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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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먀오족의 수천년, 상품으로 박제

중국 소수민족 먀오의 새해 축제 현장…

오지로 밀려나서도 전통문화 꽃피웠으나 물질문명 앞세운 한족화 물결에 정체성 위협받아
등록 2010-12-08 17:03 수정 2020-05-03 04:26

‘하늘은 3일 이상 맑은 날이 없고, 땅은 10리 이상 평탄하지 않으며, 사람은 돈 세 푼조차 없다.’(天無三日晴 地無十里平 人無三分錢)
중국 내륙 서남부에 위치한 구이저우성은 햇빛을 보기 힘든 곳이다. 성도 구이양은 한 해 평균 흐린 날이 235.1일, 일조시간은 1148.3시간에 불과하다. ‘태양이 귀한 도시’라는 이름이 괜히 붙여진 게 아니다. 구이저우는 중국 34개 성·시 가운데 유일하게 평야가 없다. 면적의 92.5%가 산지고, 평균 해발이 1100m에 달한다. 땅이 평평하다 싶으면 얼마 가지 못해 우뚝 솟은 산이 시야를 가린다.

기원전 3000년 양쯔강 일대에서 ‘엑소더스’

중국 첸둥난자치주 레이산현 랑더마을에서 먀오족 주민 200여 명이 모여 둥그렇게 원을 그리며 대동제 피날레 행사를 하고 있다.

중국 첸둥난자치주 레이산현 랑더마을에서 먀오족 주민 200여 명이 모여 둥그렇게 원을 그리며 대동제 피날레 행사를 하고 있다.

연일 비가 오거나 날씨가 흐리고 땅은 산으로 가로막히다 보니, 사는 사람은 적고 살림살이는 가난하다. 2009년 말 현재 구이저우의 인구는 3975만 명으로, 중국 전체의 2.8%에 불과하다. 2009년 구이저우의 국내총생산(GDP)은 3887억위안(약 66조원)으로 중국 전체의 1.1%를 차지하고, 1인당 GDP는 9187위안(약 156만원)으로 상하이(약 7만6976위안)의 8분의 1에 불과하다.

오가기 힘들고 가난한 땅이지만, 구이저우에는 다양한 문화와 풍습을 지니고 살아가는 소수민족들이 있다. ‘5리마다 습관이 다르고, 10리마다 풍속이 다르다’(五里不同俗 十里不同風)고 할 만큼 다채로운 생활상을 펼쳐 보여준다. 실제 구이저우의 인구 중 37.8%가 소수민족이다. 먀오(苗)족, 둥()족, 부이(布依)족, 수이(水)족 등 열일곱의 소수민족이 독자적인 언어와 풍습을 간직한 채 살고 있다.

구이양에서 자동차로 3시간 떨어진 첸둥난자치주 일대에 거주하는 먀오족은 구이저우를 대표하는 소수민족이다. 먀오족은 중국 55개 소수민족 가운데 좡(壯)족, 만주(滿洲)족, 후이(回)족에 이어 네 번째로 인구가 많다. 중국 서남부 일대에 집거하는데, 전체 894만 명 중 48%가 구이저우성에, 22%가 첸둥난에 산다. 구이저우 내 먀오족 자치주와 자치현 수는 20개가 넘는다.

