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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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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트는 터키의 ‘6월항쟁’

군부의 억압 여전하나 개혁적 ‘정의개발당’ 집권 등 변화하는 터키… 자유롭고 발랄하게 저항하는 민주화의 현장을 가다
등록 2011-05-19 14:28 수정 2020-05-03 04:26

고등어 케밥 맛은 나쁘지 않았다. 5월8일 오후 3시(현지시각) 이스탄불의 바닷바람은 아직 찼다. 보스포루스해협의 이날 낮 최고기온은 13℃. 반팔 티셔츠만 입기엔 쌀쌀한 날씨다. 케밥은 터키의 전통적인 고기요리다. 원래 꼬챙이에 끼워 구운 고기를 뜻하지만 여러 고기요리를 두루 지칭한다. 폐선을 개조해 만든 선상 레스토랑의 메뉴는 고등어 케밥 하나뿐이었지만, 쉴 새 없이 손님이 들이닥쳤다. 고등어 케밥을 한입 베어무는 순간 시끄러운 소리가 해안도로에서 들려왔다. 지붕에 확성기를 단 승합차가 항구에 정박한 레스토랑 옆으로 잇달아 지나갔다. 고등어 케밥을 먹던 터키인 가족들이 그때마다 해안도로를 쳐다봤다. 확성기 소리만 없었다면, 한국 기자가 5월8일의 이스탄불이 다른 봄날과 왜 다른지 구별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세 차례 군사 쿠데타가 남긴 그림자

고등어 케밥 레스토랑을 처음 지나친 확성기 차량은 ‘국가주의운동당’(MHP) 것이었다. 터키 민족주의와 이슬람주의를 강화하자는 주장을 내건다. 위키피디아에는 ‘매우 우파적인’(far right wing) 정당으로 소개된다. 2007년 총선에서 전체 550석 가운데 71석(14.2%)을 차지했다. 1970년대 좌파 운동가 암살에 관여됐다는 의혹도 받는다. 집권당인 ‘정의개발당’(AKP) 차량과 야당인 ‘공화주의인민당’(CHP) 차량이 뒤를 이었다. 정의개발당은 노동운동과 인권운동 허용, 군부 견제 등을 중요한 가치로 내세운다. 대학에서의 히잡 허용 등 이슬람주의에 좀더 관용적이다. 공화주의인민당은 터키의 국부인 케말 아타튀르크의 사상을 충실히 따르자는 태도를 표명한다. 지금 터키 국회에서 정의개발당은 341석(46.6%), 공화주의인민당은 112석(20.8%)을 차지한다. 그리고 오는 6월12일 다시 정당 구성이 변할 것이다.
한국의 정당처럼, 말과 구호만으로는 좀체 터키 정당의 진면모를 판단하기 어렵다. 터키 ‘군부’와 ‘군사독재’의 역사를 이해할 때 비로소 정책과 강령에 숨은 차이가 드러난다. 이스탄불문화원과 터키기자작가재단 등 터키의 문화학술단체 5곳이 5월6~9일 개최한 한국-터키 공동 워크숍에서 이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최재천 전 민주당 의원, 김태일 영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오동석 아주대 로스쿨 교수, 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김당 부사장이 ‘터키의 민주화와 언론’ ‘터키의 민주화와 헌법’이라는 주제로 두 차례 열린 워크숍에 참석해 한국의 경험을 전했다.
세 차례의 군사 쿠데타가 정치와 문화에 남긴 그림자는 짙었다. 한국 쪽 참석자는 터키의 정치사에 대해 한마디로 “복잡하다”고 표현했다. 터키는 수백 년간 대제국이었다. 19세기 말 오스만제국은 병약했다. 제1차 세계대전 때 독일 편에 섰다 패했다. 국부로 추앙받는 케말 아타튀르크는 20세기 초 영국과 프랑스의 점령에 저항해 독립전쟁을 이끌었다. 1923년 이슬람 종교와 정치를 분리하는 세속주의, 남녀평등, 터키 민족주의, 교육 현대화 등을 기치로 현재의 터키를 만들었다. 문자도 아랍어에서 현재의 알파벳 표기로 바꾸었다. 터키 군부는 독립과 산업화를 이끌었다는 자부심이 있었지만, 무슬림이 다수인 국민을 믿지 못했다. 파시즘은 물론 사회주의, 노동운동, 이슬람주의운동이 모두 금지됐다. 근대화의 이름으로 독재를 저지른 ‘계몽 군주’였던 셈이다. 군부는 소수민족 시위 등 사회 혼란을 명분으로 쿠데타를 일으켰다. 군부는 현재의 집권당도 이슬람주의 정당으로 비판한다. 공화주의인민당은 군부와 아타튀르크의 유산에 더 우호적이다.
민주주의를 회복하려는 투쟁의 역사는 ‘형제의 나라’ 한국과 매우 비슷했다. 터키의 시민단체 ‘젊은 시민들’(Young Civilians) 사무실은 터키의 ‘명동성당’에 해당하는 탁심광장 근처에 있었다. 탁심광장은 이스탄불의 중심가에 있다. 탁 트인 광장 주변에 기업체 건물, 레스토랑, 상가가 형성돼 있다. 무슬림이 대다수인 터키에서 드물게 술집이 모여 있어 터키 젊은이들과 관광객이 매일 밤 모여든다. 이곳은 대표적인 시위 장소이기도 하다. 1960년, 1971년, 1980년 군사 쿠데타 때마다 저항하는 시민들이 이곳에 모였다. 1987년 6월항쟁 당시의 명동과 비슷한 민주주의의 성지에 해당한다.

