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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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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나먼 중동 공화국?

사우디·바레인 등 왕정국가, 오일머니로 철옹성 쌓아…

민주화 바람 속 입헌군주·공화제 요구 터지지만 변화 전망은 적어
등록 2011-03-16 16:15 수정 2020-05-03 04:26

장기 내전으로 빠져든 리비아 사태는 끝이 보이지 않는다. 무아마르 카다피 리비아 최고지도자의 반격이 놀랍다. 그 못잖게, 중동의 왕정국가들이 버티는 ‘저력’도 대단해 보인다. 아랍권 전체를 집어삼킬 듯한 거센 민주화의 물결 속에서도 정권 붕괴의 위기까지 내몰리지 않고 버티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시아파 시위대가 3월9일 동부 유전지대의 도시 카티프에서 시아파 정치범의 얼굴 사진을 들고 정치범 석방 등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REUTERS

사우디아라비아의 시아파 시위대가 3월9일 동부 유전지대의 도시 카티프에서 시아파 정치범의 얼굴 사진을 들고 정치범 석방 등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REUTERS

헌법·정당·의회가 없는 사우디

현재 중동의 왕정국가에서도 민주화 시위가 벌어지고는 있다. 쿠웨이트에서는 3월8일 집회 결사 및 언론 자유의 억압을 비난하는 시위가 쿠웨이트시티 정부청사 앞에서 열렸지만, 청년단체 회원 수백 명만 참여한 채 평화롭게 끝났다. 아랍권 민주화 시위 사태 이후 쿠웨이트에서 정치개혁을 촉구하는 첫 시위였다. 요르단에서도 정치개혁을 요구하는 시위가 1월14일 이후 주말마다 이어졌지만, 유혈사태 없이 평화로이 진행되고 있다. 국제유가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세계 최대 산유국인 사우디아라비아에서도 3월11일 ‘분노의 날’ 행사가 열렸지만 튀니지나 이집트 같은 체제 위협에는 전혀 미치지 못했다. 바레인의 시아파 세력은 군주제 폐기와 공화제 수립 및 내각의 선출직 전환 등을 요구하며 ‘공화국을 위한 연대’라는 조직을 3월8일 구성했다. 인구의 70%가 시아파지만 소수인 수니파의 아칼리파 가문이 200년 가까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차별받아온 데 대한 불만의 표출 성격이 짙다.

그동안 중동에서 왕정국가들은 서구식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오만은 왕이 직접 통치하는 절대군주제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국왕은 왕이자 종교 수장으로 절대 권력을 행사한다. 헌법도 정당과 의회도 없다. 6개 군주국 가운데 쿠웨이트만 의회가 선출되고 입법권한을 갖는다. 사우디아라비아, 오만은 의회 선거 자체를 실시하지 않는다. 바레인 의회는 국왕이 제안한 법안을 심사하고 통과시키지만 국왕이 임명한 상원이 결정을 뒤집을 수 있다. 요르단은 국회가 있지만 국왕이 총리와 내각을 임명한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이슬람 정교일치의 절대군주제 국가지만 그나마 국왕자문위원회에서 국민의 의견이 잘 수렴되는 나라로 꼽힌다. 하지만 자문위원회 의장은 국왕이 임명하는 등 한계가 분명하다. 사우디아라비아 정부는 3월5일에도 “현행법상 어떤 형태의 시위도 불법에 해당한다”며 집회와 시위를 막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중동 6개 왕정국의 정치체제

중동 6개 왕정국의 정치체제

중동의 4개 입헌군주제 국가들도 영국처럼 국왕이 상징적 존재일 뿐인 나라와는 비교가 안 되는 막강한 권한을 국왕이 행사한다.

사실 왕정은 우리에게 딴 나라 이야기다. 지난 2월 끝난 TV 드라마 에서, 짠순이 여대생에서 하루아침에 공주가 된 이설(김태희)과 재벌 기업의 후계자 박해영(송승헌)의 사랑 이야기나 드라마 속 웅장한 궁궐 모습 등은 너무도 멀고 낯설었다. 또 영국이나 스웨덴의 왕실 결혼 등을 둘러싼 소동을 외신으로 접할 때마다 선뜻 이해하기 어려웠다. 영국에서는 ‘왕실의 광대극을 끝내야 한다’며 공화제 주장 단체인 ‘리퍼블릭’ 등이 아예 입헌군주제 폐지를 요구하고 있다. 영국 여왕이 명목상 국왕인 오스트레일리아와 캐나다, 뉴질랜드 등 영연방 나라에서도 군주제 폐지 연대운동을 펴고 있다. 군주가 이름뿐인 나라들도 이런데, 중동의 실질적 왕정국가들은 어떻게 지금껏 버틸 수 있었을까?

