가 여전히 하루 3달러 미만으로 살아간다. 더 큰 문제는 빈부 격차다. 2002~2010년 평균 6.5%의 경제성장의 수혜는 수도 리마와 해안 지역의 중산층 이상에게 돌아갔다. 반면에 안데스 고지대와 아마존의 원주민은 제외됐다. 한 아마존 원주민은 최근 <bbc> 인터뷰에서 “아이들이 아직도 맨땅에 앉아서 무릎을 꿇고 공책에 글자를 쓰며 배우고 있는데 경제성장이 무슨 말이냐? 우리는 느끼지 못한다. 성장은 통계로만 존재할 뿐이다”라고 불만을 터뜨렸다. 알란 가르시아 현 대통령은 경제성장을 이끌었지만 원주민 인권, 불평등, 부패, 마약 등의 문제 해결에 집중하지 않았다. 리마를 벗어나면 빈곤층의 불만이 치솟아 대통령이 방문하기 어려운 지역도 있다. 우말라가 6월5일 대선 승리 연설에서 “이렇게 많은 페루인들이 가난하게 사는데 페루가 발전한다고 말할 수 없다”며 “우리는 가난한 이들에게 진심으로 관심 갖는 정부를 오랫동안 기다려왔다”고 말한 배경이다. 페루인은 다른 많은 라틴아메리카 국민처럼 공평한 부의 분배에 목말랐던 것이다. ‘더 공정하고 덜 불평등한 사회’ ‘사회통합의 엔진이 되는 경제’를 내건 우말라의 승리는 어쩌면 오래전부터 예고된 것인지도 모른다.
<font size="3"><font color="#006699">다수의 빈곤층, 좌파 열풍의 이유 </font></font>
라틴아메리카에서 좌파는 한때 실패를 겪었다. 1959년 라틴아메리카 무장투쟁의 영감을 불어넣은 쿠바혁명 이후, 1960~70년대 라틴아메리카에서 게릴라 등 좌파는 군부독재에 맞서 투쟁을 전개했다. 1961년 브라질의 후아우 굴라트 정부는 사회주의 실험에 나섰지만 1964년 쿠데타로 무너졌다. 칠레에서는 살바도르 아옌데 정부가 1970년 서반구 최초로 선거를 통해 사회주의 정권을 수립했지만, 1973년 미국의 지원을 등에 업은 쿠데타로 붕괴됐다. 1979년 혁명정부를 수립한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타 혁명은 내부 분열과 경제정책 실패에 이어 1990년 우파에게 선거에서 패배해 미완으로 끝났다. 사회주의 진영의 붕괴는 라틴아메리카 좌파의 쇠퇴를 부추겼다.
오늘날 라틴아메리카 좌파와 떼놓을 수 없는 게 자원민족주의다. 우말라도 마찬가지다. 자원산업 국유화 확대, 다국적 광산업체에 대한 증세 등을 공언하고 있다. 라틴아메리카 좌파는 석유와 광물 등 천연자원을 효과적으로 활용해 경제발전을 이루고, 이를 통해 빈곤과 빈부 격차를 해결하려 한다. 우말라도 페루 수출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광산업체의 세금을 더 걷는 등 전략산업 통제를 강화해 빈곤 해결에 사용하겠다고 공약했다. 페루 광산업에서 거둬지는 세금은 국가예산의 10%가 넘는다. 페루는 금은 세계 최고, 구리는 세계 2위 생산국이다. 천연자원이 국제시장에서 높은 가격을 유지해, IMF는 페루가 2015년까지 라틴아메리카에서 최고의 경제성장을 기록할 것으로 예상했다. 우말라의 친빈곤층 사회 개혁의 여건은 우호적인 셈이다.
<font size="3"><font color="#006699">온건파 대거 수용하며 중도 노선 따르기로</font></font>
우말라는 급진좌파 차베스의 길을 갈 것인가, 아니면 중도실용좌파 룰라의 길을 걸을 것인가? 게이코 후지모리는 우말라를 두고 ‘양의 탈을 쓴 늑대’라고 공격했다. 우말라가 당선된 다음날인 6월6일 페루의 주식시장은 12.5% 폭락하기도 했다. 차베스는 ‘절대악’, 룰라는 ‘절대선’이라는 서방 언론의 양분 속에서 그가 ‘급진 좌파’로 낙인찍힌 차베스의 길을 갈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다. 우말라가 2006년 대선에 처음 출마할 때 차베스를 격찬했고, 중령 출신으로 2000년 군사 쿠데타를 주도한 사실 등은 자연스레 차베스를 떠올리게 한다. 특히 페루는 후안 벨라스코 대통령의 ‘군부 좌파’ 경험이 이런 우려를 키웠다.