김태일 영남대 교수(왼쪽), 최재천 전 민주당 의원(왼쪽에서 두 번째), 오동석 아주대 교수(오른쪽)가 앙카라에서 열린 ‘터키 민주화와 헌법’ 워크숍에서 한국의 민주화운동 경험을 전했다.

김태일 영남대 교수(왼쪽), 최재천 전 민주당 의원(왼쪽에서 두 번째), 오동석 아주대 교수(오른쪽)가 앙카라에서 열린 ‘터키 민주화와 헌법’ 워크숍에서 한국의 민주화운동 경험을 전했다.

위트로 무장한 ‘젊은 시민들’

땅거미가 깔린 탁심광장을 가로질러 골목으로 들어섰다. ‘젊은 시민들’ 사무실은 번화가에서 조금 벗어난 건물 6층에 있었다. 이 단체 회원 파티 데미르지는 5월7일 기자 등 한국의 방문객들에게 “우리의 로고는 빨간색 스니커즈”라고 설명했다. ‘젊은 시민들’은 2000년 정부에 비판적인 대학생들이 모인 데서 출발했다. 1999년 벌어진 터키 대지진과 잇따른 참사가 계기였다. 매해 5월19일은 터키 ‘청년의 날’이다. 군사독재 시절 한국처럼, 터키 학생들은 플래카드를 손에 쥐고 대형 경기장에서 카드섹션을 벌였다. 대학생들은 2003년 5월19일 이를 두고 “전체주의 국가에나 남아 있는 행사”라고 비판하며 반대 운동을 벌였다. 대학생들에 대한 비난이 터져나왔다. 극우신문은 당시 ‘젊은 장교들은 불편하다’(Young army officers are uncomfortable)라는 제목으로 비판 기사를 실었다. 대학생들은 이 제목을 비틀어 자신들의 구호로 삼았다. ‘젊은 시민들은 불편하다’(Young civilians are uncomfortable) 단체의 이름도 이 구호에서 나왔다.

파티 데미르지는 최근 가장 주목받은 사례로 2009년 노동절 시위를 꼽았다. 폭넓은 민주주의 도입을 주장하는 정의개발당이 2002년 363석을 차지해 다수당이 되었지만, 집회와 시위의 자유 등 시민권을 억압하는 헌법과 법률이 여전히 살아 있었다. 노동절 집회는 경찰과 군부가 금기시하는 행사였다. ‘젊은 시민들’은 2009년 4월30일 노동절 전날 광장 근처 특급호텔에 들어갔다. 다음날 그들은 창문에 대형 플래카드를 내걸었다. ‘1977년 노동절에 사살된 그들을 기억하라’는 플래카드 문구는 그날 저녁과 이튿날 터키 방송과 신문에 대대적으로 보도됐다.