지난 11월9일부터 22일까지 첸둥난자치주의 먀오족은 한 해에서 가장 중요한 명절을 보냈다. 먀오족어로 ‘니효’라 부르는 새해 명절 ‘먀오녠’(苗年)이 그것이다. 전설에 따르면, 먀오족은 기원전 8000년부터 과학적 역법을 사용했다. 태양력을 위주로 한 먀오족의 음양력은 1년을 365.25일로 나눈다. 같은 태양력인 고대 이집트의 달력보다 3800년이나 앞서고 훨씬 정확하다. 먀오족이 이집트인보다 앞선 역법을 사용한 것은 농경문화와 연관이 깊다. 먀오족은 한(漢)족보다 먼저 벼농사를 시작했다. 기원전 먀오족은 지금의 산둥성, 장쑤성 등 양쯔강 하류 이북 지역에 살았다. 농사짓기에 좋은 넓은 평야와 풍부한 물을 기반으로 먀오족은 고도의 농경문화를 꽃피웠다. 시장(西江) 먀오족박물관의 량톄웨이 관장은 “먀오녠의 기원은 수천 년 전 양쯔강 일대에서 살던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며 “먀오녠은 전년에 이룬 농사의 수확물을 조상에게 바치고 새해의 안녕을 기원하던 종교의식에서 시작됐다”고 말했다.

먀오족의 선조로 불리는 구려(九黎)족이 살기 좋은 양쯔강 일대를 떠나 지금의 중국 서남부로 이주하게 된 것은 한족의 팽창 때문이다. 여기서 탁록대전은 먀오족의 운명을 뒤바꾼 대사건이었다. 탁록대전은 기원전 3000년 허베이성 장자커우시 일대에서 벌어진 것으로 중국 주류학계는 추정한다. 이전 전투에서 줄곧 승리하던 구려족의 영수 치우(蚩尤)는 단 한 차례의 싸움에서 한족의 황제에게 패해 죽임을 당했다. 패배한 구려족의 일부는 한족에 투항했으나, 대다수는 민족 정체성을 보존하기 위해 엑소더스를 감행했다.

음주가무 축제는 민족문화 전승의 장
먀오족은 대동제 때 마을을 찾은 외지인들에게 쉴 새 없이 술 공세를 벌인다.

먀오족은 대동제 때 마을을 찾은 외지인들에게 쉴 새 없이 술 공세를 벌인다.

당시만 해도 먀오족과 한족의 인구 차이는 1 대 2 정도로 크지 않았다. 하지만 파도처럼 밀려드는 한족의 이주 물결과 수난의 민족 대이동은 먀오족의 수와 입지를 급속히 축소시켰다. 먀오족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한족의 압박에 남하할 수밖에 없었고, 산속 깊숙이 숨어 들어갔다. 고단한 엑소더스의 역사는 먀오족 여인네의 화려한 은 투구와 장식에서 잘 드러난다. 먀오족은 거주지를 계속 이동해야 했기에 집에 값비싼 재산을 따로 모아두지 않고 여인의 장신구로 만들어 착용했다. 먀오족이 오랫동안 모계사회를 유지한 것도 한 원인이다.

1천여 년 전에야 구이저우성에 들어온 먀오족은 거친 자연조건을 이겨내고 농경문화를 훌륭히 이식했다. 특히 첸둥난은 산세가 험했지만, 한족을 피해 살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산을 개간해 경이로운 다랑논을 조성했고, 옥수수·감자 등 밭작물도 키웠다. 집도 산을 깎아 계단식으로 지었고, 계곡 물을 막아 식수로 사용했다. 산속에 살다 보니 약초나 해충을 다루는 데도 익숙해, 한족에 버금가는 의약기술을 발달시켰다.

첸둥난자치주 각지에서 벌어지는 먀오녠 행사 중 마을 주민 모두가 참여하는 대동제는 축제의 하이라이트다. 험난한 지세의 영향으로 마을마다 대동제가 벌어지는 날짜는 각기 다르다. 지난 11월10일 레이산현 랑더마을에서 열린 축제 한마당에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200여 명의 주민이 참가했다. 대동제가 열리는 날이면 마을 입구에 곱게 차려입은 처녀들이 나와서 다른 마을에서 온 주민과 지나가는 손님을 맞는다.