이 때문에 우말라는 자신의 목표가 “사회통합과 함께 경제성장을 견고화하는 국민적 화합정부”임을 강조하고, 외국인 투자를 환영하고 자유무역을 존중한다고 밝혔다. 사실 그의 공약에서 차베스식 ‘급진좌파’ 성향을 찾기는 쉽지 않다. 그의 주요 공약을 보면 수도 및 위생 공공 확보, 재정 적자 국내총생산(GDP) 1% 미만 유지, 최저임금 600솔(약 214달러)에서 750솔(약 268달러)로 인상, 세금을 현재의 GDP 15% 수준에서 18~20% 수준으로 인상, 투자청 재조직, 원자재 국내시장 창출, 국영기업 구실 확대, 안데스 통합 강화, 65살 이상 최저연금 보장, 반부패위원회 설치, 교육 및 의료보험 지출 확대, 단임제 보장, 국제조약 및 협정 준수, 지역자치 확대, 채굴업 허가 전 지역사회 자문권 보장 등이다. 자유시장과 사유재산을 존중하며 빈곤을 퇴치하겠다는 것이다. 그는 차베스가 이끄는 ‘미주를 위한 볼리바르 동맹’(ALBA)에 가입하지 않고 미국과도 마약 퇴치 등에 협조하겠다고 밝혔다. 페루 일간 는 “5년 전 우말라는 차베스의 추종자였지만 이제 차베스를 실패자로 본다”고 평가했다. 그는 브라질 노동자당(PT)에서 활동한 루이스 파브레를 대선 참모로 기용하기도 했다. 이런 노력이 두 번째 대선 도전에서 ‘빨갱이’ 공격을 이겨낼 수 있었던 배경이다. 차베스가 집권했을 때 베네수엘라 경제는 최악의 상황이었지만, 안정적 성장을 걷는 페루 경제에 우말라가 당장 급격한 변화를 주기도 어렵다. 전체 130석 가운데 47석만을 확보한 집권당의 한계와 국민의 절반이 후지모리에게 투표한 사실도 그의 보폭을 제한한다. 그는 대통령직 인수위원 20명에 온건주의자를 대거 포함시켰다.
토니 블레어 총리(1997~2007년 재임)의 영국 노동당은 ‘제3의 길’을 내세웠다.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1998~2005년 재임)의 독일 사민당은 ‘신중도’를 내걸었다. 라틴아메리카에서 그것은 ‘중도실용좌파’라는 이름으로 자리잡고 있다. 한때 게릴라로 활동했던 호세 무히카 우루과이 대통령, 마우리시오 푸네스 엘살바도르 대통령, 지우마 호세프 브라질 대통령이 제도정치권에 들어와 중도 노선을 지향하고 있다. 서울대 라틴아메리카연구소 이성형 HK 교수는 라틴아메리카 좌파들의 변신을 이렇게 표현한 바 있다. “1970~80년대 좌파가 ‘에스프레소 좌파’였다면 요즈음은 ‘카푸치노 좌파’다.” 라틴아메리카 전문 싱크탱크 ‘미주간대화’(Inter-American Dialogue) 마이클 시프터 회장은 미국외교협회(CFR)와의 6월7일 인터뷰에서 “만약 우말라가 성공한다면 민주주의 틀 안에서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온건·실용좌파가 라틴아메리카의 일종의 합의된 모델임을 다시 입증하는 셈”이라고 풀이했다.
<font size="3"><font color="#006699">“브라질 모델 따르겠다”</font></font>
우말라는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라틴아메리카의 문제를 이념전쟁으로 돌리는 게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불평등과 문맹, 영양실조를 해결하는 것이 이데올로기와 무슨 상관이 있나. 쥐를 잡기만 하면 고양이의 색깔은 무엇이든 상관없다.” 중국 개혁개방의 아버지 덩샤오핑의 ‘흑묘백묘’론을 떠올리게 하는 말이다. 우말라의 노선은 분명하다. 그는 유세 과정에서 “거시경제 균형을 유지하며 사회통합과 경제성장을 달성한 성공적 과정이 브라질에서 진행되고 있다”고 자신의 지향점을 제시했다. 라틴아메리카는 빈곤 및 극심한 빈부 격차와 함께 외채위기 등 경제불안에 시달려왔다. 거시경제 균형과 빈부 격차 해소를 통한 사회통합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것은 우말라의 몫이다. 2004년 주한 페루대사관에서 5개월간 무관으로 근무하며 한국의 발전상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는 우말라. 한국은 그에게 어떤 교훈을 줬을까? 그는 6월28일 5년 임기의 대통령에 취임한다.
김순배 기자 marcos@hani.co.kr</ap></b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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