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 총재 유럽 독식 이번엔 깨질까.”
2011년 6월 얘기가 아니다. 2007년 7월 한 일간지 기사 제목이다. 로드리고 라토 전 국제통화기금(IMF) 총재가 개인적 사유로 사퇴하겠다고 밝힌 뒤 후임자로 도미니크 스트로스칸 등이 총재로 거론될 당시 나온 기사다. 장클로드 융커 유로그룹 의장 겸 룩셈부르크 총리는 당시 칸이 “유럽 출신 마지막 IMF 총재가 될 것”이라며 “당분간 유럽 출신 총재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4년이 지난 지금 이 말은 거짓말이 될 것으로 보인다. 칸 총재가 미국 뉴욕에서 성폭력 관련 혐의로 5월18일 사임한 뒤 후임자로는 크리스틴 라가르드 프랑스 재무장관이 유력하다. 아구스틴 카르스텐스 멕시코 중앙은행 총재가 경쟁에 나섰지만 가능성은 낮다.
유럽에 과다하게 배정된 IMF 투표권IMF는 1946년 출범 이후 지금까지 10명의 총재가 거쳐갔다. 모두 유럽 출신이다. 4명은 프랑스, 2명은 스웨덴 출신이다. 스페인과 독일, 벨기에, 네덜란드 출신이 각 1명이다. 프랑스는 IMF 65년 역사 가운데 36년간 총재 자리를 지켰다.
유럽 출신이 국제 금융시장을 지휘하는 ‘경제 대통령’의 자리를 독차지한 구조는 간단하다. ‘세계은행 총재는 미국, 국제통화기금 총재는 유럽’이라는 미국과의 묵계 속에, 유럽에 절대적으로 유리하게 배정된 지분에 따라 투표권 수가 다른 가중표제가 적용되기 때문이다. IMF 총재는 187개 회원국을 대표하는 24명의 이사로 구성된 집행이사회에서 지분율에 비례한 투표권에 따라 50% 이상의 지지를 얻는 후보가 총재로 선출된다. IMF 회원국은 공동기금 조성을 위해 국내총생산(GDP)과 외환보유액, 경상수지, 수출 등을 고려해 배정된 일정 쿼터에 대한 출자 의무를 지는데, 이 쿼터가 재원 이용 한도는 물론 투표권 산출의 기준이 된다.
쿼터에 따라 산출된 투표권 현황을 보면, 미국은 현재 투표권의 16.8%를 갖고 있다. 여기에 독일(5.83), 프랑스(4.30), 영국(4.30), 이탈리아(3.17) 등 유럽연합(EU) 투표권 31.01%를 합치면 50%에 가깝다. 캐나다와 일본이 유럽 쪽 후보를 지지해온 점을 고려해 두 나라의 투표권까지 합치면 60% 수준이다. 이에 반해 브릭스(BRICS) 5개국의 투표권 합계는 11.06%밖에 안 된다. 차기 총재에 다시 유럽 출신을 뽑는 것을 신흥국들이 비판하지만 유럽 출신이 선출될 수밖에 없는 구조다.
IMF 투표권은 2008년과 2010년 신흥국들의 위상을 반영해서 늘렸지만 여전히 유럽에 과다하게 배정돼 있다. 한 예로 벨기에가 1.86%의 투표권을 갖고 있다. 브라질(1.72%)보다 많다. 중국(3.82)의 절반 가까운 수준이다. 2010년 기준 브라질의 GDP는 2조1940억달러로 세계 8위다. 반면에 벨기에는 그 5분의 1도 안 되는 3969억달러로 세계 31위다. 네덜란드의 GDP는 6804억달러로 브라질의 3분의 1도 안 되지만, 투표권 비율은 2.08%로 브라질보다 높다. 한국의 GDP 규모는 1조4670억달러로 세계 13위지만, 투표권은 네덜란드보다 훨씬 낮은 1.37%밖에 안 된다.
투표권이 열쇠를 쥐고 있지만 지금까지 IMF 총재는 투표를 거치지 않고 집행이사국들 간의 합의에 따라 뽑아왔다. 하지만 이런 합의라는 것도 실제 표결을 거치지 않았을 뿐 많은 투표권을 가진 국가의 의사가 합의 결과에 그대로 반영된다. 결국 미국과 유럽의 취향이 반영될 수밖에 없고 외형상만 합의제인 셈이다. 과거 이사들만이 후보를 내놓던 것과 달리 규정상으로는 어느 나라든 후보를 낼 수 있지만, 사실상 유럽 주요국이 지지하는 후보가 선출되는 이유다.
