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부부가 호수에서 보트를 타고 있다. 갑자기 나타난 갱들이 총을 난사한 뒤 달아난다. 수사가 시작되자, ‘중단하라’는 협박이 날아든다. 그리고 얼마 뒤, 수사를 총괄하던 경찰청장이 실종됐다. 목이 잘린 청장의 주검은 여행가방에 담긴 채 군부대로 배달됐다.
40개 구덩이, 180여구 주검
영화 같다. 하지만 지난해 9월30일 이후 미국과 국경을 접한 멕시코 동북부 타마울리파스주 리오그란데에서 벌어진 일이다. 공포영화는 현재진행형이다. 이 주에서는 지난 4월 이후 40여 개의 구덩이에서 목이 잘린 상태 등으로 주검 180여 구가 발견됐다. 두랑고주에서도 마약조직에 살해된 뒤 땅에 매장된 주검이 5월12일 8구 등 최근 두 달간 196구가 잇따라 발견됐다. 지난 4년6개월 동안 3만4600여 명이 마약 관련 폭력범죄로 목숨을 잃었다. 수천 명의 실종자는 별도다. 경찰과 군인 2300명도 희생됐다. 이런 마약범죄 관련 살인사건은 치와와·타마울리파스 등 북부 주는 물론, 시날로아·미초아칸·게레로 등 남서부 주에서도 벌어지고 있다. 미국과의 국경도시인 치와와주 시우다드후아레스에서는 지난해만 3천 명 넘게 살해돼 ‘죽음의 도시’로 변했다. 마약조직의 끔찍한 수법에 시민들은 공포에 새파랗게 질리고 있다.
치안 불안을 호소하는 불만이 들끓는 것은 당연하다. 지난 5월8일 멕시코 수도 멕시코시티의 중앙광장 소칼로에서는 1만여 명이 모여 대규모 항의시위가 벌어졌다. 참가자들은 치안 책임자의 사퇴를 요구하는 등 날로 심각해지는 치안 불안에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연방통계청 조사에서 국민의 41%가 오후 4~7시에 ‘혼자 걸어다니기 무섭다’고 답했다. 멕시코 주재 미국상공회의소 조사 결과, 기업인 500명 가운데 67%가 ‘지난해보다 올해가 덜 안전해졌다고 느낀다’고 대답했다. 지난 2월에는 멕시코 여론조사기관 미토프스키(Mitofsky)가 조사한 이래 처음으로 경제를 제치고 치안이 가장 심각한 문제로 꼽혔다. 스페인계 BBVA은행 수석분석가 호르헤 시실리아는 언론과 인터뷰에서 “지난해 멕시코 경제가 5.5% 성장했지만, 치안 불안이 아니었으면 1%는 더 성장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마약과의 전쟁’은 2006년 12월 펠리페 칼데론 대통령 취임 뒤 시작됐다. 하지만 그로부터 4년6개월, 마약과의 전쟁은 수렁을 헤매고 있다. 멕시코 연방정부는 그동안 4만5천 명의 연방 군인과 경찰을 주요 지역에 파견했다. 지난 5월6일에는 군경 수백 명을 다시 북부의 치안 불안 지역에 파견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10만 정에 이르는 무기와 100억달러어치의 마약을 압수했지만 마약조직은 날로 기승을 부리고 있다. 멕시코 정부는 마약범죄 희생자의 약 90%는 마약조직 간 영역다툼에서 희생된 카르텔 조직원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타마울리파스주에서 발견된 주검들은 미국행 버스를 탄 민간인들로, 마약조직으로 끌어들이려다 거부당하자 살해하는 등 민간인 피해가 커지고 있다.
정부 무능 더해져 사태 악화이처럼 마약범죄가 심각해지는 이유는 마약조직 간 영역 대결 때문이다. 시우다드후아레스가 속한 치와와주에서는 시날로아 카르텔과 후아레스 카르텔 간 영역다툼이 벌어지고 있다. 최근 마약조직의 소굴로 전락한 타마울리파스주는 걸프 카르텔이 장악했던 지역이지만, 1990년대 후반 군탈영자로 꾸려진 로스 세타스 카르텔이 도전하며 유혈충돌이 벌어지고 있다. 이 지역은 2009년 90명이 마약범죄로 희생됐지만, 2010년에는 1200명으로 희생자가 급증했다.