이때 빠질 수 없는 것이 갓 수확한 햅쌀로 만든 미주(米酒)다. 방문객은 이들이 권하는 술을 마셔야 하는데, 많게는 9잔을 들이켜야 마을에 들어갈 수 있다. 손님은 건네는 술에 손을 대지 못하는데, 마시길 거부하면 코를 막아 억지로 입에 쏟아붓는다. 대동제에서 펼쳐지는 먀오족의 현란한 춤과 아름다운 노래는 찾은 이의 혼을 홀딱 빼놓는다. 남성들이 펼치는 대나무 악기 루성(芦笙)의 장엄한 연주와 울긋불긋한 전통의상을 입은 여성들의 화려한 춤은 전문 예술인 못지않게 우아하고 정교하다.

음주가무에 능한 먀오족은 한 해 수십 차례 축제를 벌인다. 축제는 단순한 놀이마당이 아니라 먀오족의 고단한 역사가 숨겨진 문화 행위다. 문자가 없는 먀오족은 선조의 찬란한 역사를 대동제에서 부르는 노래를 통해 후손에게 전달했다. 자오지밍 랑더마을 부촌장은 “대동제는 한족에게 쫓겨나 정착한 새 고향에서 맞는 기쁨과 평안함을 이웃과 함께 춤과 노래로 나누는 장”이라며 “주민 간의 단결을 도모하고 후손에게 민족문화를 전승한다”고 말했다.

축제 때는 젊은이들의 자유연애를 허용하는데, 무엇보다 다른 마을 주민이나 이민족과의 만남을 적극 장려한다. 근친결혼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축제에서 만난 처녀·총각은 노래와 춤으로 구애를 하는데, 먀오족은 순간적으로 표현된 노래와 춤이 재주와 총명함을 증명한다고 여긴다.

먀오족의 문화와 풍습은 우리 민족의 정서와 통하는 점이 많다. 음식은 고추·마늘·생강 등을 넣은 매운 요리를 좋아하고, 중국에서는 드물게 개고기를 즐겨 먹는다. 장융파 중국민족박물관장은 “북방에 살다 한족에 쫓겨 내려온 먀오족의 문화에는 떠나온 고향에 대한 향수와 현재 살아가는 삶터에 대한 깊은 애착이 담겨 있다. 고단한 역사에서 비롯된 슬픔과 한을 가슴속에 묻어둔 채 살아가는 민족”이라고 말했다.

오지까지 파고든 인터넷과 관광객

지난 세기 말부터 먀오족은 엑소더스 시기만큼이나 어려운 위기를 맞고 있다. 한족 이주민보다 무서운 한족화(漢族化)의 물결이 몰려오고 물질문명의 공세로 민족 정체성이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구이저우에 정착한 뒤에도 먀오족은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하고 한족과 차별된 문화와 풍습을 발전시켜왔다. 청나라 때 시행된 개토귀류(改土歸流) 정책으로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에게 자치권을 내주고 한족의 호구에 편입됐지만, 한족화만은 철저히 피해왔다. 하지만 미디어와 인터넷을 앞세운 중국의 물질 공세는 먀오족의 생활 전체를 뒤흔들고 있다. 이제 산골 오지에 사는 먀오족조차 민족어보다는 중국어를 더 잘 구사하고, 먀오녠보다는 춘절(중국 설날)이 더 각광받고 있다. 먀오녠에 벌이는 대동제조차 마을 축제라기보다는 외부 관광객을 불러들이는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한 지 오래다. 심지어 먀오족의 춤과 노래만을 상품화한 관광상품이 등장했고, 적잖은 주민이 공연 출연자가 되어 외지에서 일하고 있다.

먀오족 전통의상을 만드는 장인 양위예(74)는 “한 세대 전만 하더라도 먀오족의 딸이나 며느리는 직접 자수를 놓고 옷을 만들 줄 알았다. 손재주가 없는 여성은 바보 취급을 받고 시집을 못 갈 정도였다”고 말했다.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전혀 달라졌다. 장인 양칭치우(41)는 “전통의상을 하나 맞추려면 싸게는 2천~3천위안(약 34만~51만원)에서 비싸게는 7천~8천위안(약 119만~136만원)이 들어 경제적 부담이 큰데다 입기가 불편해 찾는 사람이 줄어들고 있다”고 말했다.