는 이 단체를 소개하는 기사에서 “위트가 그들의 무기”라고 썼다. 1968년 돼지를 대선 후보로 내세웠던 미국의 신좌파 학생들처럼, 2007년 대통령 선거에서 그들은 자신만의 가상 후보를 내세웠다. ‘서구화된 남성 터키인’이 전형으로 대접받는 사회 문화에 항의한다며 그들은 ‘히잡을 쓴 쿠르드·아르메니아 혼혈 여성’을 대선 후보로 선전했다. 이 가상의 후보에 ‘알리에 오즈투르크’라는 이름도 붙였다. 이들의 로고인 빨간 스니커즈도 터키 사회 곳곳에서 사용되는 군화 이미지에 대한 비틀기에서 나왔다. 소수민족인 쿠르드인과 기독교인인 아르메니아인에 대한 차별 논란도 단골 시위 주제다. 주요한 행동 방식은 깜짝 시위, 트위터와 인터넷 홍보, 학술 대회다. 파티 데미르지는 자신들의 이념에 대한 질문에 “한나 아렌트와 미셸 푸코”를 언급했다. 2008년 한국의 ‘촛불시민’들과 같은 이들이 터키에도 있었다. 저항의 형식은 자유롭고 발랄했다. 제도 정치권과 거리도 뒀다. 그러나 촛불시위 뒤 한국에서도 한계가 지적됐다. 기존 정당과 제도권 정치로 촛불시위의 정신이 반영되지 않는 한 시위는 한계가 뚜렷하다는 비판이 여러 정치학자들에게서 제기됐다. 파티 데미르지는 ‘운동이 제도적 결과를 내야 한다는 고민은 없느냐’는 방문단의 질문에 “우리도 토론 중”이라고 답했다.

쿠데타 예비 문서 폭로한

밤 9시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며 뒤돌아본 ‘젊은 시민들’ 사무실 탁자 위에 (Taraf)가 놓여 있었다. 는 2007년 11월 태어난 일간지다. 진보적 사상을 가진 서점경영자·인쇄업자인 40대의 바사르 아르슬란이 재산을 털어 만들었다. 해고된 언론인, 진보운동가 등이 에 합류했다. 지금 터키에서 가장 높은 목소리로 군부를 비판한다. 쿠르드인, 아르메니아인 등 소수자 차별 철폐도 단골 주제다. 지난해 2월 대특종을 했다. 군부가 작성한 쿠데타 예비 문서를 단독 입수해 보도했다. ‘딥 스테이트’(Deep state), 곧 ‘국가 속의 국가’라고 불리는 군인, 정치인, 언론인, 학자 등 196명이 보도 뒤 쿠데타에 연루됐다는 혐의로 그해 7월 기소됐다.

언론인 케림 발지는 5월7일 워크숍에서 를 높이 샀다. “는 언어를 만들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터키 언론은 고위 장성들을 ‘파샤’라고 불러왔다. 파샤는 ‘장군’이라는 뜻을 가진 긍정적 단어다. 파샤라는 단어를 쓰는 순간 긍정적 의미를 함축하는 것이다. 그러나 는 장성들을 그저 ‘군인’이라고 부른다.” 의 발행부수는 약 5만 부로 1등 신문인 의 20만 부에 비해 크게 적지만, 가장 영향력 있는 신문으로 꼽힌다. 케림 발지는 “ 기자들은 봉급이 적지만 능력 있고 자부심이 크다”고 말했다.

‘젊은 시민들’과 의 노력은 민주주의를 향한 터키의 전진을 상징한다. 한국처럼 터키에서도 개헌이 뜨거운 이슈다. 5월9일 앙카라 경제기술대학에서 열린 ‘터키 민주화와 헌법’ 워크숍에서 학자, 교수, 대학생 등 200여 명의 참석자들로부터 질문이 계속 나왔다. “터키 헌법에는 바꿀 수 없고 바꾸는 것을 제안할 수조차 없는 조항이 있다. 국어를 터키어로 규정하고 국민을 터키민족으로 규정한 조항 등이다. 한국 헌법에도 바꿀 수 없고 바꾸는 것을 제한하는 조항이 있는가.” “터키 군대에는 쿠데타를 조직화하려는 젊은 장교들이 있다. 한국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는가.”

터키는 정의개발당 집권 뒤 2010년 개헌했다. 1980년 쿠데타로 집권한 군부가 만든 ‘82년 헌법’을 일부 고쳤다. 군부는 1980년 쿠데타 가담자에 대한 기소 금지 조항을 헌법에 넣었다. 개정 헌법은 이 조항을 삭제했다. 노동운동과 공무원의 단체교섭권도 허용됐고, 인권 보호가 강화됐다. 그러나 터키 참석자들은 군사법원의 과도한 권한 허용 등 넘어야 할 과제가 많다고 전했다.