멕시코 마약조직 간 영역다툼 격화는 중남미 마약 유통 흐름의 변화와 연결돼 있다. 한때 콜롬비아가 중남미 마약시장을 쥐고 흔들었지만, 1990년 중반 이후 꾸준히 줄고 있다. 1980년대 중반 이전 콜롬비아는 작은 프로펠러기를 이용해 플로리다 등에 도착했다. 하지만 미국 정부가 카리브해와 플로리다를 통한 마약 유입을 강력하게 단속하자, 콜롬비아 마약조직이 멀리 떨어진 미국에 직접 마약을 공급하기 어렵게 됐다. 이에 따라 콜롬비아 마약조직은 멕시코 마약 카르텔과 손을 잡았다. 콜롬비아가 공급자가 되고 멕시코가 보급자 및 운반자 역할을 맡게 된 것이다. 1990년대 들어 멕시코 마약조직의 역할이 크게 확대되고, 조직의 힘과 수입이 크게 늘어난 배경이다. 이런 가운데 9·11 테러 이후 국경 통제가 강화되고 공급망이 한정된 반면에 수익이 줄어들자 미국행 통로 장악을 위한 말 그대로 피 튀기는 경쟁을 벌이고 있다. 멕시코가 20년 전 콜롬비아를 점점 닮아가고 있는 것이다. 마약조직들 간 영역다툼이 격화되자 카르텔이 1990년대 4개에서 현재 8개로 갈라섰다. 멕시코 정부는 마약조직 간 대결 격화는 마약과의 전쟁이 성공을 거둬 이들이 궁지에 몰린 결과라고 설명한다. 반면에 야당 등은 정부가 오히려 마약조직을 자극해 사태를 악화했다고 비판한다.
날로 활개치는 마약조직도 문제지만, 정부의 무능과 부패도 사태를 악화시키고 있다. 지난해 10월 ‘멕시코에서 가장 용감한 여성’이라 불리며 경찰서장이 된 마리솔 바예스 가르시아가 주목받은 바 있다. 그는 시우다드후아레스 인근 인구 8500명의 소도시 프라세디스시의 서장으로 부임했다가 4개월 만에 마약갱단의 위협을 피해 지난 3월 미국으로 망명했다. 가르시아는 5월10일 미국 <abc> 인터뷰에서 “마을과 공동체를 위해 싸웠지만 마약갱단들이 나와 가족, 아이를 죽이겠다고 협박했다”며 “무서워 한숨도 못 잤고, 언제 나를 잡으러 올지 몰라 불안했다”고 털어놨다. 그의 전임자는 2009년 8월 납치돼 목이 잘렸고, 소속 경찰 17명 가운데 15명이 살해됐다. 이후 1년 넘게 경찰서장 자리가 공석이었다. 가르시아는 경찰차는 1대, 총은 2정에 불과했다고 전했다. 가르시아는 대학에서 범죄학을 전공하던 20살 여성이다. 그가 자원했다고 마약조직이 들끓는 곳에 경찰서장으로 임명한 것 자체가 난센스다.
마약이 국내 총생산의 3~4% 추산
연방정부는 경찰의 뿌리 깊은 부패를 뽑지 못하고 있다. 실제 지난해 4~9월 멕시코에서 납치된 미국행 중남미 이민자 1만1333명 가운데, 8.9%는 연방·주·시 단위 경찰이 관여된 것으로 멕시코 이민 당국은 파악하고 있다. 2009년 실종된 한 아이는 5명의 시 경찰들이 아이를 서로 빼앗아가며 갱단에 넘긴 것으로 자백했다고 미국 일간지 가 최근 전했다. 저임금의 경찰은 마약 단속과 뇌물 사이에서 쉽게 뇌물에 빠져든다. 시·주 단위는 물론 연방 경찰의 고위 간부에게서 마약 관련 부패가 발각되는 것은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만연한 정치적 부패 때문에 경찰조직의 부패에 손을 대지 못하고 있다. 미국외교협회(CFR)는 지난 3월 특별보고서에서 멕시코인 약 45만 명이 수입의 상당 부분을 마약거래 관련 활동에 의존하고, 마약거래 관련 활동이 멕시코 국내총생산(GDP)의 3~4%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부패한 경찰을 대신해 칼데론 대통령이 선택한 게 군인이다. 군인은 멕시코에서 경찰보다 더 신뢰받는다. 문제는 파병된 군인들이 성폭력, 고문, 실종, 자의적 사격 등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는 것이다. 멕시코 국립인권위원회는 군인에 의한 인권침해 신고 건수가 2006년 200건 미만이었지만 지난해는 1500건으로 급증했다고 밝혔다. 이 때문에 유엔은 군인들을 철수시킬 것을 권고했다. 멕시코 조직범죄대처단을 이끌던 사무엘 곤살레스 루이스는 “국가비상사태의 심각한 상황”이라며 “취약한 지방정부 때문에 통제를 벗어난 마약거래상들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주정부 등에서는 주·시 단위 경찰조직은 중무장한 마약 카르텔을 감당하기 어렵다며, 연방정부가 사태를 해결해야 한다고 책임을 돌리고 있다. 마리화나 등 중독성이 약한 마약에 대한 합법화 주장이 나오지만 찬반이 엇갈리고 근본 처방은 아니라는 지적이 많다.