일부 먀오족은 변화를 반기고 있다. 중국 내에서 먀오족 마을로는 가장 큰 규모의 시장에서 숙박업을 하는 리푸중(66)도 그중 하나다. 시장초등학교 교장이던 그는 지난해 퇴직 전 월급보다 3배나 많은 4만위안(약 680만원)을 벌었다. 그는 “문화대혁명 때는 홍위병에게 구타까지 당하며 전통문화를 압살당했지만, 지금은 그것을 주민 소득을 높이는 데 이용하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한때 대륙의 운명을 놓고 한족과 경쟁했던 먀오족. 그들은 거센 한족화의 위협 속에 이전과 같은 강한 정체성과 민족문화를 어디까지 유지할 수 있을까?

구이양(중국)=모종혁 통신원



동남아에 사는 먀오족 ‘몽족’의 수난사
전쟁 때 미군 도운 대가는 학살과 망명

먀오족은 중국에만 사는 게 아니다. 중국 서남부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베트남·라오스·타이·버마 등 동남아시아에도 100만 명 넘게 살고 있다. ‘몽(Mon)족’이라는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 동남아시아의 먀오족은 해당 국가에서 소수민족으로 핍박을 받아왔다. 이 때문에 먀오족과 몽족은 산간지대에서 살아왔고, 재산을 움직이기 편하게 간소화했으며,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켰다.
오랫동안 거주국 내 약소민족으로 핍박받은 몽족은 베트남 전쟁과 라오스 내전 때 미국과 결탁했다. 험한 산세에 익숙한 몽족은 미군에 협력해 북베트남군의 보급로를 차단하는 데 앞장섰다. 산속에 위치한 수용소에 갇혀 있던 미군 포로를 구출하거나 실종된 비행기 조종사를 찾아내는 임무도 이들의 몫이었다. 라오스 내전에서의 위상은 더 컸다. 몽족은 라오스 전체 인구의 6분의 1을 차지했는데, 미 중앙정보국(CIA)은 이들을 라오스 친미 정권을 지원하는 용병으로 적극 이용했다. 인도차이나 전쟁에 참여한 몽족은 전체 남성 인구의 80%에 달했다.
하지만 인도차이나가 모두 공산화되면서 몽족의 운명은 풍전등화의 위기에 내몰렸다. 베트남과 라오스 공산정권의 대규모 토벌작전 속에 사로잡힌 몽족 용병은 잔혹하게 처형당했다. 일반 주민들도 미군을 도운 반역자란 굴레를 쓰고 수십만 명이 고향을 떠나야 했다. 라오스 공산정권은 몽족에 대한 ‘인종청소’를 공언하며 탄압했다. 인종청소의 광풍 속에 살아남은 수천 명의 몽족은 오늘날 밀림이나 산속 깊숙한 오지에서 ‘2등 국민’으로 살아가고 있다.
국외 탈출에 성공한 몽족 일부는 전쟁에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미국과 프랑스로 이주했는데, 그 수가 각각 27만 명, 2만 명에 달한다. 반면 타이에 남겨진 14만 명은 정치 난민 신세로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지난 30여 년간 타이 정부는 몽족 난민 처리로 골치를 앓았다. 그러나 지난해 12월부터 라오스 정부가 신변 안전을 보장했다는 이유로 몽족의 강제 송환에 착수했다. 몽족의 운명을 뒤바꾼 미국 정부는 베트남과 라오스에서 벌인 ‘비밀전쟁’의 존재를 부정하며 그 짐을 타이에 떠넘기고 있다. 미국 정착에 성공한 몽족 사람들은 활발하게 로비를 벌이고 있지만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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