중동 왕정국가들은 막대한 석유자원을 가진 국가가 국부를 나눠주는 이른바 지대추구 국가(Rentier State)로 분류된다. 인남식 외교안보연구원 교수는 이렇게 설명한다. “왕이 국부를 나눠줘 잘 먹고 잘 사는데, 세금도 내지 않으면서 정권에 도전하는 것은 상상 밖이다.” 대표적으로 사우디아라비아는 무상 의료와 무상 교육을 누리는 등 상대적으로 풍요로운 복지 혜택을 받고 있다. 정상률 명지대 중동문제연구소 연구교수는 이렇게 분석한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이집트, 리비아 등은 쿠데타를 겪으면서 왕정이 무너졌다. 반면 걸프국가들은 군부가 강하지 않았고, 석유가 발견된 뒤 석유를 통제하는 왕가가 그 수익을 분배하면서 통제 기제가 작동해왔다.”

위기가 닥치자 던진 현금 ‘떡고물’

아랍권의 민주화 시위가 일어난 뒤 사우디아라비아 등에서는 지대추구 국가의 특성이 잘 드러났다. 사우디아라비아 정부는 2월23일 공무원 임금 15% 인상 및 실업자와 주택 지원 등 360억달러(약 40조4460억원)에 이르는 복지정책을 발표했다. 오만은 41년째 왕위를 유지하고 있는 카보스 국왕이 일자리 5만 개 창출과 구직자에게 매월 390달러 지원금 지급 등을 약속했다. 바레인은 일자리 2만 개 창출 및 주택 5만 개 건설 계획을 발표했다. 요르단 압둘라 2세 국왕도 생필품을 나눠주는 등 체제 불만 달래기에 나섰다. 이런 잇따른 왕정의 민심 달래기는 어느 정도 효과를 발휘하는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그동안 중동의 왕정국가들은 역설적으로 국가권력을 결정하는 선거를 실시하지 않은 게 체제 유지에 도움이 된 측면도 있다. 다른 많은 공화제 국가에서 대선 및 총선 부정선거 논란 등이 정권 퇴진의 계기가 됐지만, 세습 왕정은 왕 자체가 정통성과 권위를 인정받는데다 공화정과 달리 ‘물러나라’고 요구하기 힘든 심리적 중압감이 작동한다.

요르단과 모로코, 바레인, 쿠웨이트는 일부 자유선거를 실시하고 야당도 인정한다. 하지만 이런 선거는 국가권력 결정과는 거리가 멀고 주요 정책은 국왕이 임명하는 내각에서 결정된다. 또 행정부는 왕정체제를 유지하는 희생양이 되기도 했다. 지난 1월 요르단 국민이 사미르 알리파이 총리의 퇴진을 요구하자 총리를 퇴진시킨 뒤 국왕은 건재한 게 좋은 예다. 오만에서는 카보스 빈 사이드 국왕이 3월7일 경제부처 장관을 경질하는 등 중동 민주화 시위 사태 이후 12번째로 장관을 경질했지만, 절대군주제를 폐지할 기미는 없다.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등 대표적 친미 정권들이 미국의 지원을 받고 있는 것도 왕정체제가 버티는 힘이 돼왔다.

현실적 요구, 실질적 입헌군주제

왕정체제의 변화를 주도할 정치적 대안세력이 없다는 사실은 왕정국가에서 체제 변화의 가능성이 낮은 이유다. 부족중심주의(아사비야)와 족장국가 전통(셰이크돔)이 강하게 남아 가부장적 권위가 유지되다 보니 왕권에 대한 도전은 여전히 절대다수에게 금기시된다. 사우디아라비아의 경우 ‘무타와’라고 불리는 종교경찰이 엄격하게 사회를 단속하는 등 사회통제 시스템이 작동한다. 반이슬람 인터넷 사이트를 차단하는 등 정보 공유도 자유롭지 않다. 특히 사우디아라비아 정부는 지난 10년간 반정부 세력을 군부 등에서 솎아냈다. 가 발표한 ‘2010 민주주의 지수’에서 사우디아라비아(160위), 오만(143위), 카타르(137위), 바레인(122위), 쿠웨이트(114위), 요르단(117위) 등은 조사대상 167개국 가운데 세계 최하위 수준을 기록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수도 리야드에서 2월23일 사우디 술탄 왕세자(앞줄 오른쪽)가 바레인 국왕 하마드 빈 이사(앞줄 왼쪽)와 함께 웃으며 걷고 있다.REUTERS