최재천 전 민주당 의원은 “(한국에서는) 1987년 헌법을 개정하고도 9년 뒤인 1995년에야 광주 민주화운동을 탄압한 군부에 대한 과거 청산을 시작할 수 있었다”며 “헌법을 잘 만드는 것도 중요했지만, 시민의 일상에서 헌법 정신이 이뤄지는 데 10여 년이 걸렸다”고 말했다. 장덕진 교수는 두 차례의 워크숍에서 소셜네트워크가 최근 선거에서 끼친 영향을 분석해 주목받았다. 김태일 교수, 오동석 교수, 김당 부사장은 각각 △한국 민주화 과정 △한국의 민주주의와 헌법 △한국의 민주화와 진보 언론을 주제로 강연했다.

터키 민주화는 현재진행형

워크숍 기간 내내 터키 거리에 각 정당의 선거 현수막이 나부꼈다. 소수민족 언어인 쿠르드어로 선거운동을 할 수 없도록 규정한 현행 선거법도 6월12일 뒤 논쟁의 대상이 될 것이다. 터키의 6월항쟁은 현재진행형이다.

이스탄불·앙카라(터키)=글·사진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

<table border="0px" cellpadding="0px" cellspacing="0px" width="100%"><tr><td height="22px"></td></tr><tr><td bgcolor="#E7E7E2" style="padding: 4px;"><table border="0px" cellpadding="0px" cellspacing="0px" width="100%" bgcolor="#F7F6F4"><tr><td class="news_text02" style="padding:10px">


<font color="#1153A4">는 터키의 </font>
<font size="4"><font color="#008ABD">비슷한 현실, 유사한 고민</font></font>


는 터키의 이다. 영향력이 발행부수보다 크다. 다른 매체가 외면하거나 감히 쓰지 못하는 영역에 대해 보도한다. 칼럼에서는 진보적인 목소리를 낸다. 자본과 인력이 보수 언론에 비해 턱없이 뒤진다는 현실도 같았다. 지구 반대편이지만 와 의 고민은 통했다. 의 칼럼니스트 투르가이 오구르와 전자우편으로 질의응답했다. 그는 2007년 창간 때부터 칼럼니스트로 글을 써오고 있다.

<font color="#006699">한국 독자에게 를 소개해달라.</font>
창간 당시 에는 기자 등을 모두 합쳐 100여 명의 스태프가 있었다. 그러나 자본 부족으로 5년이 지난 지금 50여 명으로 줄었다. 발행부수는 약 5만 부다.

<font color="#006699">서점 소유주이자 인쇄업자인 바샤르 아르슬란이 이 신문을 만들었다. 기자와 편집자들이 소유주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한국의 일부 언론에서는 사주가 종종 기사의 방향을 바꾸는 일이 벌어진다. </font>
창업자인 아르슬란은 에 어떤 경영적 관여도 하지 않는다. 그는 그저 발행인이다. 그는 의 운영에 결코 개입하지 않는다. 기자와 편집진의 활동에도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는 보스에게서 자유롭다.

<font color="#006699">는 진보·자유주의적 입장과 창간 역사로 유명하다. 군사독재 시절 정부의 감시견이 되기를 포기하지 않은 일군의 기자들이 만든 신문이다. 그러나 는 최근 여러 도전에 직면해 있다. 보수 언론은 점점 덩치를 키우는데 진보 언론은 경영 답보 상태다. 는 매년 수익을 내는가.</font>
우리도 비슷하다.

<font color="#006699">의 전체 매출에서 광고가 차지하는 비율은 얼마나 되는가.</font>
창간 뒤 2년 동안 는 전혀 상업광고를 받지 않았다. 정부와 기업으로부터 암묵적인 광고 수주 외면이 있었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 광고 수익이 30%를 차지한다.

<font color="#006699">신문시장의 위축은 전세계적이다. 당신은 의 미래를 낙관하는가.</font>
터키에서는 신문을 생동하게 만드는 민주주의에 대한 뜨겁고 격렬한 논쟁이 존재한다. 는 이런 사회적 토론의 중요한 행위자다. 는 터키에서 가장 많이 팔리지는 않지만 가장 많이 회자되는 신문이다.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 트위터, 인터넷 홈페이지 등 신기술을 도입한다. 그럼에도 의 미래에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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