IMF 집행이사회에서 주요 의사 결정은 85%의 찬성으로 이뤄져, 미국이 거부하거나 유럽 주요국이 반대하면 특정 의안이 채택될 수 없다. 또 지분율이 높은 미국과 일본, 영국, 프랑스, 독일 등 5개국은 단독으로 집행이사로 활동한다. 반면에 지분율이 낮은 나라는 19개 그룹을 구성해 각 그룹당 1명씩 선출이사가 선임된다. 한국도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몽골, 우즈베키스탄 등으로 구성된 그룹을 대표해 2년마다 오스트레일리아와 교대로 집행이사국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런 구조 속에서 지난 65년간 유럽이 IMF 총재를 맡았다. 현 IMF 지배구조가 지나치게 선진국 중심이어서 세계 금융환경의 변화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는 지적이 계속되는 배경이다. IMF가 개도국의 목소리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해서 아시아 금융위기에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했다는 불신도 있다. 2008년 아시아 지역에서 IMF를 대체하는 동아시아통화관리기금(AMF) 설립에 합의한 배경이기도 하다. 제주평화연구원 한인택 연구위원은 “국제정치는 힘에 의해 현실적으로 운영된다. 유엔도 안전보장이사회가 거부권을 행사하고 있고 결국 강대국의 결정이 존중된다”며 “완전히 민주화된 조직이면 명분상으로는 정당해도 실효성 있는 결정이 어려운 면도 있다. 결국 국제사회에서 1국가 1표는 이상인 셈이다”라고 말했다.
IMF는 유럽, 세계은행은 미국 유럽의 IMF 총재 독점은 미국과의 묵계가 없다면 불가능하다. 곧 유럽이 IMF 총재를 차지하는 대신 세계은행 총재는 미국이 독점해온 것이다. 이런 구조 때문에 유럽과 미국이 IMF와 세계은행 수장직을 놓고 서로 밀어주는 행태가 되풀이되고 있다. 만약 미국이 이번에 유럽 출신 IMF 총재 후보를 반대할 경우, 차기 세계은행 선출 과정에서 미국은 유럽의 지지를 얻지 못할 것이라고 은 최근 보도했다. 로버트 졸릭 세계은행 총재는 2012년 중반에 5년 임기가 끝난다. <afp>은 6월1일 “(IMF 총재직에 도전한) 카르스텐스 멕시코 중앙은행 총재가 IMF 총재직은 유럽이, 세계은행 총재는 미국이 차지하는 오래된 전통을 유지하려는 많은 유럽 국가들의 반대에 부닥치고 있다”고 전했다.
미국이 유럽이 지지하는 IMF 총재 후보를 거부한 적은 단 한 번 있다. 미국이 2000년 유럽이 지원한 독일의 카이오 코흐 베저 재무차관을 거세게 반대하는 바람에 독일이 호르스트 쾰러를 새로 내세우는 진통 끝에 유럽인이 계속 IMF 총재직을 지켰다. 그런데 쾰러가 총재직에 오른 과정이 재미있다. 당시 카이오 코흐 베저 독일 재무차관, 사카키바라 에이스케 전 일본 대장성 차관, 스탠리 피셔 IMF 부총재 등 3명의 후보로 압축됐다. IMF 안팎에서 위기관리 능력을 인정받은 피셔 부총재가 가장 많은 지지를 얻었으나 미국은 반대했다. 미국인인 피셔 부총재가 IMF 총재직을 맡으면 미국이 독점해온 세계은행 총재 자리를 유럽에 내줘야 하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흘러나왔다. 미국은 IMF에서도 수석부총재를 차지해왔다. 미국은 현재 IMF 총재 대행을 맡고 있는 미국 출신의 존 립스키 수석부총재가 8월 말에 물러나면 그 자리에 미국 재무부 차관 출신으로 백악관에서 국제경제 문제를 담당하는 데이비드 립턴 특별보좌관을 앉히는 방안을 검토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번에도 유럽 출신 IMF 총재로 기우는 데는 브릭스 등 신흥국이 합의된 단일후보를 내놓지 못하는 탓도 있다. 브릭스를 대표하는 IMF 집행이사들은 5월24일 공식 성명에서 “IMF 총재직에 유럽인을 임명하는 전통은 IMF의 정당성을 손상한다”며 “유럽에서 IMF 총재가 반드시 배출돼야 한다는 한물간 관행은 버릴 때가 됐다”고 밝혔다. 하지만 현 구조의 유지를 원하는 유럽이 프랑스 재무장관 출신 후보를 내놓고 결속하는 반면에 신흥국들은 단일후보에 합의하지 못하고 있다. 한인택 연구위원은 “브릭스는 중국과 인도 등이 서로 정치적 이해관계가 엇갈리고, 한국과 중국의 투표권이 증가하면 유럽과 마찬가지로 고평가된 아프리카와 중남미의 지분이 감소하는 등 제로섬 게임이다 보니 지분 변동에 선진국만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라며 “중국은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같은 기구도 있고 국제기구를 초월해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채널이 많다 보니 IMF 총재직에 사활을 걸지 않는다”고 분석했다.