사우디아라비아의 수도 리야드에서 2월23일 사우디 술탄 왕세자(앞줄 오른쪽)가 바레인 국왕 하마드 빈 이사(앞줄 왼쪽)와 함께 웃으며 걷고 있다.REUTERS

민주화 물결 속에서도 단기적으로는 중동의 왕정국가들이 고비를 넘길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일부에서는 체제가 흔들릴 것이라는 예상도 있지만, 현 상황이 정권 안보를 위협할 수준은 아니라는 전망이 많다. 공화제 등으로의 급격한 체제 변화보다는 정치 참여 확대 등 일정한 요구를 반영하는 데 그칠 것이라는 예상이다. 실제로 사우디아라비아의 시위를 보면 2월27일 학자와 시민단체 활동가 100여 명 등이 입헌군주제 전환 및 선거를 통한 자문위원회 구성 등을 요구했지만, 이는 현재의 절대군주제를 입헌군주제로 바꾸자는 것이지, 공화제로 급격히 전환하자는 요구가 아니었다. 미국 싱크탱크인 시카고국제문제위원회의 레이철 브론슨 분석가는 “사우디 왕가가 엘리트 계층에게 현 체제가 미래를 위해 가장 성공적인 체제라는 인식을 심는 데 성공했다”고 평가했다. 요르단은 민주화 시위 촉발 뒤 총리를 교체했지만, 마아루프 바키트 요르단 총리는 3월4일 하원에서 “시위대가 요구하는 입헌군주제는 헌법에 위배되며 정치 시스템에 불균형을 초래할 수 있다”며 선을 그었다.

문제는 지금의 고비 이후다. 사우디아라비아의 경우 압둘라 빈 압둘아지즈 국왕은 87살이다. 장자 계승도 아니고 형제 계승이 이뤄지다 보니 왕자만 7천 명에 이르러, 이들 사이에 권력 암투가 벌어진다면 체제 불안으로 이어질 수 있다. 왕정 쿠데타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전망도 나온다. 왕족 일가가 국가 요직을 독점하는 데 대한 상대적 박탈감과 불만도 커지고 있다. 서구화와 맞물려 젊은 층의 변화 욕구는 갈수록 커지고 있다. 인남식 교수는 “카타르와 아랍에미리트연합이 민주화 물결 속에서도 정권이 안전하다고 여겨지는 것은 세계화에 발 빠르게 대응하고 있기 때문”이라며 “사우디아라비아도 왕실 자체에 대한 불만보다는 사우디가 역동적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젊은 층의 불만이 큰 상태”라고 분석했다. 사우디아라비아 왕족인 압둘라지즈 알사우드는 최근 언론 기고에서 “국민을 만족시키던 과거의 수단들이 더 이상 의미 있는 개혁을 대체할 수 없다”며 “조만간 이런 요구가 사라질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다”고 지적했다.

정체된 국가에 대한 젊은 층 불만 커져

아랍권 시위에서 드러난 것은 배고픔뿐 아니라 자유와 민주주의의 결핍과 오랜 억압이 저항을 불렀다는 사실이다. 석유 판매대금으로 국민을 달래는 정책이 결코 지속될 수 없다는 얘기다. 장기적으로 변화는 불가피하다. 정상률 교수는 “왕정국가들의 체제는 당분간 유지되면서 제도 개혁에 나서겠지만 그동안 시혜적 조처가 먹혀들었다고 하더라도 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며 “역사는 자유와 평등, 참여가 확대되는 길을 걸어왔고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그 변화의 시기가 다가올 것”이라고 말했다.

과거 정치체제 변화 사례를 보면 스스로 바뀐 경우는 많지 않다. 대부분 전복됐다. 절대군주제에서 공화제로의 변화는 수십 년 또는 수세기가 걸렸다. 프랑스혁명 뒤 루이 16세는 단두대에서 처형됐다. 2008년 네팔도 국왕이 피플파워에 의해 쫓겨난 뒤 역사적 총선을 실시하고 제헌의회를 구성해 239년간에 걸친 절대왕정은 종식되고 공화제로 바뀌었다. 히말라야의 작은 나라 부탄은 지그메 케사르 남기엘 왕추크 전 국왕이 2006년 왕위를 계승하면서 선왕의 뜻에 따라 “입헌군주제로 바꾸겠다”고 약속한 뒤, 2008년 총선을 통해 100년간의 왕정을 끝내고 입헌군주제로 전환하는 ‘위로부터의 정치 혁명’을 이뤘다. 중동의 왕정국가들은 어떤 정치 발전의 길을 가게 될까?

김순배 기자 marco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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