미국의 모욕적인 지원 규모
근본 문제는 마약 소비와 공급의 악순환이다. 마약은 생산은 저개발국, 소비는 선진국에서 이뤄지는 ‘남북’ 이슈다. 미국은 세계 최대의 마약 소비국이다. 멕시코는 미국과 3169km의 국경을 맞댄 최대 마약 공급처다. 2009년 미국 정부의 조사 결과, 12살 이상 국민의 8.7%가 ‘최근 한 달 사이에 마약을 복용한 적이 있다’고 대답했다. 미국 국무부는 미국에서 소비되는 마약의 90%가 멕시코를 통해 유입되는 것으로 파악한다. 남미에서 멕시코를 통해 미국으로 가는 마약은 한 해 약 130억달러어치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국경을 넘나드는 땅굴은 물론 소형 잠수함까지 동원돼, 마약 유입을 막지 못하고 있다. 이렇다 보니 마약 문제는 미국과 멕시코 간 갈등의 주요 원인이 되고 있다. 멕시코는 미국이 마약 수요 감축 노력과 불법 총기 유출 단속을 제대로 하지 않고 있다며 비난한다. 실제 압수된 무기의 90%가 미국에서 흘러든 것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미국 정부는 멕시코 정부가 마약 소탕과 부패 근절을 제대로 해야 한다고 비판한다.
지난해만 멕시코에서 마약범죄로 1만5273명이 희생됐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보고된 민간인 희생자의 두 배가 넘는다. 이 때문에 텍사스 출신의 테드 포 의원은 “멕시코가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다음인 ‘미국의 제3의 전장’”이라고 표현했다. 이를 두고 은 최근 “미국은 저 멀리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 민주주의를 발전시킨다며 지난 10년간 1조2천억달러를 썼지만, 이웃 멕시코에는 기껏 13억달러를 ‘메리다 이니셔티브’(멕시코 마약퇴치 지원 프로그램)에 지원했다”고 비판했다. 멕시코 역사학자 엔리케 크라우세는 “메리다 이니셔티브는 거의 모독이다. 버락 오바마 미국 행정부는 우리를 대단히 실망시켰다”고 비판했다. 오바마 대통령 취임 이후 미국이 멕시코 마약범죄가 자신들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인정했지만, 실제 크게 달라진 것은 없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마약 통제와 관련한 연방정부 지출이 150억달러로, 지난해 오히려 약간 줄어들었다. 미국외교협회는 지난 3월 특별보고서에서 “멕시코의 치안 불안은 국경 통제 악화, 미국 경제회복 타격, 중남미 지역 불안 야기, 이민 및 망명 신청 증가 등의 문제를 미국에 야기한다. 따라서 미국 정부가 공통의 문제로 인식하고 국내적으로는 마약 수요 및 불법 무기 유출 통제, 돈세탁 차단 등에 나서고 멕시코의 마약과의 전쟁도 직접 지원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마약이 정권도 바꿀 분위기
마약과의 전쟁은 멕시코 정권도 바꿀 분위기다. 지난해 10월 조사에서, 멕시코 국민의 33%만 ‘마약과의 전쟁에서 이기고 있다’고 답했다. 7개월 전보다 14%포인트 떨어졌다. 2012년 대선에서 칼데론의 국민행동당(PAN) 대신 칼데론 이전까지 72년간 집권했던 제도혁명당(PRI)이 재집권할 것으로 전망된다. 정권이 바뀌면 마약조직과의 대결을 누그러뜨릴 것으로 예상된다. 칼데론의 마약과의 전쟁은 부패와 무능, 미국의 비협조 속에 항복을 예약한 셈이다.
김순배 기자 marcos@hani.co.kr</a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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