사실 유럽은 다급하다. 그리스, 아일랜드, 포르투갈이 잇따라 구제금융을 받았다. 유럽은 비유럽 출신 총재가 유럽의 구제금융 프로그램에 비우호적일 것을 우려해, 유럽의 재정위기가 심각한 만큼 유럽을 잘 아는 인사가 IMF 총재로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IMF 총재 후보로 나선 카르스텐스는 “유럽은 IMF 총재로 유럽인이 필요한 게 아니라 해법이 필요하다”며 “유럽의 문제를 좀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비유럽인이 선출되는 게 더 적절하다. 지난 3년간 유럽인이 총재였지만 위기는 계속됐을 뿐 해결되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제2차 세계대전 종결 뒤 열린 브레턴우즈 회의는 IMF와 세계은행을 탄생시켰다. 두 국제 금융기구는 그동안 개발도상국의 경제정책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서구 중심의 세계 금융구조를 유지해왔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5월25일 영국 의회 연설에서 “중국, 인도, 브라질 같은 나라들이 급성장하면서 미국과 유럽의 리더십이 쇠퇴할 것이라는 주장이 있지만 틀렸다”며 “서구의 시대는 바로 지금”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미국발 금융위기 뒤 국제 금융질서의 지배구조는 분명히 바뀌고 있다. 신흥국들은 서방이 장악해온 유엔과 IMF 등 국제기구의 지배권 재편을 요구하고 있다. 중국 등이 참여한 G20 체제가 그동안 국제 경제질서에서 실질적 영향력을 행사해온 주요 7개국(G7) 중심 체제를 대체한 것에서 잘 드러난다. 지난해 서울 G20 정상회의에서는 신흥국의 경제력 성장을 반영해 현재 9개인 유럽의 IMF 이사국 자리 가운데 2개를 신흥국으로 이전하기로 합의했다. 또 IMF의 쿼터 6% 이상을 한국과 중국 등 신흥국으로 이전하기로 결정했다. 특히 중국은 쿼터가 4%에서 6.4%로 증가했고, 이에 따라 미국과 일본에 이어 순위가 3위로 상승하게 됐다. 인도, 러시아, 브라질 등 브릭스 국가들의 지분율도 모두 10위권 내로 진입하는 등 IMF 65년 역사상 가장 큰 지배구조 개편이 이뤄졌고, 최종 확정 시행을 앞두고 있다. 선진국이 독식해온 세계 금융권력의 구조가 깨지고 있는 것이다. 는 5월20일 사설에서 “지난 65년간 IMF 총재가 유럽의 부유한 선진국에서 선출된 것은 미국이 세계은행 총재를 골라온 전통과 함께 1946년 경제 지형을 반영하고 있지만 오늘날의 세계를 반영하지는 못하며 중국과 인도, 브라질이 반감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고 지적했다.
라가르드, 마지막 유럽 출신 되나?
IMF 이사회는 6월10일까지 총재 후보 추천을 받은 뒤 6월30일 이전에 집행이사 24명의 합의 추대로 신임 총재를 선출할 예정이다. 라가르드는 브라질, 중국, 인도, 아프리카를 차례로 방문하며 지지 호소에 나섰다. 싱크로나이즈드스위밍 국가대표 출신인 라가르드가 이변 없이 IMF 총재가 되면 IMF 첫 여성 수장에 오르게 된다. 그는 마지막 유럽 출신이 될까? 아니, 변화하는 세계 질서는 언제까지 유럽인 IMF 총재를 용인할까?
김순배 기자 marcos@hani.co.kr</af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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